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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열하일기 수업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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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tcho 작성일18-06-07 17:16 조회1,6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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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6월 03일 열하일기 수업 후기<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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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을 열면서 질문-공부한다는 것은 좋은 삶을 만들어낸다는 것. 그렇다면 글쓰기와 좋은 삶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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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부터 시작하는 교재, <대청제국> 소개<br>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연암이 가지는 의미를 살펴볼 수 있다. <br>
연암이 살던 시대의 국제 정세 흐름을 볼 수 있는 책<br>
흔히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중국에 대한 관념과도 비교해 볼 것.<br>
읽으며 새롭게 발견한 것이 있다면 기존의 선입견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또 어떤 지점을 배울 수 있는지 이야기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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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의 글이 실린 별도의 강의안과 함께 수업이 진행되었습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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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고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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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고 : 옛 것을 법으로(모범으로) 삼는다는 것<br>
창신 : 새롭게 만들어낸다는 것<br>
얼핏 보기에는 상반되는 태도 두 가지. 법고와 창신. 이 둘을 결합시켜 놓은 것이 연암 그룹의 글쓰기이자 삶에서 실천 전략. 여기서 18세기의 대표적 지식인 그룹이 가지고 있었던 삶에 대한 태도를 볼 수 있음. <br>
법고창신은 논어의 온고지신에 비슷하게 느껴질 수도 있음. 자칫하면 좋은 게 좋은 것인 절충론에 멈출 수도. 겉만 번지르르한 절충이 아니라 실제로 삶 속에서 하나의 길이 될 수 있는가? 물어봐야 함. 새로운 길을 낼 수 있는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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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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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득록은 정조가 매일매일 득한 깨달음을 기록으로 쓴 것.<br>
18세기를 이해한다는 것은 연암 박지원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연암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역사적, 정치적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br>
<a href="https://imgur.com/9EOVXQq"><img src="https://i.imgur.com/9EOVXQq.png" title="source: imgur.com" /></a> <br>








18세기의 연암과 19세기의 다산. 둘을 가르는 건 정조의 사망(1800년). 드라마틱하고 입체적인 연암과 다산, 그리고 정조.<br>
사실 조선 시대를 통틀어 왕권이 신권을 누를 정도로 강력했던 건 손꼽을 정도로 드물다(태종 과 세조 정도). 왕권 강화를 꿈꾸다가 쫓겨나기도 한 사례(연산군)도 있음. 왕권이 결코 신권을 압도하지 못하는 조선의 권력 구도를 전제해야 함. 그래서 왕들 입장에서 불편한 세력이 바로 사대부. 이것이 바로 주자학(성리학)의 이념. 송나라의 유학인 성리학은 사대부 우대의 기조 위에서 성립된 것. 조선 왕조는 오백년 동안 이 방정식 위에서 움직여 왔으며, 때문에 왕들은 생각보다 고달프고 할 일이 많았음. <br>
조선 후기로 가면 붕당 정치의 큰 축이 노론과 남인으로 양분화 됨. (노론)9:1(남인) <br>
사대부라는 계급이 하나로 통합되어 왕권에 일제히 대항하는 게 아니라, 나뉘어져서 서로 싸우고 대립함. 왕의 입장에서는 제도적으로 왕권에 한계가 있으므로 사대부를 분열시키고 균형을 유지한 채 각자의 세력이 팽팽한 힘겨루기를 하는 상황에서 왕이 결정적 캐스팅보트를 쥐는 것이 유리함. 사대부 중 어느 한 쪽이 힘을 잃어서 무게중심이 쏠리게 되면 안 됨. 그래서 나온 게 영조의 탕평책.<br>
이런 배경 상황 위에서 일득록을 살펴보자.<br>
-1797년도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br>
1784년, 서학(천주학)을 처음 접한 정약용 <br>
: 광암 이벽은 다산의 맏형인 정약현의 처남. 이벽에게서 서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감화됨.  <br>
1785년, 추조 적발 사건<br>
: 형조(刑曹, 秋曹)에서 천주교도들의 비밀 신앙집회를 적발하여 낸 사건. 잡힌 사람(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등)이 전부 남인이었기 때문에 노론의 정치공세가 시작됨. 정조는 가볍게 여겨 넘어감. “이것을 계기로 이용서(李龍舒) 등 유생들이 척사상소(斥邪上疏)를 올려 그들을 처벌하도록 여론을 일으켰으나, 성학(聖學:儒學)이 흥하면 사학(邪學)은 자멸할 것이라고 믿고 있던 정조는 김범우만을 경상도 밀양의 단장(丹場)으로 유배시켰다.(출처: 네이버 지식백과)”<br>
***정조 시대라는 게 중요함. 다른 왕이었다면 그냥 안 넘어갔을 수도 있었음. 정조는 사대부들보다 많이 알고 공부했기 때문에 권위가 다름. <br>
1791년 진산 사건<br>
: 이 사건 때문에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짐. 천주교 신자가 조상의 신주를 불사름. 이전에는 예배를 드리느냐 마느냐 하는 차원이었다면 이제는 제사, 즉 유교의식에 대한 거부로 한 단계 더 확장됨. 조선이라는 나라의 근간인 신분제가 서학과 대결하게 되는 것임. 학문의 문제가 아니라 정통과 이단의 문제로 번져나감. 걸린 사람은 또 남인이었으며, 이는 노론의 호재. 격렬하게 성토하고 공격. “사학(사사로운 학문)들을 발본색원해야 합니다!” 난감해진 정조. 사대부들의 상소를 그저 외면할 수 없음. 왕으로써 응답해야 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 이 때 정조의 대처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글 중 하나가 바로 이 일득록의 글. <br>
정조는 노론의 주장을 받아들여 숨겨진 사학, 즉 음흉한 사학들, 무의식적인 사학들까지 손봐야 한다고 결정. 표면적으로 보면 정조가 아주 제대로 응답을 한 것임. 그런데 여기서 무의식적인 사학이란 무엇인지 봐야함. <br>
사학(邪學), 즉 간사한 학문이라는 뜻인데, 정조는 마음 속의 사학을 문장과 글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음. 즉, 글을 보면 이 사람들이 얼마나 사학에 오염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는 것. 그 예가 소품문.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트로트만 있는 세상에서 서태지가 댄스곡을 들고 나타났을 때, “얘네들은 세상에 대한 다른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형식이 나타나는 거야!”라고 간주하는 것. 어떤 말을 하든지 세상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표지가 바로 글의 형식으로 나타난다.<br>
소품문의 ‘소품’은 문장을 뜻한다. 특정한 문장을 쓰는 자들을 단속하고, 전부 옛 문장으로 반성문을 쓰게 하고, 거부하면 관직 박탈. => 문체 반정<br>
그런데 문체 반정에서 대거 덤터기를 쓴 쪽은 남인이 아니라 오히려 노론이었음. 결국 문체반정의 의도를 두고 여러 해석을 내릴 수 있음. 1) 정조가 실제로 문체를 탄압하려고 2) 남인 세력 보호를 위해 노론 견제 <br>
당시 연암네 그룹 사람들이 전부 잡힘. 박지원, 유득공, 박제가, 이덕무...<br>
정조는 이번 문체반정의 그물을 빠져나간 가장 큰 물고기는 박지원의 열하일기다. 하면서 열하일기를 콕 집어 언급함. 여기서 알 수 있는 두 가지 사실. <br>
1) 연암은 관직을 포기하고 전혀 정계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정조의 시야에는 이미 연암이 포착되어 있었다는 것. <br>
2) 연암이 아무런 정치적 세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선 정계에서 그가 차지하고 있었던 위상<br>
3) 정조는 과연 연암을 어떻게 대했는가? 보통은 관직을 박탈한다. 그런데 연암은 관직도 없고 재산도 없음. 오히려 꽤 높은 관직을 제안. 반성문을 쓰면 벼슬 주겠다고 함. ‘정말 문체를 탄압하려고 하는 독재군주의 입장에서 이 정책을 펼친 것인가?’하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음. 잘 따져보면 문체반정으로 망가진 사람은 오직 이옥 하나뿐임. 그러나 관직으로 나아가지 않아서 오히려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한 사람. 하여튼 정조의 문체반정은 정치적인 배경 위에서 시작된 일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사회문화적인 지각변동을 일으킴. 18세기 조선 지성계의 진면목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가 된 사건이기도 함. <br>
정조는 신하들마저 공부 좀 그만하라는 상소문을 보낼 정도로 공부 덕후. 이 정도로 공부를 한 배경에는 사대부를 완전히 문(文)으로 제압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수도. 그리고 남인이 노론과 대항할 정도의 세력이 되어야 그 사이에서 왕권이 강화될 수 있는데 그런 상황이 아니었음. 노론이 모든 의제를 선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남인은 내놓을 수 있는 의제가 별로 없었음. 그렇다면 유학을 버리지 않으면서 기존 유학의 세력과 싸우는 방법은 뭘까? 아예 유학의 근본, 그 뿌리까지 파고드는 것임.<br>
조선의 유학은 송대 유학, 즉 성리학. 남인들은 주자학을 우습게 보고, 주자학의 근본인 공맹 시대의 유학으로 뛰어듦-원시 유학, 근본 유학. 다산의 근원이 바로 이것임. 더 원칙주의자가 된다는 의미. 더더욱 유학의 본류이자 원류임을 자처할 수 있게 되는 것. 훨씬 더 엄격하고 근엄한 보수주의자가 됨. <br>
서학의 프레임으로 주자학을 뛰어넘어서 원시 유학으로 통하는 다른 길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나중에 종교적으로 문제가 되니 다산은 서학을 버리고, 이미 종교인이 되었던 남인들은 그럴 수 없어서 결국 죽게 됨. <br>
세력을 키워야 했던 정조. 하지만 주자학의 나라인 조선의 왕이면서도 서학과 양명학 등 모든 학문을 공부했다고 일득록에 나옴. 정조는 자신의 지위 때문에 주자학과 성리학을 결코 넘어갈 수 없다는 것에서 그 한계가 있음. 다산 역시 남인이었기 때문에 주자학을 넘지 못하는 것. 연암은 이미 주자학으로는 지금의 세계를 해석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며, 청나라를 새롭게 발견하고 전혀 다른 문장을 받아들임. 그 문장이 소품체. 이 소품체의 기원을 살펴보면 명말청초의 소품체에서 비롯된 것임. 원종도, 원굉도, 원중도 등 3원으로 일컬어지는 공안지역 사람들(공안파)이 새로운 문체를 주도한 문장가들. 이들은 이탁오와 연결되어 있으며, 이탁오는 또 왕양명과 이어짐. 공교롭게도 주자학이 가장 배척했던 세력. 연암 그룹이 주자학에 맞서 양명학을 학습하겠다!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음. 기존의 문체에서 한계를 느끼고 다른 표현형식을 받아들였던 것. <br>
결과적으로 정조는 놀라울 정도의 직관으로 소품문이 가진 정치적 불온함을 정확히 캐치해 냈던 것. 문체반정은 이런 배경들이 겹겹이 쌓여 있는 중첩적인 사건이다. 단일화되지 않는 여러 힘들이 동시적으로 존재했었다는 걸 의미함. 역동적. <br>
보통 조선 중기의 임란과 병란을 거치며 피폐해진 조선이 어떻게 18c에 반짝 반등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가진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는 이러한 거인들이 새로운 에너지로 자신의 영토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정조라는 임금 덕분에 이런 거인들이 뛰어놀 수 있는 품이 마련되었다는 것. 조선 후기를 정조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보게 되면 아주 이질적인 그룹들이 약동했던 입체적인 상황을 목격할 수 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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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관문고>>
연암의 글은 굉장히 정교하게 조직된 글이다. 읽고 나면 좋은데 딱 잡히지는 않는다. 문장에 대한 글을 여러 차레 남긴 점에서 특이하다. <br>
문장론을 알 수 있다는 건 연암의 삶에 대한 실천론을 알 수 있다는 것. <br>
내 생각을 잘 전달하는 것. 뜻을 전달하는 것이 문장이다.<br>
문장의 문 : 제도. 싣는다. 무엇을? 도를 싣는다는 것. <br>
‘문장은 도를 싣는데에 있다.’ -동아시아의 문장론 <br>
20세기 서양의 문장론이 들어왔을 때 놀랄 수 밖에 없음. <br>
나츠메 소세키, 이광수, 루쉰이 놀란 것. 그래서 각자의 방식으로 받아들여 변주한 것이 문학에 대한 한중일의 태도, 더 나아가 근대에 대한 한중일의 태도라고 할 수 있음.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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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치제문>>
파격적인 문장. 장난스럽게 느껴지지 않음. 오히려 망자를 향한 그리움과 슬픔이 묻어남. 당시에는 엄청나게 파격적인 글이었으며 일반적이지 않았음을 이해하기.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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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의 글은 단순히 손재주에서만 비롯되는 게 아님. 진심의 마음을 담아 진솔하게 쓴 글이며, 소품체라고 하는 큰 테두리로 묶인 것. <br>
왜 정조에게 불온하게 느껴졌는가? 주자학의 나라의 왕은 규칙과 실체가 엄격하게 규정된 세계가 이데아. 자칫 이런 경계가 무너지면 나라의 기틀이 흔들리게 됨. 진기가 통하는 대상이라면 누구와도 쉽게 접속하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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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국사 시간에 문체반정을 배우면서도 도대체 이게 왜 이리 큰 사건인지 도통 와닿지가 않았습니다. 문체가 뭐가 그리 문제일까? 하지만 그 시대의 전제와 정치적 배경을 쌓고 바라보게 된 문체반정은 상당히 흥미로운 사건이었습니다. 문장으로 사람의 무의식을 알 수 있다니요! 문체반정이라는 검열이 꽤 문학적이고 지성적인 공격처럼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니다. 권력자가 열렬한 공부 덕후였기에 이렇게 세련된 전법을 구사할 수 있는 거구나! 예를 들어 진시황의 분서갱유처럼 싹 다 묻어버리고 불질러버리는 단순한 방법도 있을 텐데 말이죠. 새삼 정조라는 인물에 대해 다시금 감탄하게 되었습니다.<br> 작년 일성 수업에 읽었던 연암 그룹의 글도 기억이 납니다. 문체반정의 벌로 반성문을 쓰라는 왕의 명령에 이덕무는 다소곳이 앉아 줄줄이 써서 바치고, 박제가는 반박글을 일필휘지로 써서 냈죠. 음식에 다양한 맛이 있듯, 글에서도 그 다양함을 인정해달라고 했던 내용이었는데, 박제가의 글 중에서 제일 인상 깊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구절처럼, 그들의 생각은 이미 기존의 형식으로는 담아낼 수가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도 소품문에 강렬하게 접속한 그들의 인과를 파노라마처럼 목격한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자신이 지켜야 할 가치를 철저하게 방어한 정조의 마음 역시 납득이 갑니다. 조선 후기 지성사는 이처럼 개성 강한 캐릭터의 거인들이 뛰노는 동산을 보는 것 같습니다. 또한 열하일기 수업시간 내내 연암 박지원 뿐만 아니라 정조와 다산 정약용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데 그 재미가 화수분처럼 퐁퐁 솟아납니다. 연암과 다산은 살아생전 교류가 없었다고 하는데, 먼 훗날 자신들이 이렇게 한 세기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대왕님과 함께 묶여 연구되고 있다는 걸 알면 어떤 반응일까요? <br>
이제 밴드 여행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연암의 열하일기를 읽고 계획하는 열하 여행이지만, 정조와 다산, 연암 그룹의 한명 한명까지 모두 어깨에 걸머지고 준비하는 기분입니다. 아무쪼록 모두가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여행기 발표까지 잘 마무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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