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기 글쓰기 2차시 후기 > 일요 감이당 대중지성

일요 감이당 대중지성

홈 > Tg스쿨 > 일요 감이당 대중지성

서브배너_일성.png

4학기 글쓰기 2차시 후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첫마음 작성일19-10-23 09:23 조회1,684회 댓글2건

본문

손수 밥짓는 연암과 글쓰기

   (2019 감이당 일성 4학기 글쓰기 2차시 강의 후기)

  4학기 글쓰기(2차시)는 곰샘의 강의였다. 강의 중 크게 와 닿은 부분을 정리하고 삶과 글에 대해 이해한 바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조선시대 영조, 정조 시기에 살았던 연암은 노론 가문의 로열 패밀리였고,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지만 과거(대과) 급제도 하지 않았고 출사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은둔 생활을 한 것도 아니었다. 성리학자들은 모름지기 세상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지식인의 역할이었다.


   연암 역시 활발하게 사회에 참여하는데 일반적인 양반들이 관직을 통해 참여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을 찾았다. 과거를 봐야 한다는 당위는 그에게 우울증을 앓게 했고 그는 자신만의 길을 찾는다. , 자신이 즐거운 일을 하면서 의미, 즉 비전을 찾는 일에 가치를 두었다. 그리하여 젊은 시절부터 여행하고, 글쓰기 하고, 친구들과 교류하는 시간을 통해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가는 삶을 살았다.


   곰샘의 강의를 들으며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연암의 여성관이었다. 연암의 탁월한 점은 당시 남녀 차별이 아주 일반화되어 있는 사회였음에도 여성과 깊이 공감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뛰어난 공감력은 형수님, 누나, 아내에 대한 묘비명이나 추도시를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연암은 부인과의 정()이 상당히 깊었는데 이는 그가 처가와 맺은 관계를 보면 알 수 있다. 장인, 처숙은 최고의 스승이었고 처남은 가장 친한 벗이자 평생지기였다. 부인과 돈독했던 연암은 동갑내기 부인과 50세에 사별했으나 그 후 재혼도 하지 않았고, 첩도 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매우 안타깝게도 사라졌지만 부인에 대한 추도시도 20편이나 쓴다. 지방관으로 나가서도 파티 도중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이면 자리에서 물러나 처소로 돌아갔다고 한다. 당연시 되던 기생과의 놀음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성을 지배해야 한다거나 소유해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고 여성을 도구화하지도 않았다. 이를 알 수 있는 것이 연암의 자립적인 생활 모습이다. 젊었을 때부터 스스로 밥을 챙겨 먹고, 박제가가 찾아 왔을 때는 솥에 밥을 지어 손수 대접하고, 지방관 시절에는 가족들에게 고추장을 담아 보내기도 하였다.  


   강의를 들으며 조선 시대의 가옥, 그리고 부엌에서 연암이 손수 밥을 짓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대단한 양반 신분의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는 것은 생각도 못하던 시기에 자신을 찾아온 박제가를 대접한다고 밥을 짓고, 밥과 찬을 챙겨 밥상에 얹어 부엌에서 들고 나오는 모습이라니. 더구나 박제가는 서얼 출신이 아니던가? 그리고 고추장까지 담그는 모습은 가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생활의 어마어마한 파격, 이런 삶에서 당시의 틀에 박힌 묘비명과 완전히 다른 독특한 묘비명이 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당시 양반 남성이 일상을 스스로 꾸려나간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었을까? 강의를 듣는 중 손수 밥을 차려 먹었다는 대목에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곰샘은 한문으로 쓴 최고의 문장이 연암의 글이라고 하셨다. 담백하면서도 유머스러한 글이며 세상을 달관한 듯 하지만 외면하거나 건너뛰지도 않았다고 말이다. 곰샘은 격정적 파토스나 경이로운 글은 스토리를 잘 구성하면 쓸 수 있지만 담백한 글은 내공이 어마어마해야 쓸 수 있다고 하셨다. 연암의 내공은 당시의 견고한 삶을 틀의 아주 세세한 부분에서까지 깨고 나오는 데서 가능했던 것 같다


   내가 글을 못쓰고 두려워하며, 틀에 박힌 글만 쓰는 이유는 타자와의 공감능력이 부족한 내 생활 탓인가 보다. 사회가 정해준 길만 충실하게 걷고자 하고, 그 길 외에는 다른 길로 가는 것이 두렵다. 곰샘은 자기가 하는 일과 정신적인 성찰은 같이 가는 것이라고 하셨다. 정신적 성찰은 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는 일 속에서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럼 나에게 물어야 한다. 내가 지금의 견고한 삶의 틀을 깰 의사가 있는가? 용기가 없어 주저주저하고 있다. 지금의 삶의 틀이 충만감을 주는가? 이것도 아니다. 이런 머뭇거림을 언제쯤 멈출 수 있을까?


댓글목록

페터슨님의 댓글

페터슨 작성일

선생님의 후기를 읽다가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가 생각났어요. 삶과 예술이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노예쑬가에 대한 다큐였어요. 삶과 예술, 글이 일치 할 수 있을까요? 손수 밥을 짓고 생활에 신경쓰다보면, '최고의 글'을 만들어낼 시간이 없을 것같은데. 그게 가능할 수도 있을까요? 박지원의 삶은 그게 가능하다고 말해주고 있기 때문에 더 뜻깊다고 생각해요.

猫冊님의 댓글

猫冊 작성일

저도 요즘 공감에 대해 생각합니다!
<지금, 조선의 시를 쓰라>를 읽으면서 담담하고도 통찰이 깃든 글귀들에 마음이 ...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