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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기 글쓰기 7주차 수업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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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에 작성일15-04-14 16:46 조회3,33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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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티카 >

 

스피노자는 넘치는 수사학을 통해 서술한 니체와는 달리 기하학적 증명을 통해서 신을 설명하려 하였다. 여기서 스피노자가 신을 설명한 내용 이전에 이러한 기하학적 서술 방식에 먼저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세상이 수학적 질서로 되어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그동안 우리는 수학을 계산으로서만 생각했다. 이는 시험을 위한 것으로서만 작용하는 수학을 배워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입식 교육은 질문 없이 그저 배우기만 하는 것이다. 선생님의 일방적 교육이 주입식 교육이 아니다. 왜 배우는지에 대한 설명이나 고민이 없는 배움이 주입식 교육이다. 따라서 신체는 자연히 수동과 부정의 신체로 형성된다. 하지만 여기서 서술하는 기하학적 증명은 인간 신체의 능동성을 키워주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수학에 접근한다. 고도의 실용성으로서의 수학을 배우는 것이다. 보통 수학, 논리학에서는 기쁨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서적인 글만이 기쁨을 준다는 것은 값싼 감상에 불과하다. 기쁨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문체가 아니라 글의 밀도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서양에서 기독교적 신이 아닌 이성적으로 사유할 근거를 제공한다. 진솔하고 정직하게 신이라는 존재와 마주한다. 여기에는 사적인 마음을 두지 않는다. 그리고 신의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 고도의 지성을 동원한다. 깨달음을 위해 나의 요욕칠정을 관찰하는 불교의 방식과 유사하다. 이러한 고도의 지성을 통한 인식은 어느 나라 누구든지 기본적이고 공통적인 질서를 가진다. 유일신은 초월자이자 절대자이다. 이는 만물과 별도의 법칙으로 존재한다. 스피노자는 기하학적 설명 방식을 통해 실체, 속성, 양태라는 철학적 개념을 발명했다. 실체(=)는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이나 의존하지 않는 존재이다. 속성은 신의 존재를 표혀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표현론이라고도 한다. 양태는 자기 혼자 존재하지 못하는 의존적, 유한적인 개념이다. 연장속성과 사유속성이 혼합되어 있는 것이 양태이며 무수한 변용들을 만들어 낸다. 신은 절대적인 긍정이며 만물안에 존재하는 신은 그 자체로 긍정적이다. 이를 내재성이라 하는데 초월과는 다른 의미이다. 신은 무한히 많은 만물을 낳았으나 만물안에 있다. 하지만 이러한 내재성은 범신론자라는 오해를 부러온다. 범신론은 자연에 대한 신비주의, 감상주의에 빠지기 쉽다. 이미 정염에 휩싸여있기 때문이다.

 

윤리는 자기 안에서 가치가 생성되는 것이다. 자기로 돌아오는 가치이며 생성을 한다. 도덕은 외부에서 오는 명령에 의해서 수행된다. 그래서 금지, 금욕이 많다. 또한 나에 대한 혹은 인간에 대한 부정과 부정적 판단이 많이 발생한다. 여기에는 욕망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토대로 한다. 인간의 신체를 욕망의 덩어리로 보는 것이다. 감정이 순수하다거나 영혼이 순수하다는 것은 일종의 망상에 불과하다. 완전히 순수하다는 것은 쾌락에 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혼의 순수함은 유일신의 개념에서 도출되었다. 이처럼 순수하지 못하고 불완전한 내가 혼자서 공부하는 것은 이성의 진작도 깨달음도 이룰수 없다. 그래서 도반들과 같이 공부해야 한다. 내 안에는 언제라도 나를 배신할 수 있는 모든 요소가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소로부터 생겨나는 작은 습관들이 나의 운명을 결정한다. 따라서 이러한 작은 습관들을 바꾸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성서는 신의 본능에 대한 것이 아니다. 신의 존재를 증명한 것도 아니다. 신이 무엇을 좋아하는가를 쓴 책이다. 신이 자기 존재를 증명할 때 기적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낸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것이 아닌가. 필연성이 아니라 우연적인 것 즉 우연성에 의존하여 신을 설명한 것이 기존의 신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적들이 왜? 어떻게? 신을 증명한다는 것인가. 스피노자는 필연성을 보지 않고 우연성만을 가지고 신을 설명하려는 것에 대해 반문한다. 이성은 우연과 정염에 좌우되면 안된다. 이는 내가 스스로의 가치를 만들어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연성에 의존하는 것은 이성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우리의 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유한함으로 인해 그 바탕에 이미 편견과 오류를 가진다. 따라서 이러한 우연성을 극복하고 필연성을 인식하려는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다. 진리는 결코 우연적인 이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이러한 이적만을 바라는 것은 외부의 명령만을 듣겠다거나 신의 노예가 되는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우연적인 것에만 연연하는 것. 이것이 바로 무지를 보여주는 모습이다. 신의 능력은 자연의 순리에 대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연성은 지속적인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새로운 우연성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집착한다. 그리고 이러한 우연성을 하나의 법칙이라고 믿어 버린다. 원인을 모르는 것이 우연성이다. 이러한 우연성은 우리에게 자유가 아닌 예속을 준다. 하지만 원인을 알고 인과를 알아가는 필연성에 대한 이해야말로 우리에게 예속이 아닌 자유를 준다. 스피노자가 야만의 극치라고 외치며 우리에게 말하고자 한 것이 이 자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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