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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학기 천개의 고원 2주차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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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곰 작성일18-10-29 17:40 조회2,7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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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이당 일요일 대중지성 / 4학기 / 천개의 고원 / 2주차 후기 / 고영주>

 

n-1 하라!

 

천개의 고원 2주차부터는 서서히 개념들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지난 주 강의가 천개의 고원의 전체적인 핵심 내용과 들뢰즈 가타리가 사유하고 있는 욕망과 배치에 관한 것이었다면, 이번 주는 각 고원을 촘촘히 읽으며 사유해 나가는 것이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리좀이다. 정확이 말하자면, 리좀적 삶과 수목적 삶에 관한 것이다.

리좀적 삶이 따로 있고 수목형 삶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들뢰즈를 이분법적으로 독해하는 것은 올바른 독해방법이 아니다. 수목형 삶 안에서도 리좀점 삶이 생성 될 수 있고, 리좀적 삶이 머물고 고이면 수목형 삶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리좀은 뿌리이고 줄기이다. 들뢰즈가 이 개념어를 사용한 이유는 서양의 수목적 사고를 비판하기 위해서이다. 다만 뿌리라고 생각하지 말자! 엉켜있는 뿌리. 방향이 없는 뿌리. 이 이미지를 리좀이라고 한다.

나무든 뿌리든 우리 삶이든 항상 중심적 사유가 있다. 그것은 기원의 사유이고 초월의 사유이다. 리좀은 기본적인 사유의 이미지를 바꾸는 것이다. 예전에는 모든 것을 기원으로부터. 인간에게는 신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전형적인 수목형 사유였다. 모든 만물을 n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여기에 +1해서 사유한다. n-1이란 초월적 삶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만물로부터 1을 제거하는 사유가 바로 리좀적 사유이다. 어떻게 하면 중심을 벗어나는 사유를 할 수 있을까?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리좀적 삶이 좋다? 수목은 나쁘다? 이것은 절대 아니다. 리좀과 수목은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수목 안에서도 리좀이 생성 될 수 있고, 리좀적 생성에서도 수목적 사유가 환원될 수 있다.

언어학에서도 수목적 사고가 있다. 사전적 의미와 파생적 의미를 찾는 것이다. 리좀적 사유는 이 의미들을 거부한다. 단어는 사용자에 의해 그때 그때 생성되나. 의미 자체가 변이되는 것이다. 촘스키의 언어가 대표적이다. 문장에 있는 단어들을 해석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나눈다.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으로 가보자. 정신분석에서 대표적인 것은 무의식이다. 프로이트는 모든 기억들을 가족으로 환원한다. 모든 이미지를 전부 엄마와 아빠의 대리자로 환원한다. 환원적이고 중심적인 사유가 수목적 사유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지점을 비판한다. 수목적 사유라는 것은 주체적 사유이다. 사회에서의 정상은 나는 ~~이다. 이거야! 이건 아니야! 끊임없이 이분법 적으로 나누는 것이 수목적 사유다. 분열증 환자는 주체가 없다. 점이 없고 이분법이 없다. 분열증환자는 흐름으로서 욕망이 존재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의미의 논리 : 도대체 의미는 어디서 생기는 것일까. 의미는 어떤 사건과 더불어서 생겨난다. 하나의 언어가 사용되는 배치에서 벗어나 원래 언어가 가지고 있는 순수하고 하나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동일한 말을 쓰더라도 맥락이 다르기 때문에, 늬앙스가 다르기 때문이다. 절대적 1자를 제가하는 삶은 접속과 작용에서 하는 사유이다. 생명의 본질 자체가 변이이다. 리좀은 언제나 접속을 한다. 리좀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접속이다. 접속을 통해서 생성되는 것이다. 리좀은 여러 가지 여러 가지의 기호체계를 작동시킨다. 점이 아니라 선으로서 사유한다. 나는 이미 타자다. 접속 자체가 나를 생성해 주는 것이다. 접속을 통해서 특정한 방식으로 넘어간다. 해석가능성이 많아지는 것이다. 이것은 수와 양이 아니다. 들뢰즈 가타리는 수적인 것과 양적인 것을 벗어난다.

리좀이라는 것은 언제나 중간이다. 들뢰즈는 ~와의 철학자 and의 철학자라고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항을 버리고 늘 사이에 있는 것. 생성중인 것을 사유한다.

리좀은 점이 아니라 선들이다. 개념 : 영토화, 재영토화, 탈영토화. 코드화, 재코드화, 탈코드화. 영토성이라는 것은 신체적인 것이다. 코드는 언표적 차원이다. statement. 맥락과 방식이 함께 작용하고 있다. 모든 말은 발화 된 말이다. 구체적 상황 속에서 진술된 말이다. 그래서 언표적 차원이다. 신체적차원 + 언표적 차원. 영토라는 것은 어떤 영역이다. 익숙한 신체성을 구성하는 장을 영토라고 한다. 가족, 직장, 공동체. 나를 주체화 시킬 수 있는 곳. 물리적인 관계들이 익숙해진 곳. 영토 바깥에 있는 것을 탈영토라고 한다. 영토로부터 벗어난다. 낯선 곳의 리듬을 다시 받아들이면 그곳이 또 다시 영토화가 된다. 영토속에서는 일정한 코드가 작동한다. 암호가 작동한다. 코드를 보고 해석하는 것을 탈코드화이다. 코드를 해석한다는 것은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들뢰즈 가타리가 이해하는 것은 끊임없는 탈영토화 탈코드화 과정. 도주. 어떤 영토에 균열을 내고 달아나는 것이다. 어떤 실험을 해보는 것이다. 관계와 사고에 대한 실험. 도주할 때 어떤 배치에 있는가. 어떤 것을 향해서 문을 열었는가. 어떤 생각도 도금화화 하지 않는다. 탈영토화를 하더라도 나쁜 재영토화가 있을 수 있다. 어떻게 탈영토화를 할 것인가.

리좀은 짧은 기억이다. 일종의 단기기억이다. 니체에게는 장기적 습관과 단기적 습관이 있다. 니체는 장기적 습관을 거부한다. 아주 오랜 시간 굳어져 버린 것이다. 고질병이라는 것! 굳어진 습관을 병이라고 한다. 모든 굳어진 습관이란 그 자체가 병이다. 단기적 습관을 사랑한다. 짧은 기억. 완전히 다른 리듬을 해야 한다. 리좀적 독해란, 아무거나 읽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적극적으로 독해하는 것이다. 시대를 읽어야 한다.

이제 도덕의 지질학으로 가보자. 기원전 1만년이라는 것은 대략 현세를 가리킨다. 최종 빙하기 말기라고도 하는 이 시대부터 인간의 삶, 인간적 삶이 시작되는 시기이다. 니체도 마찬가지지만 인간중심적인 삶이 얼마나 하찮은가! 도덕의 지질학에서는 이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것이 도덕이다. 하지만 인간이 사라져도 지구는 한치의 슬픔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 어떻게 하면 인간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지구의 차원에서 고민할 수 있을까. 리좀적 독해란, 아무거나 읽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적극적으로 독해하는 것이다. 시대를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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