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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해석학> 4월5일 강의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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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유만만 작성일21-04-06 09:08 조회1,697회 댓글0건

본문

1982317~ 1982324

 

317일 전반부

피타고라스주의에서 정숙 규칙이 갖는 의미에 대한 부가 설명

금욕실천론'의 정의

그리스 자기 수련에 대한 역사 인종학의 결산

<알키비아데스>의 환기: 심성의 거울인 자기 인식으로 자기 수련의 후퇴

1,2세기의 자기 수련: (자기 인식의 원칙과 신성한 것 내에서 인정의 원칙과 관련한)이중적 분리

헬레니즘·로마 자기 수련의 기독교적 운명: 그노시스의 거부

인생의 작품

실존의 기술, 두 영역의 설명: 사유를 통한 훈련, 실제적인 상황에서의 훈련

단식의 실천: 플라톤에 있어서의 건장한 신체와 무소니우스 루푸스에 있어서의 인내력 있는 신체

시험의 실천과 그 특성들

317일 후반부

시련으로서의 생

세네카의 <신의 섭리에 관하여>: 존재의 시련과 그 식별적 기능

에픽테토스와 철학자

척후병

질병의 변모: 고대 스토아주의에서 에픽테토스로

그리스 비극에서의 시련

헬레니즘 시대 실존의 준비에 대한 무관심으로부터 불멸과 구원에 대한 기독교 교의에 대한 주목

생활의 기술과 자기 배려: 관계의 역전

이 역전의 징후: 그리스 소설에서 순결의 테마

324일 전반부

플라톤의 <일키비아데스>1,2세기 철학 텍스트에서 자기에 의한 자기 파악: 비교연구

서구 성찰성의 주요 세 형식: 상기, 명상, 방법

현대 서구 철학사 기술의 오류

명상의 두 계열: 진실 내용의 시험과 진실 주체의 시험

미래 투영의 그리스적인 실추: 기억의 우선성, 미래의 존재론적-윤리적 공허

준비로서의 병의 추측의 스토아주의적 수련

병의 추측 시험의 단계

미래의 폐쇄와 현실 축소로서의 질병의 추정

324일 후반부

죽음에 대한 명상: 수직적이고 회고적인 시선

세네카와 에픽테토스에 있어서의 의식 점검

철학적 금욕 실천

생명의 기술, 자기 시험, 세계의 객관화: 서구철학의 도전

 

'만만한 종'에서 '정찰병'되기

 

  채운선생님의 <주체의 해석학> 7강을 들었다. 강의는 8강으로 구성되었기에 마무리를 향하고 있다. 푸코의 강의를 풀어 쓴 <주체의 해석학>은 읽고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으나 선생님의 명쾌한 강의에 힘입어 공부하고 있다. 이번 7강은 책의 마지막 부분인 위의 표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스토아학파에서 신하에게 요구되는 진실말하기인 파헤레지아(parrhesia)는 외적 권위에 맞서 죽음을 무릎 쓰고 말하는 것으로 동양의 책선(責善)과 같은 의미라고 하였다. 동양에서는 부모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진실을 말할 수는 없지만 친구에게는 위험을 감내하더라도 진실을 말해야 한다. 친구는 마땅한 도리로 즉, 뜻이 맞아 만나 사이이기에 연연해하거나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상대에게 상처가 될 말은 하지 않는다. 내가 상처를 받는 것을 참을 수 없기에남들에게도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듣기 좋은 이야기만 주고받는 <‘좋아요의 문화>라고 하였다. 관계를 단련시키는 기술, 특히 내가 나 자신과 맺는 관계의 기술을 살펴보라고 권하였다.

 

① 친구는 마땅한 도리인 로 즉뜻이 맞아 만나 사이이다.

나에게는 뜻이 맞아 만난 친구는 없는 것 같다. 같은 공부를 하면서 또는 같은 일을 하면서 서로의 정보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관계만 유지해오면 되었다. 철저하게 ‘give & take 정신으로 내가 밥을 사면 2차는 상대가 사며, 둘 이상이 되면 머릿수로 나누어 계산을 하는 규칙을 정확히 지켰다. 우리들 사이에 도리는 공평한 계산외에는 나눈 것이 별로 없었다. 그렇다면 뜻이 맞았던 친구라기보다는 가까이 있었던 이웃정도였던 것 같다.

 

내가 상처를 받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코로나로 인한 집합금지가 시행되고 있다. 그래서 작년 추석 때 어머니는 동서네와 우리 모두 오지 말라고 하셨지만 어머니 혼자 차례 준비하시는 것이 마음에 걸려 나만 내려가서 어머니를 도왔다. 설이 되었다. 어머니는 이번에도 나만 오라고 하셨다. ‘나를 더 편하게 여겨 나만 부르는 것이다라고 여겼으나 전화를 끊자마자 왜 나만 부르시지?” 하는 반문과 함께 나의 의견은 억견(臆見, doxa)이 되어 내가 제일 만만하냐? 내가 너희 집 종이냐?” 라고 남편에게 퍼부어 버렸다. ‘힘들어 하시는 어머니를 돕자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으려 했으나 동서를 생각하니 약이 올랐던 것이다. 어머니를 돕고 좋은 며느리가 되고 싶은 마음은 동서와 관련 없는 것이었다. 편하게 쉬는 동서와 차례준비로 힘든 나를 연결하여 만만한 종이라는 표상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설령 어머니가 나를 만만해 하면 안 되나?’, ‘둘 중 한 명만 불러야 하는 상황에서 나만 연거푸 가면 안 되나?’ 자연의 섭리 차원에서 굽어본다면 있어서는 안 될 것도 아닌 것이다.

 

나는 나 자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나? 나를 어떻게 대하고 있나?

신은 덕이 많아 그 힘을 잘 보여주는 사람들을 큰 위험과 난관을 정찰하는 척후병으로 보냈다고 에픽테노스는 말합니다. ... 적들과 대면하기 위해 전방으로 보내졌으나 돌아와 적들은 위험하지 않고 ... 적들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정찰병-철학자입니다. (주체의 해석학, 미셀푸코, 동문선, 466~467)

  에픽테토스는 신은 제자들이 월계관을 쟁취할 수 있도록 혹독한 적들을 주변에 배치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제자들이 정찰병이 되어 시련을 자기 단련의 기회로 변용할 수 있는 철학자가 되도록 한다고 말이다.

힘에 버거운 명절일은 동서와 똑같이 나누어야 하지만 며느리로써 인정은 더 받고 싶은 표상이 억견을 만들었고 결국 나를 만만한 종으로 대했던 것이다. 어머니가 아니었다. 지난 설 이후 약 2개월 만에 내가 나를 만만하게 대하였음을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막연한 찜찜함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 분노로만 치부해버렸던 것이다.

 

채운선생님의 파헤레지아(parrhesia) ‘진실말하기를 쫒다가 동서보다 더 일을 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될 일은 아니라는 굽어보는 시선을 경험해 보고 나 자신을 덕이 많은 정찰병으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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