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딸의 사모곡 > 일요 감이당 대중지성

일요 감이당 대중지성

홈 > Tg스쿨 > 일요 감이당 대중지성

서브배너_일성.png

막내딸의 사모곡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순덕 작성일19-12-07 22:17 조회2,805회 댓글0건

본문

일성 4학기 4조 김순덕 

                              막내딸의 사모곡

40년 만에 만난 고향 친구 영희는 내게 대뜸 “엄마가 살아 계시냐?”라고 물었다.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다”라고 하자 내 손을 꼭 잡고 아주아주 옛날 우리가 어려서 세상일이라고는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의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주었다. 영희는 지독한 가난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하루는 어른들을 대신해서 처음으로 장에 채소를 팔러 나갔으나 채소를 파는 방법을 몰라 막막하기도 하고 아는 사람이라도 마주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한쪽 켠에 우두커니 서서 어쩔 줄 모른 채 얼굴만 붉히고 서 있었다고 한다. 그때 근처에서 좌판을 펴 놓고 있던 우리 엄마가 영희를 먼저 알아보시고 ‘채소 팔러 나왔냐’고 물으시더니 영희가 가져  나온 채소를 자기 앞에 옮겨 놓고 팔아서 영희 손에 돈을 꼬옥 쥐여주셨다고 한다.
  엄마가 돌아가시던 날 나는 엄마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친척들이 많은 것을 보고 적지 않게 놀랐다. 원래 고향이 멀기도 하고 친척들도 우리 집만큼이나 형편이 어려운 분들이 많아서 집안이 서로 왕래가 많지 않은 편이었다. 그런데 엄마의 장례식에는 가까운 친척들뿐만 아니라 한 번도 보지 못한 많은 친척 분들이 남쪽 끝에서 초라한 행색으로 서울까지 올라오셔서 엄마의 영정 앞에 주저앉아 서럽게 통곡했다. 게다가 온갖 집안일을 엄마에게 내맡긴 채 평생 한량으로 사셨던 아버지를 대신해 자식들을 혼자 도맡아 키워야만 했던 순박한 엄마에게, 모진 시집살이를 시켰던 작은아버지와 고모들도 목 놓아 우셨다. 흡사 예수를 배반한 베드로의 참회의 눈물 같았다. 
  내게 비친 엄마는 늘 할머니 모습이었다. 내가 식구가 많은 집의 막내딸이기도 하였고, 엄마는 연약한 몸에 평생 힘든 노동과 고된 삶에 시달렸기 때문에 나이에 비해 얼굴에 주름이 많은 데다 잇몸도 약해 입 주위가 홀쭉하여 언제 보아도 안쓰럽기만 한 할머니였다. 초등학교 시절 엄마가 학교에 오신 적이 있다(지금의 나는 어리바리 하지만 그때는 제법 영특해서 반장을 했다^^). 엄마는 몸 배 바지를 입고 오셨는데 영락없이 들에서 일하시다 오신 차림이셨다. 창피해서 외면하고 싶었다.(실제로 내 친구는 촌스러운 차림으로 학교에 오신 엄마를 보고 도망쳤다가 집에 가서 엄청 두들겨 맞았다고 한다^^) 엄마의 초라한 모습은 어린 시절부터 상견례를 하는 순간까지도 나에겐 여간 괴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엄마는 이렇게 평생 누추하셨지만 좀처럼 남에게 화를 내거나 다른 사람을 질책하지 않을 뿐 아니라, 웬만한 일에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싫다 좋다 등 희로애락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고 고단하고 힘든 삶에도 원망과 한탄을 하는 걸 거의 보지 못했다. 단지 아버지에 대해서만은 꾹꾹 눌러둔 감정을 삭이지 못한 듯 한 번씩 마치 딴 사람이 된 것처럼 야박한 표정과 볼멘소리를 하기도 하였지만 내가 볼 때는 그것도 아버지가 엄마에 대해 한 것에 비해서는 턱없이 부족하기만 하였다. 나는 유독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외모도 닮았지만(아버지는 대단한 미남이셨다^^) 특히 아버지의 한량 기질을 닮았다^^. 그래서 지금도 게으르고, 놀고먹는 것을 지향하는 편이다. 가난했지만 학창시절 양말 하나도 내 손으로 빨아 본 적이 없이 공주처럼 자라기까지 했다. 그래서 결혼과 시작된 가사노동은 혹독한 시련이었고 아직도 어설프다. 이렇게 된 데에는 ‘일을 안 해야 시집가서도 안 한다‘라는 엄마의 기복 신앙과도 같은 바람이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한량기에는 부아가 치밀어 오를지언정 자식의 게으름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무지하기도 하지만 자식의 팔자가 좋기를 바라는 원초적인 엄마의 이중적 잣대가 눈물겹다. 더구나 나를 볼 때는 항상 웃는 얼굴이셨기 때문에(그래서인지 나는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근자감 같은 게 있다^^) 나는 엄마가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살고 계시는지 헤아려 보거나 엄마의 아픔을 심각하게 고민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도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하고 시집살이를 해 보고 자식을 낳아 키워보니 비로소 엄마의 삶이 얼마나 힘든 것이었고 그 고생이 얼마나 무지막지한 것이었는지 새삼 알게 되었다. 늦게 철이 들었다고나 할까. 나는 조금씩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었다. 무엇이 먹고 싶은지, 어떤 소식을 전하면 엄마가 기뻐할지, 목욕을 하고 싶은 건 아닌지, 등등. 하루는 엄마가 제일 좋아하시던 가요 무대를 보다가 지나가는 말로 내게 물으셨다. ‘나훈아는 왜 요즘 텔레비전에 왜 안나오냐?’ 나는 우리 엄마가 ‘나훈아’의 팬이라는 사실에 속으로 웃음이 났다(엄마도 은근 나훈아의 섹시함을 간파한 것이다^^). 엄마의 삶에도 대중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고 아무런 욕구도 없으신 할머니마저 녹여버리는 나훈아의 매력이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딱 한 번 수줍게 물어보신 엄마의 마음을 읽고 나는 힐튼호텔에서 열리는 ‘나훈아’디너쇼 표 2장을 예약하고 엄마와 같이 공연을 보러 가게 되었다. 공연 내내 엄마는 어린아이들이 소풍을 갈 때처럼 연신 싱글벙글하시면서 즐거워하셨다. 우리 엄마에게도 저런 모습이 있다는 것을 보면서 공연 내내 나도 같이 마냥 웃을 수 있었다. 
  내가 엄마를 보살펴 드리고 조금이나마 위로를 해 드릴 수 있을 때쯤 엄마는 저세상으로 가셨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상실의 의미를 온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셨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것은 사뭇 다른 것이었다. 연암 박지원은 상을 당한 지인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내면서 부모가 돌아가신 심경을 ‘천지가 텅 빈 것 같다’고 하였다. 내가 느낀 것도 그와 비슷하였다. 상실의 슬픔은 아직도 여전하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작아지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나는 평소 말수가 적은 편이지만 엄마에게는 온갖 이야기들을 조잘대기 일쑤였다. 대화의 소재는 일상에서부터 대통령 선거와 같은 정치 문제까지 끝이 없었다.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천진난만하게 웃으시던 엄마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하루 종일 집안을 쓸고 닦는 것을 종교 의식을 치르듯 하고 나서, 밤이 되면 소녀처럼 곤히 잠든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나도 엄마가 되어 애들한테 시달린다고 푸념할 때 나의 정수리를 쓰다듬어 주던 엄마의 손길이 느껴진다. 엄마는 항상 우리에게 본인이 가진 모든 것을 베풀어 주셨다. 비록 물질적으로 가지신 것은 없었지만 우리 형제자매와 손주들, 친척들이 드나들며 소식을 전하고, 김장을 하고, 차례를 지내는 등 집안의 대소사에서 중심축이셨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나는 다시 말수가 줄었고, 가족과 친척들은 예전처럼 잘 모이지 않는다. 번잡한 김장은 안 하기로 했다. 일상의 모든 것이 엄마가 계실 때보다 단조로워지고 해야 할 일이 줄었지만 흥이 나질 않는다. 문득문득 평생 엄마가 겪으신 노동의 강도는 끔찍한 것이어서 마음이 아프고, 그렇게 힘든 데도 원망하지 않는 성품은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제는 철이 많이 들어 엄마의 초라한 모습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고, 엄마와 지내는 것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없이 소중하다는 것도 알고, 나훈아 디너쇼도 매년 보실 수 있을 만큼 고생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엄마는 더 이상 이곳에 계시지 않는다. 이 어긋남이 애통하고 천지가 텅 빈 것만 같은데 어찌 죽음과 삶이 하나라는 말이 위로가 되겠는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