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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 3학기 인류학 6번째 수업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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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커피 작성일18-09-10 14:06 조회1,6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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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은 워낙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기에, 책을 읽으면서도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하는 것에 있어 어려움이 있습니다. 지난 주 근영 선생님 강의에 이어, 2주차인 이번에는 문탁 선생님께서 핵심 개념들을 이해시켜주고자 여러 사례를 들어서 설명해주셨어요.


돈과 관련된 전제를 의심하라가 이번 학기 주제입니다. 폴라니와 그레이버의 질문은 무엇일까요? 어떤 식으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일까?를 염두에 두고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이하 아래부터는 의미가 빠르게 전달되기 위해 '이다'체로 정리하겠습니다.

 

폴라니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주로 우리가 생각하는 돈이라는 것은, 쿨라의 목걸이나 왐펌이 아니다. 중앙은행의 화폐이고, 화폐가 유일한 가치로 통용되는 사회이다. 화폐로 우리가 무엇이든 살 수 있는 사회이니,우리가 가치와 관련해서 어떤 가치를 측정하는 척도이기도 하고, 어떤 것의 가치를 표현하는 매개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시 돌아오면 폴라니는 무엇을 문제제기 하고 있는 것일까. 폴라니는 자기조정시장이라는 것을 깬다. 우리가 너무나 자명한 진리라고 이야기하는 자기조정시장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계보학적, 역사적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결론이 무엇인가. 폴라니는 돈이라는 전제를 폴라니식으로는 시장자본주의에서 자율적으로 존재하는 시장 자체, 시장의 자율성, 시장을 수없이 많은 개인들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본다.


모든 사람은 각자가 다 이성을 가진 상태에서 무엇이 가장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가를 가지고, 물건을 생산하고 만들고 팔고 사기도 한다. 그러니 시장에서 돈이 최고의 가치인 지금 사회를 폴라니는 시장사회라고 한다. 이 시장의 원리는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하는 개인들이 재화를 교환하는 곳이다. 그리고 시장 자본주의라고 하는 것은 어떤 믿음이 있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므로 그것을 인위적으로 막거나 조장하지 않으면, 그 사회 자체는 그런 교환에 대해서 언제나 재생산되고, 사회적 부가 생산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개인적으로 내가 지금 손해야, 갑을관계가 너무 심하잖아 이런 것들도 전제가 다 있다. 이 전제를 공유했기에 누군가가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은 것에 대해 비난하는 것이다. 이 공정한 플레이를 누군가가 어긴다면, 가령 대학에 부정입학한다거나 하 화가 난다. 우리는 시장에서 누군가가 승마를 하거나 대학에 가거나 무슨 전공을 한다거나를 정해주는게 아니다. 대학의 경쟁률이 몇 대 일이 되었건, 시장에서 가격이 너무 비쌀 때 가격이 조정되는 것처럼, 대학의 경쟁률이 전년도와 올해 조정된다. 그런 식이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제이다. 우리도 그 전제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굉장히 많은 행동은 오히려 이 전제가 왜곡없이 굴러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폴라니는 자율적 시장은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서 행위하는 개인이라고 하는 전제를 우리에게 의심하라고 하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거대한 전환을 쓴거다. 그 책의 결론은 애당초 그런 것은 없었다. 자기조정시장이라는 것도 사실은 국민국가라고 하는 것에 의하여 창출된 것이라는 거다. 이 자기조정시장이라고 하는 것은 상품화 될 수 없는 것을 상품으로 만들려는 즉시 그것을 막으려는 운동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거기까지가 우리가 한 것이다.



밑의 부제를 보면, 이 텍스트가 무엇을 이야기 하는지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게 과연 가능할까라는 질문을 하는 거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놓여있는게 자본주의가 시장사회라는 것인데 특히 그레이버는 폴라니보다 뒷세대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류학자이자 아나키스트 활동가이다. 한국에 10년 전쯤 왔었다. 아나키스트는 직접 행동이 특징이다. 한국 광우병 사태 때 촛불집회 할때 이와사브로 고소와 그레이버가 이것을 보고 싶었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이런 사례가 요즘 거의 없다. 광우병 촛불집회도 와서 보고 갔다. 교환과 가치,사회의 재구성이 그레이버 책의 부제다. 폴라니 식으로 말하면 시장 사회가 자기조정시장에 직면하면서, 사회가 자기를 보호하면서 사회법이 생기면서 더 이상 자율적인 시장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았다. 193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1990년대 뉴딜이라든가 사회주의적인 계획경제였던 거다. 자기조정시장으로 움직인게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도 계획경제를 많이 도입한거다. 또 사회법이라고 하는게 복지제도를 많이 도입하고 사민주의적인 성격이 강화된 것이다. 모든 유럽의 자본주의라거나 북유럽을 포함하여, 전형적인 19C자본주의가 아닌 복합사회였던 것이다.



193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국가가 개입했던 사민주의적 질서. 이것은 상당히 복지수준이 높다. 그런데 영국의 대처가 이런 것을 영국병이라고 하면서 영국의 복지제도를 확 없앤다. 레이건도. 그게 신자유주의인데, 우리가 신자유주의 아닌 다른 사회를 상상할 수 있을까? 신자유주의를 벗어날 수 있을까? 이런 맥락에서 그레이버가 이 책을 쓴거다. 인류학은 현실에서 다른 사회를 상상하기에 가장 적합한 책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적이고 급진적이다고 할 수 있다.



1,2장에서의 요지는 무얼까. 1,2장 읽으면서 개인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 속에서 우리는 과연 내가 어떤 것을 추구해야 할 것인가.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의 개념을 한번 생각해보고, 그 가치에서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문제는 사회이다. 사회가 실재하는가 와 관련하여 논쟁이 계속 있어왔다. 시장주의자들은 사회를 명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사회를 실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은 개인이고, 개인이 교환하는 곳이 시장이라는 거다. 있는 것은 개인 뿐이다. 개인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곳을 사회라고 부른다. 명목적으로. 사회가 따로 힘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개인들이 교환이 이루어지는 관계망을 부르는 이름이다. 그런데 그것과 대비하여 사회 자체가 실재한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사회학은 그런게 없으면 성립할 수 없다. 사회가 개인과 상관 없이 사회가 갖는 힘이 있다. 개인은 순수한 자기 이해를 생각하고, 이성을 가지고 있다. 이성은 합리성. 나도 모르게 사회에 의해 부여 받은 어떤 가치에 따라서 행동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버스에서 노인이 타면, 우리가 자리를 양보한다. 전통사회에서 보면 감을 따는데 몇 개는 남겨둔다. 까마귀나 까치 먹으라고. 인간의 행위인데. 왜 우리는 그렇게 행위를 하지?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회라고 하는 것이 개개인의 교환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행위를 규제하기도 하는 어떤 행동을 한다. 그것을 구조라고 할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사회는 심층구조이다. 우리가 개인이 나혼자서 정말 독자적으로 무엇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어떤 것에 의하여 나는 판단을 하고, 행위를 한다. 그런 사회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회 자체가 실재.



1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우리가 가치이론을 보면, 가치는 경제학적, 사회학적, 언어학적으로 이야기 할 수 있다. 그 동안에 가치이론을 우리가 정리해보니까, 세가지 정도로 가치가 정리된다. 책 26쪽.



경제학적 가치는 이해관계. 가치가 있으니까 내가 갖고 싶다. 이 가치는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 가치가 다 다르다. 가치가 어떻게 형성될까. 경제학적으로는 갖고자 하는, 욕망의 정도. 다른 것이 예를 들면 돈이라면 이것을 얻기 위해서 내가 갖고 있는 것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느냐에 따라 정의된다. 교환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대부분은 가치가 있다 없다는 것은 그것을 내가 기꺼이 돈을 주고 얻으려고 하느냐와 관련해서 결정. 그런데 여기서 가치라는 것은 인간은 무엇 때문에 행동하는가와 관련 있다.



우리는 왜 살까? 이 가치를 이야기 하는 것은, 무엇이 가치있다고 판단하고 추구하기 위해 어떻게 살고 있느냐. 그런데 사회학적 가치들은 인간의 이익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바람직하며 타당한 것들을 지시하는 가치들.



언어학적 가치는 차이이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사회란 무엇인가. 우리는 정말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다른 사회를 구성할 수 있는가? 그 정치적 비전은 무엇인가. 인간은 자기 이해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인가? 이 질문이다. 계속 그 질문을 갖고 간다. 사회학적 가치와 관련하여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회가 실재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이론이 자꾸 파탄이 난다. 학문적으로나 실재적으로. 왜냐하면 기껏해봐야 기능주의 사회학으로 간다는 것이다. 기능주의 사회학은 사회라고 하는 것은 정치적인 집단, 종교적, 교육적 기능, 개인을 넘어선. 이런 것들의 총합과 유기적인 연결로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하는 것이다. 폴라니도 사회가 실재한다고 하기 위해서 어떤 종류의 사회를 이야기 했냐면, 교환 뿐 아니라 상호성에 의해서 선물사회, 재분배 사회, 그리스와 같은 사회 이런 것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것은 유형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회가 실재한다고 하는 것이 파탄이 나면, 우리는 개개인의 행위와 관계망에 붙이는 이름으로밖에 이야기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럼 이때 개인은 사회라는 것을 모른다. 사회는 자기만 아는 존재다.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결국 모두에게 좋다는 것이다. 그런 믿음이 어떻게 바뀌어도 그 전제를 우리가 해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라는 것을 해체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그레이버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경제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정말 사회학적으로 움직이나? 우리라는게 뭐지? 우리 모두에게 좋은 것을 한다는게 가능한가? 우리 라는 게 어디 있어?



크로포트킨이 만물은 서로 돕는다고 말하면서 꿀벌이나 개미를 이야기 한다. 그런데 이게 도킨스로 오면 전부 이기적 유전자로도 설명이 된다. 이런 게 전부 가치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인간은 어떻게 행위하고, 서로가 다른 종류의 관계망으로 옮겨갈 수 있는가. 사회가 어떻게 재구성될 수 있을 것인가.



맑스는 자본에서, 자본주의적인 생산양식을 분석했다. 우리가 전자본주의사회의 사람들의 행위패턴을 분석하면서, 가치가 어떻게 그 사회에서 생산 유통 되는지를 분석하면서, 우리가 다른 종류의 이론으로 넘어가려고 한다.



우리는 보통 경제학적 가치는, 빵에 대한 가치는 빵에 대해 내가 포기해야하는 시간이나 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빵은 교환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지불할 것인가에 따라 가치가 결정된다. 내가 바로 밖에 있는 것을 따먹고, 내가 필요한 것을 바로 얻을 수 있으면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을 바로 얻을 수 없어서 객관적 가치가 발생하지 않는다.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대상이 있다. 무엇에 대한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나와 이 대상 사이에 거리가 있어서 발생하는 것이다. 직접 따서 먹을 수 있다면 욕망이 필요 없다. 그것을 향유라 한다. 이런 대상에 대한 욕망 만큼 이 대상은 객관적 가치를 갖는다. 내 입장에서는 욕망, 다른 이들의 입장에서는 가치. 내가 이것을 욕망하니까 가지고 와야 하는데, 이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내가 무엇을 바꿔야 한다. 내가 주는 것 만큼이 물건의 가치다. 이 물건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가치가 없다. 교환될 때 가치가 발생한다.



그런데 빵에 대해 가치를 갖는다는 것은, 교환에 의해서 가치가 형성된다는 것인데, 낸시 문은 뭐라고 하냐면. 맑스는 교환이 아니라 교환 이전에 생산(노동)을 통해서 이 사람이 이야기하는 행위. 이것은 모두 같은 층위에 있다. 이것을 만들기 위해서 흘린 노동자들의 땀방울도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가와섬에서는 열매가 있다고 하면, 이 열매를 생산하는 것 뿐 아니라, 이 열매를 누가 준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짜 가치가 있는 이유는 이 열매를 누군가에게 줬기 때문이다. 118쪽에 보면 인류학에서 가치이론이 소쉬르적 가치이론과 경제주의적 가치 이론을 오락가락 했다는 것이다. 경제학적 가치로 되면, 인간이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구조에 의해서 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말을 하는데,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문법적 구조에 의해서 말을 한다. 그게 랑그다. 그러면 우리가 함께 살기 위해서는 누구도 이 랑그의 법칙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근데 이렇게 언어학적 가치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가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없다. 개인의 행위를 규제하는 실재인 사회는 엄청나게 깨졌다. 그러므로 인류학은 경제학적 가치와 소쉬르적 가치에서 왔다갔다하면서 돌파구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그러니 그레이버는 신자유주의와 다른 종류로 삶을 구성할 수 있을까? 다른 종류의 사회로 이행할 수 있을까? 구성할 수 있을까? 이게 관심이다. 그래야 우리는 여기 있는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 그럴 때 지금, 낸시 문 이야기는 인류학이 주로 두 지점을 왔다 갔다한 것 이외에 낸시 문이 있었다는 것이다.



트로브리안드 제도는 쿨라교역에 의해 살고 있다. 쿨라교역에 있어서 쿨라는 가치가 있어, 그러면 119쪽에서, 가와 섬의 기본적 판단 기준은 음식을 주는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음식 자체가 아닌, 음식을 주는 행위가 가치 있다.



“가치에 대한 가와 섬의 기본적 판단 기준은 음식을 주는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만약 당신이 너무 많은 음식을 먹는다면 가와 사람들은 당신에게 아무 일도 말고 그저 누워서 좀 자라고 할 것이다. 이때 누워서 자는 것은 비 행위, 즉 시간과 공간에 대한 통제력의 축소를 의미한다. 이와는 달리 음식을 다른 누군가에게 주는 행위는 모종의 연대와 의무를 창조한다. 바다를 건너 멀리로부터 항해해 온 사람에게 음식을 준다면 이는 훨씬 더 높은 수준의 교환을 가능케하는 연대를 창조하며 따라서 그들은 카누나 조개 장신구 등의 훨씬 지속적인 귀중품들을 서로 교환할 수 있게 된다. 그 결과는 물론 더 큰 상호주관적 시공에 대한 지배력의 행사이다.”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119쪽



“이 모든 일련의 교환을 통해 가장 고귀한 층위의 보물이 탄생한다. 이 모든 교환의 행위가 이미 존재하고 있는 등급의 층위 혹은 더 높은 층위에 들어가기 위한 시도가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치는 행위에서 탄생한다. 가치란 한 사람의 보이지 않는 잠재력, 행위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이 구체적이고 인식 가능한 형태로 전환되는 과정이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음식을 주고 그 답례로 조개장식을 받는다면 조개의 형태로 그에게 돌아온 것은 그가 준 음식의 가치가 아니라 그것을 준 자신 행위의 가치다. 여기에서 음식은 단지 그 행위의 매개체일뿐이다. 그러므로 가치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행위가 지닌 중요성이나 의미를 스스로에게 재현하고 표현하는 수단이라 할 수 있다.”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120쪽



목걸이나 팔찌를 내가 받은 것은 등가, 음식물의 가치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고 하는 표현물이다. 우리가 자기의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한다. 우리가 어떤 그림을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표현하고 싶어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사회적 관계를 유지시키는 하나의 상징물이다. 그 물건이 사용가치가 있다면, 그것 뿐 아니라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준다는 것이다. 모계 사회에서는 자기가 만든 음식을 다 주고, 자기 집에는 다른 사람이 한 음식을 받아서 먹는다. 화폐를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도 그 안에서 무엇에 가치를 두고 행동하고 있는 가에 대한 표현물이다. 우리가 사회적 관계를 맺는데 매개물이 있어야 한다. 여러 사람이 사는데, 우리가 여러 사람이 관계를 맺기 위해서 최소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게 언어이다. 우리가 흔히 사회라거나 공동체라거나 부르려면 뭔가를 주고받는 게 있어야 한다.



교환이라는 흐름 속에서는 어떤 밀도를 가진 하나의 구성체가 있다. 사회의 새로운 상상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주의 사회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그것이 보다 큰 가치로 통용되는 사회가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134쪽 비판적 실재론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셨습니다. 가치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어떤 사회의 창조적인 능력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실천 능력, 행위 능력, 무언가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힘. 이 힘은 어떤 형식이 있다. 힘을 가지고 때린다거나, 이것을 할 수 있는 형식을 만든다. 이 형식은 전근대 사회에서는 의례의 형태로 나온다. 포틀래치의 의례를 만든다거나. 이런 형식을 통해 모두가 볼 수 있는 것을 통해서 그것이 나에게 의미가 있다는 것을 다시 재현시키는 것이다. 그것 자체가 가치를 표현하는 행위이다. 그런 것을 통해서 우리는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것의 의미는 뭐냐면 사회가 그것 없이도 객관적으로 늘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그런 행위를 함으로써 하나의 사회로.. 사회에 관한 객관적인 실재론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149쪽, 역동적 구조들



구조 자체의 역동성. 구조가 있고, 개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조 자체가 개인들이 어떻게 상호 연동되는 거다. 역동적 구조를 배치라고 이해하면 된다. 다른 종류의 사회가 형성되는 것이다. 151쪽 두 번째 단락. “우리가 구조라고 부르는 것이 행위에 선행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구조란 그것이 구성되는 과정 자체에 다름 아니다. 복잡한 추상적 체계들은 단지 행위자 자신이 세계와 맺는 상호작용의 논리를 이해하는 방식일 뿐이다.”



우리가 행위를 하더라도, 행위 또한 물신이 될 수 있다. 처음에는 편리하자고 화폐를 만들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신의 위치에 가게 된 것이다. 그레이버는 어떤 구체적인 물건만 물신화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는 아편이 물신. 우리가 계속해서 가치를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실제로 그 행위로 가치가 행위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으로 돌이켜보자고 했는데, 행위도 물신화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서 원래는 가치의 포현물들이 하나의 쿨라가 되는 것이다. 그 목걸이나 팔찌는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의 표현물인데, 그것도 어느 순간 물신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구별하기 위해 교환과 순환을 지속적으로 구분하자는 것이 149쪽에 나온다. 그래서 이 가치는 형식을 통해서 순환된다.




개념어와 이론이 많이 담긴 책이라, 어렵게 읽고 있습니다. 그래도 책과 씨름하며, 강의를 통해 조금씩 배워가고 있는데요.  나는 과연 어떤 사회를 재구성할 수 있을까,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  것일까를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요즘입니다.  모두들 3학기도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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