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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7 그리스인 조르바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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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우 작성일15-10-20 16:06 조회3,14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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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역학 시간은 오적산에 대해 배웠습니다.

5가지 적이 병을 일으키니 이를 해소하는 약제의 성능과 방제 구성에 대해 배웠습니다.

글쓰기 수업은 곰샘의 그리스인 조르바입니다.

첨부 파일로 올립니다.



2015.10.17.일 그리스인 조르바 곰샘 강의

 


두 학기를 건너뛰고 오랜만에 곰샘을 강의시간에 만났습니다. 샘의 유쾌한 강의는 2시간 동안2학년 학우들을 즐겁게 하였고, 샘은 4학기 에세이에 대해도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질문을 가지고 읽은 책의 동선과 그들이 겪는 인생역정을 주시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

  

그리스인 조르바강의

 이 소설은 노인인 조르바와 젊은이인 두목이 만나서 cross되면서 肉化되는 과정이다.

 각각이 섞여서 조르바라는 text가 탄생하는 것이다. 두목은 관념적이고 그의 생각에 육체를 부여해야 한다. 그럴러면 동양의 성자들이 말했듯이 오래 살아야 한다. 조르바는 전쟁과 고려장을 뚫고 노인까지 살아남았다. 지혜의 보물 창고이다. 살아온 자체가 지혜이다. 조르바의 노년의 삶은 세계에서 가장 멋진 캐릭터이다. 책의 아무 곳을 펼쳐도 잠언과 낭송이 쏟아진다. 그런 인생의 비결은 뭘까? 질문을 가지고 탐구해 들어가면 배울 것이 많다.

 저자인 니코스카잔스키는 길 위에서 이 글들을 썼다. 2번 결혼하고 50세가 넘어서 집을 두었다. 정착했던 적이 있나 싶다. 현대인의 집에 대한 집착은 왜곡되어 있다. 이사하여 7일만 살면 그 장소에 익숙해지고 6개월이 지나면 권태로워 진다. 어떤 조건에도 항상성을 가지도록 인체는 되어있다. 오래 머무르는 것을 못 견디어하고 원초적으로 떠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자본은 학교, 직장을 목적으로 하면서 좋은 집에 정착하라고 한다. 만들어진 환상이다. 이런 소유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막연한 불안감에 시달린다. 직장에서 시간이 많으면 불안을 야기 시키고 결핍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지진이 나서 집이 파괴되어도 사람들은 TV안테나를 설치하고 공동체를 만들어 잘 먹고 잘 산다. 이와 같이 생사는 바로바로 reset된다.

 강남 재벌도 쪽방에 가면 금장 적응할 수 있다. 단지 이미지가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그래서 감옥에 가도 살 수 있는 것이다. 신 영복샘은 감옥에서 20년씩이나 살았다. 백기완씨는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고도 살아남았다. truma는 현대인이 공모하여 조작한 것이다. 생명이 가진 다양한 지층을 보아야 한다. 살아서 입체적으로 대비해보면 안정적으로 사는 것이 권태롭다. 조르바에서도 마을 장로 노인이 말하지 않는가? 내가 젊었다면 목에 맷돌을 달고 물 안에 뛰어 들고 싶다고. 주부 노동은 창조적이지 않다. 그래서 주부들이 권태로워한다. 몸의 생리적 구조인 생명성은 위에 있다. 잠시 쉬었다 가는 곳이 집이다. 길 위에 나설려면 정해진 코스에서 이탈해야 한다. 집을 지워 버린다. 그러면 모두 길이 된다. ‘이 종착지가 되면 다시 홈 패인 공간으로 들어가게 된다. 왜 지금 부자들은 행복하지 않은가? 영화 베테랑에서 그리는 재벌 2세의 모습이 그러하다. 몸으로 직접 창조한 성취감이 없고 쾌락과 소비만 있기 때문이다. 이런 욕망은 서양의 전쟁의 빌미로 제공된다. 트로이 전쟁도 헬레나란 여인을 취하기 위한 전쟁이다. 성과 폭력이 주이다. 이 두 개는 자본주의의 노골적인 동경이다. 지금은 이 둘을 돈으로 사서 마음대로 하기 때문에 더욱 더 왜곡되고 있다.

 인간은 원초적으로 노마디즘이다. 유목민이 1차원적인 것이다. 집과 길의 개념을 바꾸어야 한다. 조르바는 일찌감치 이것을 깨닫고 길 위에 나선다. 자기 스스로 삶의 길을 만들고 양생술과 윤리학을 터득한다. 쾌락에 중독되지 않는 노하우는 버찌를 통해 깨닫는다. 민족주의 뒤에 항상 신이 있음을 알아차린다. 신부를 살해하고 나서 그 아이들의 맨 얼굴을 보고 조국과 신을 버리고 도주한다. 하느님과 맞장을 뜬다. 조르바는 범신론적인 신체이다. 조르바는 길 위에서 자기의 삶에 충실하고 자신의 욕망을 본다. 충동은 버찌로 해결하고 두려움은 국가와 종교가 억압하여 생긴 것을 알고 그 자체를 버린다. 다만 여자는 평생의 탐구 대상이다. ‘여자란 무엇인가?’ 질문하면서 자기 자신과 대결한다. 조르바가 여자를 사랑하는 방법은 일종의 보살행이다. 상대편 여자를 모두 행복해지게 한다. 그러면서 숙식을 해결하는 생활의 지혜이다. 상대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에로스이다. ,,미를 따지지 않는다. 오르탕스 부인에게서 영웅담을 들어 주면서 그녀를 인격적으로 완성시켜 준다. 그러나 여자가 결혼, 정착하자는 말을 하는 순간 그녀의 매력은 사라져 버린다. 여자가 어떤 욕구를 가지고 있는지 정곡을 찌른다. 여성 자체를 존중해 주니 마초라고 말 할 수도 없다. 책 말미에 조르바는 다시 결혼을 한다. 그 이유는 추워서이다. 리얼리티가 샘솟는 에로스이다. 사랑은 삶을 창조해 낼 수 있는 능력이다. 조르바는 사랑하되 쾌락에 빠지지 않고 소유하되 집착하지 않는다. 사물과의 교감 능력이 그를 갈탄광이 되게 한다. 노동은 인간이 가진 축복이다. 활동과 노동은 같은 말이다. 조르바는 일하는 순간, 키스하는 순간, 그 순간만이 있다. 어디에도 중심이 없다. 매일 매일이 신비이다. 지금 여기에 대한 집중만이 있다. 지금 뭐하니?하고 묻는 것은 불교의 위파사나’()수행법과 일치한다. 그리고 조르바는 자기 자신만 믿는다. 자기 호흡만 본다.

 두목은 책을 가지고 실천한다. 조르바의 육체를 통해 배운다. 신체가 바뀌게 된다. 먹을 것을 즐기며 나중에 춤도 출수 있는 신체로 변한다. 두목은 어릴 때 우물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붙들 수 있는 이상을 찾아 해매는 것이다. 불교도 그 이상 중에 하나였다. 자기와 맞서고 부처도 깨부수어야 한다. 두목은 결국 과부에게 가게 된다.

 스스로를 믿고 간다. 자신과 질문하고 자기와 맞서야 한다. 내가 서 있는 곳이 길이다.

  

다음 주 는 신 근영샘이 아파야 산다2주에 나누어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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