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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 4조 2학기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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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순덕 작성일19-06-29 21:09 조회1,28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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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는 나의 힘

 

니체 하면 철학자가 떠오르고 철학자 하면 니체가 떠오른다. 그만큼 그는 나의 뇌리에 철학자로서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철학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극히 단편적인 것 몇 개뿐이라는 사실을 또한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대학교 시절 그의 대표적인 책 중 하나인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어 보려고 몇 번 시도하였다가 결국 몇 장 읽지 못하고 접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나이가 들어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이라는 제목만으로도 어렵게 느껴지는 책을 접하면서 그때 대학교 시절 가졌던 것과 똑같은 의문이 떠오른다. 니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사람을 가린다. 사람에 대해 호불호가 분명해서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지 못한다. 원만하지 않은 나의 성격 때문이다. 그래서 손해 보는 것도 많다. 당연히 이 손해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런 손해가 나의 성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반면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럽고 친절하다. 저절로 마음이 열리고 그들에게 집중하고 대화에 생기가 돌고, 심지어 그들을 전폭적으로 도와주는 것에도 야속하지 않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보다 싫어하는 사람이 늘 더 많다는 게 문제다. 그래서 대부분 타인에 대한 나의 반응은 시니컬하고 관계도 불편하다.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매번 사람을 가리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내가 더 잘난 것도 아니고, 뚜렷한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게다가 좋고 싫음의 이유가 제각각이어서 일관성도 없다. 어의가 없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기사적, 귀족적 가치 판단이 전제하는 것은 강한 체력, 원기 왕성하고 풍요로우며 주체 할 수 없이 넘치는 건강, 건강해야 할 수 있는 모든 것, 즉 전쟁, 모험, 사냥, 춤, 시합, 그리고 활기차고 거침없으며 쾌활한 행동이라 할 수 있는 모든 일이다(38쪽)

 솔직히 교사 생활을 하다 보면 아이들이 다 사랑스러운 것은 아니다. 보통 교사는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아이들을 좋아하지만 난 주로 공부 못하는 아이들과 친했다. 속칭 ‘노는 아이들’이다. 그 아이들은 수업 내용에 대한 질문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 대신 말도 안 되는 엉뚱한 질문을 하고, 표현도 기상천외하지만 개콘보다 더 기발하고 유머러스하다. 때론 총기까지 보인다. 그리고 수학여행을 가면 이 아이들이 무대를 휘젓고 다닌다. 난 이렇게 날 것 같은 행동과 말과 몸짓에 끌린다. 나와 정반대인 쾌활한 아이들을 좋아하는 것이다

 

사제적 귀족계급에는, 그리고 그들을 지배하는 습관, 즉 행동을 기피하고 부분적으로는 심사숙고하고 부분적으로는 감정을 폭발하는 습관에는 처음부터 무언가 건강하지 못한 점이 있다(36쪽)

능동적인 인간인 그들은 행복이 행위와 분리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활동적인 것이 필연적으로 행복의 일부였다(45쪽)

 나의 둘째 언니는 착하기도 하지만 부지런하고 음식도 잘한다. 집안에 온갖 일은 언니가 해낸다. 덕분에 늘 맛있는 음식으로 식탁이 풍성하고 집안도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베풀기를 좋아해 음식을 해서 나누며 즐거워한다. 당연히 모든 사람이 언니를 좋아하고 나에게도 언니는 누구보다도 각별하다. 또 한사람은 우리 엄마이다. 엄마는 누었다하면 바로 잠을 주무신다. 이렇듯 엄마와 언니는 한시도 쉬지 않고 몸을 움직여 일하신다. 당연히 그들의 노동 덕분에 나머지 가족은 편안할 수 있었다. 또 그들은 순박하고 착하다. 그것은 ‘무력감에서 오는 선함’(57쪽) 이 아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하는 희생과 헌신으로, 즉 ‘하나의 시련’(57쪽)으로서의 노동으로만 여기지 않았다. 나와 다르게 기꺼이 몸을 움직여 베푸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게으르고, 공부를 더 많이 한 그 어떤 가족보다도 충만해 보인다. 그래서  관념적이고 게을러서 무엇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와 정반대인 언니와 엄마를 좋아한다. 그 밖에 나는 주위에 있는 성실한 모든 사람, 직접 알지는 못하지만 치열하게 생활하는 tv달인에 나오는 사람들에게도 경외심을 느낀다. 이들처럼 열심히 사는 모든 사람에게 깊은 애정을 느끼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이야말로 그들이 진심으로 위대해 보인다. 생각만 무성한 나와 다른 이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자신의 적, 자신의 재난, 자신의 악행조차 오랫동안 진지하게 생각할 수 없다는 것(46쪽)

그는 자신에게 가해진 모욕과 비열한 행위를 기억하지 못했고, 그냥 잊어버렸기에 용서할 수도 없었다(47쪽)

 친구 중에 내가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 초등학교 친구인데 그 친구는 고등학교도 변변한 학교를 나오지 못했다. 결혼생활도 순탄치 못해서 아이들이 어릴 때 이혼을 했다. 지금은 이혼이 능력처럼 보이기까지 하지만 우리 나이에 2살, 5살 아이를 남편이 맡기로 하고 이혼하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게다가 남편이 절대 아이들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가혹한 이혼이었다. 그래서 난 종종 친구의 낯빛을 살펴보곤 했다. 그런데 그늘이 없다. 오히려 인자한 시어머니하고 책임감 있는 남편이 잘 키워줄 거라 하면서 자신의 삶에 집중했다. 그는 애정이 없는 결혼을 지속하지 않았다. 지금도 자기가 제일 잘한 게 이혼이었다고 한다. 이혼한지 30년이 되도록 그동안 모진 풍파를 겪었지만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이혼으로 생기는 힘듦이나 원망을 ‘자신의 몸속으로 파고드는 벌레를 단번에 털어 버리듯’(47쪽) 하였다. 또 친구의 성격을 잘 말해주는 것으로 얼굴 성형의 경우만을 봐도 알 수 있다. 쌍꺼플 정도가 아니고 얼굴을 돌려 깎기 할 정도로 하는 엄청난 수술이었다. 사실 나도 한번 보톡스를 맞아본 적이 있었는데 나 자신에게 여간 창피한 게 아니었다(물론 지금은 보톡스가 일반화되었지만). 예뻐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보톡스를 맡았다고 말하기엔 창피하고 안 맞은 척하자니 찝찝했다. 보톡스만으로도 나는 이토록 복잡하고 많은 번뇌가 일어나는데 친구는 그렇지 않았다. 주위의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다. 점점 처지고 주름지는 얼굴이 싫고 기분도 우울해 성형한다고 당당히 밝히고 결과에 만족해했다. 나이 들어 늙어가는 자신의 얼굴에 요술 같은 의술과 문명의 이기가 얼마나 신기하냐고 감탄을 했다. 이처럼 친구는 매사에 자신의 욕망에 항상 솔직했다. 타인의 시선이나 습속에 휘둘리지 않았다.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보고 그 욕망에 의한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며 욕망과 선택의 간극이 없는 친구를 난 늘 좋아했다. 그 외에도 내가 사람을 좋아할 때 다양한 이유가 있다. 동창 모임에서 질펀한 농담으로 웃음을 주는 친구, 성실하게 수업 준비하는 동료 교사, 늘 타인을 배려하는 남편, 심지어 언제나 따뜻함이 넘치는 조카 등 일일이 나열할 수가 없다. 그들은‘활기’가 있으며, ‘무력한 자들’(38쪽)이 아니다. ‘고통받는 불행한자’(39쪽)의 우울감이나 불평이 없다. 생각만 하는 자들이 아니고 ‘행위에 의한 실제적 반응’(42쪽)으로 주변 사람에게 유익함을 주는 사람들이다. ‘자기 자신을 긍정’(43쪽)하는 에너지가 느껴지고, 툭하면 타인을 미워하거나 탓하는 ‘원한감정’(43쪽)같은 찌질함이 보이지 않는다. 다양한 형태로 자신의 삶에 오롯이 집중하며 충만할 뿐이다. 그들은 니체가 말하는 ‘고귀한’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싫어한 사람들에게서 길을 찾다.

 

 반면에 내가 지독히도 싫어하는 사람들은 반대 벡터에 있는 사람들이다.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제와 같이 생각만 많은 사람, 무언가 유익한 행동을 할 수 없는 무력한 사람, 자신의 무력감을 합리화하는 사람, 늘 주변을 흘낏거리는 사람, 자존감이 낮은 사람, 자신을 긍정할 수 없는 사람 등이다. 이들의 우울함, 비열함과 무력감과 원한 감정은 수시로 느껴져 싫었다. 그런 느낌은 이들에게 나의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나의 부끄러운 부분이 투사되어 지독히도 그들이 싫었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에서 말하는 고귀한 자들과 사제와 같은 무력한자들이 내가 사람을 가리는 기준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어찌 나만 그 기준들을 적용하겠는가? 그 기준에 의하면 나는 여지없이 고귀한 자가 아니어서 씁쓸하다. 그런 줄은 알고는 있었지만, 니체의 날카로운 시선에 의해 적나라하게 약자임이 드러나니 유쾌하지는 않다. 그런데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을 읽으면서 명확히 강자와 약자를 알게 된 것 말고도 뜻밖에 다른 소득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싫어했던 사람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은 나의 변화이다. 동병상련의 감정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달콤한 포도가 높이 매달려 있어 따 먹을 수 없는 여우가 ‘저 포도는 시다’라고 포기하는 이솝우화가 약자의 모습과 오버랩 되면서이다. 여우의 시선 바뀜이 웃음이 나지만 그렇다고 꼭 비열해 보이지만은 않다. 어차피 높이 달린 포도를 따먹을 수 없는 여우로서는 그렇게라도 생각해서 자신을 달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자기기만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삶의 지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늘 타인에게 곁눈질할 수밖에 없고 수시로 타인과 비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심리이고 운명이다. 이런 심리는 원시 수렵 시절부터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자연히 생겨난 본능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다. 더구나 이기적 유전자를 갖고 있는 인간은 다양한 고통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누가 고귀한 자의 태도를 끝까지 완벽하게 견지할 수 있겠는가. 물론 ‘초인’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그 예외적인 사람들은 거론하지 않기로 하자. 행위 할 수 없는 무력감 앞에서, 좀처럼 활기가 나지 않는 상황에서, ‘행동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자극이 필요’(43쪽) 할 수밖에 없을 때, 자기 자신을 바로 볼 자신이 없을 때, 비록 자신이 객관적으로는 형편없지만, 자신이 선하고, 고통을 받고 있기에 축복이 있을 것이라며, 포도를 따 먹을 수 없는 여우와 같이 가치를 전도함으로써 자신을 위로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위로 덕분에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내는 자기기만의 또 다른 이면이 보인다. 그래서 약자의 애환을 통감하면서 특별히 싫어할 이유도 없다는 깨달음이 온다. 그리고 나 또한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사람들과 같은 약자의 삶을 사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채는 것만으로도 인간관계에서의 또 다른 해법을 찾은 것 같다. 이 해법은 고귀한 삶으로의 자양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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