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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 대중지성 4주차 1교시(전습록)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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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별성 작성일20-03-31 19:05 조회1,7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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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수업은 3주차 때보다 더 자세하고 깊게 양명학과 전습록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사실 ‘사서(대학, 논어, 맹자, 중용)’만 알았지, 전습록이라는 책이 존재하는지도 몰랐었는데, 이번 공부를 통해서 양명이 어떤 배움을 강조했는지, 그게 주자학과는 어떻게 다른지, 이 시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지 찬찬히 생각해볼 수 있어서 무척 좋았습니다. ^^

  주자학과 양명학은 팔조목 중 하나인 ‘격물(格物)’에서 차이가 납니다. ‘큰 배움(大學)’을 실천하는 8개 항목 중 하나일 뿐이니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유학 전체의 근간이 되는 부분이라 아주아주 중요하다고 해요. 주자의 ‘격물’은 이렇습니다. ‘물은 이치를 갖고 있고, 격한다는 건 그 이치에 이르려고, 도달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때의 물은 사물입니다. 사물은 저마다 자신만의 이치를 갖고 있죠. 주자는 인간이 이성적 능력을 가지고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는 것, 궁리하는 것을 ‘격물’로 본 거죠. 듣고 보니 누군가와 대화할 때 ‘상식적으로’, ‘객관적으로’, ‘정상이라면’이라는 말을 할 때는, 어떤 상황에서 정해진 이치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게 아닐까요?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하는 건 주자의 논리와 굉장히 맞닿아있네요.

  그러다보니 주자의 논리는 현대인인 우리가 들어도 굉장히 매끄럽습니다. 하지만, 그 논리대로 행해서 성인이 된 사람은 한명도 없다고 합니다. 유학자들은 주자식의 ‘성인지도(聖人之道)’를 수행목표로 삼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지만, 결국은 과거시험을 패스하고 관료가 되어 살아가는 거죠. 이 문제의식이 어린 양명에게도 있었던 걸까요? 12살일 때 양명은 과외선생님께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에 대해 묻습니다. 그리고 ‘관료가 되어 위로는 황제폐하를 잘 보필하고 아래로는 민들을 잘 보살펴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에 의문을 제기하죠. ‘성인이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거 아니에요?’라고. 하지만 성인이 되려고 했던 모든 이들이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었고, 양명도 예외가 아니었어요. 대나무를 ‘격물’해보려고 하다 건강만 나빠졌죠. 현실과 타협해서 관료의 길을 걷는 것도 순탄치 않았습니다. 3년마다 열리는 회시에서 2번 떨어져서 9년이 지난 후에야 합격하지만, 35세 때는 환관 유근의 눈 밖에 나서 먼 외지인 서쪽 변방의 귀주성 용장에 ‘역승’으로 좌천되고 맙니다. 이때부터는 무엇보다 살아가는 문제가 중요해집니다. 환관 유근이 보낸 자객들이 언제 들이닥쳐 죽이려고 할지 모르고, 처음 와본 그곳은 듣도 보도 못한 독충과 독초로 가득한 곳이었으니까요.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는 말도 안통하구요. 첩첩산중이죠.

  그러던 중 양명은 알게 됩니다. ‘이치란 게 마음을 떠나 따로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난 이제까지 밖에서만 이치를 찾으려고 했구나!’ 마음이 곧 이치라는 ‘심즉리(心卽理)’를 깨달은 거죠. 주자는 ‘물’을 ‘사물’로 봤지만, 양명은 ‘사건’으로 봅니다. ‘물’ 홀로 있는 게 아니라 일, 사건, 관계로 존재한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가닿은 것만 ‘물’이고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마음이 닿지 않아도 주변에 존재하는 것들은 ‘물’이 아니면 뭘까요? 내가 보지 않더라도 과거 어느 순간부터 존재해 왔을 텐데요. 양명은 그런 것들은 적막한 곳으로 돌아갔다(귀적(歸寂))고 말합니다. 이 표현이 참 생소하면서도 좋았는데요, 적막한 곳에서 표면 위로 올라오기 전까지는 그것들은 ‘물’이 아닌 거죠. 표면 위로 드러나서 사건으로 마주해야 그것이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는 거죠.

  그래서 양명의 ‘격물’은 ‘물은 마음이 가닿은 사건이고, 격한다는 건 마음의 바름을 얻는 것’으로 얘기합니다. 내 마음이 닿는 곳에서 바름을 얻으면, 그게 바로 이치라는 거죠. 그래서 지와 행을 하나로 봅니다. (이것이 지와 행을 따로 보는 ‘지행일치’를 주장하는 주자와 또 크게 달라지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바름은 누구나 갖고 있다고 봅니다. 공자건 맹자건 우리건 다르지 않은 거죠. 누구나 갖고 태어나는 것, 그게 삼강령에 나온 명덕(明德)이고, 양지(良知)입니다. 그 양지를 실천하는 게 양명의 핵심사상입니다. ‘치양지(致良知)’라고 합니다. 각자 가지고 태어난 기질이나 처한 환경 등으로 밝히지 못하고 있는 명덕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양지가 잘 발현될 수 있도록 매순간 노력해야 한다는 거죠. 주자가 말하는 것처럼 사물의 이치를 하나씩 궁리하는 게 아니라, 내 양지가 잘 나올 수 있도록 욕심, 어리석음 등의 ‘사사로움’을 없애야한다고 얘기합니다.

  양명의 깨달음은 전도유망하고 의기양양했던 천재 유년시절을 지나 여러 좌절을 겪었던 양명이었기에, 삶을 떠나 이치를 탐구한 게 아니라 그 삶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마다 끊임없이 배움을 얻고자 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어요. 삶과 배움이, 삶과 앎이 따로 있지 않다는 걸 다시 한번 느끼네요.

  문성환선생님께서 마지막에 해주신 얘기도 기억에 남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양지를 실천해도 다른 사람이 지키지 못하면 손해 본다고 생각한다고요. 저도 그런 생각을 수도 없이 했던 것 같아요. 괜히 억울해지기도 하고 혼자 지켜서 뭐하나 싶기도 하고. 그런데 우리가 양지를 발현하는 건 우리를 이롭게 하기 위함이지,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함은 아니었던 걸 생각하면, 남들의 행동에 좌지우지될 필요는 없겠죠.

    2시간의 짧은 강의였지만, 어마어마한 걸 얻은 느낌입니다. 지금 이 때 ‘전습록’이라는 책을 만나 공부할 수 있는 것도 큰 행복이네요. 다음주부터는 글쓰기를 통해 더 깊이 ‘전습록’과 만날 텐데요, 저마다의 배움이 무엇일지 벌써 궁금하네요!!

이상 일요대중지성 4주차 1교시 후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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