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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여행기(정재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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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청목 작성일18-07-08 19:08 조회1,6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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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의 출발선에서 떠난 함양여행

 

드디어 탈출! 여행을 떠나기 하루 전, 2주간의 요양보호사 실습이 끝났다. 치매 노인들의 실종을 막기 위해 자유로운 이동이 통제된 요양원은, 감옥과도 같았기에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이었다. 실습이 끝나자 그동안 쌓였던 긴장과 피로가 몰려왔다. 육체는 휴식을 원하고 있었다. 장맛비는 추적추적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다음 날 새벽부터 남원으로 떠나야 했다. 모든 것이 귀찮고 쉬고만 싶었다. 어느새 열차의 예매 취소 버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마음속으로 그려왔던 지리산을 만날 기회였다. 피로 때문에 여러 인연이 만들어낸 소중한 여행을 놓칠 수 없었다. “그래 떠나자!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지리산을 만날 수 있으리!”

 

다음 날, 아침 KTX에 올라 남원으로 향했다. 열차 안에서 탁 트인 풍경을 바라보며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여놓지 않았다. 연암의 발자취를 좇아 영감을 얻고 멋진 여행기를 써보겠다는 욕망보다는, 그저 요양보호사 준비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고 싶었다. 나는 사실 이번 여행에 냉소적이었다. 반나절의 시간 동안 미약하게 남아있는 연암의 자취를 둘러보는 것만으로, 과연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 이었다. 그러나 낯선 길에서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법. 나의 냉소를 무너뜨릴 반전의 요소들은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남원에 도착하니 그곳에 사는 경희와 은정 그리고 전날 먼저 도착한 성희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익숙한 사람들과 낯선 곳에서의 만남이었다. 감이당에서 경희, 은정을 보았을 때는 대도시의 사람들과 사뭇 다른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쉽게 말해 도시와 어울리지 않는 순박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남원에서 만난 두 사람은 그곳의 시공간과 그야말로 일치된 느낌이었다. 둘은 아마도 남원에서의 나를 보며 감이당에서 내가 느꼈던 이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삶이란 인연과 조건의 산물이다. 감이당에서 익숙했던 관계는 남원이라는 낯선 환경에서 조우하며 새로운 관계로 변주되고 있었다.

 

연암의 유적지에서는 예상했던 대로 별다른 영감을 얻지 못했다. 단지 열녀비를 보며, 어떤 가치보다 사람을 중요시하는 연암의 측은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열하일기에서 장복이와 창대를 대하는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인정과 연민을 진하게 가진 인물이었다. 그처럼 풍부한 감수성을 지녔기에 코끼리를 통해 우주의 비의(상기)를 사유했고, 청 문명의 충격과 환희를 인간의 울음(호곡장)으로 풀어내었을 터.

여행 내내 우리는 끊임없는 이야기꽃을 피웠다. 무엇보다 재밌는 건 다른 데서 꺼내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는 사주 명리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감이당에서 쌓아온 지성을 통해 서로의 삶을 나눴고, 인생과 사랑을 이야기했다. 사뭇 진지하지만 웃음이 넘쳤고, 공부해오며 습득한 개똥철학은 서로에게 신선한 영감을 주었다흡사 연암골에 모여 지성의 향연을 펼쳤던 연암 그룹과도 같았다.

벗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보고 느끼고 웃고 떠들며 근심걱정이 사라진 천진난만한 시간들. 그리고 이러한 여정을 통해 나는 연암을 더욱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 개발의 손길이 뻗지 않은 태초의 자연을 간직한 지리산. 그 지리산이 품고 있는 조그마한 마을 산내면을 보며, 조선시대 자연과 감응하며 살았던 연암의 시공간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자신들의 터전에 있는 경희, 은정의 모습을 보며 서울에서는 전혀 감각하지 못했던 조선시대 사람들의 신체성을 목격할 수 있었다.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편안하고 차분한 기운, 자연의 흐름과도 같은 느릿하고 안정된 호흡, 경직되지 않은 해맑은 얼굴, 타인의 시선에 관여치 않는 자유로운 체형. 연암의 신체성 또한 바로 이와 같지 않았을까?

 

도반들의 존재와 배려 덕분에 나는 그곳에서 연암의 발자취가 아닌, 연암 그 자체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연암과 같은 관찰력과 통찰력, 천지자연과의 감응, 유머와 여유를 갖추기 위해서는 어떠한 통념, 가치, 표상에 억압되거나 포획되지 않는 신체성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각박한 도시의 호흡과 반자연적인 자본의 리듬에 잠식된 신체로는, 도강록에서의 사이를 결코 발견할 수 없기에.

올해 초, 직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인 구도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다시는 조직에서 일하지 않기 위해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준비하고 있다. ‘지성과 활인이라는 나만의 고유한 길에 나선 것이다. 세상의 흐름에 끌려가는 것이 아닌 나만의 리듬, 나만의 호흡을 만들어 간다면 일야구도하기 속에서 도를 깨우쳤던 연암과 같이 카오스와 같은 세상에서 나만의 창조적인 사이를 열어갈 수 있으리.

 

<에필로그>

이번 학기 연암과 열하일기와의 만남은 나를 또 다른 차원으로 고양시켰다. 루쉰으로 인해 치열한 논리와 치밀함에 빠져있던 나를 천지자연의 품으로 내던지게 한 것이다. 또한, 함양 여행을 통해 얻은 신체성의 덕목은 나의 사유와 글을 더욱 풍요롭게 할 것이다. 이제 남은 건 오직 그러하게 길을 걷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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