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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 6주차 주체의 해석학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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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가향안녕 작성일21-04-06 18:40 조회1,4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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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6주차 푸코 후기를 쓰게 된 최선영(3조)입니다. 내면의 심한 저항감과 싸우느라, 스스로 계획했던 기한을 흘려보내고 이제야 글을 써서 올립니다. 기다려주신 학인분들께 죄송하고 또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체의 해석학에서 나온 <고행><솔직하게 말하기(파르헤지아)> 키워드를 양손에 들고 다니며 2주 가까이 생활했습니다. 무척 고생스러웠습니다. 그러면서도 글을 어떻게 쓸지 생각했지요. 강의 내용 요약정리,깨달았던 점 등을 간략하게 써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용기를 내어 제가 경험한 ‘고행’ ‘파르헤지아’의 사례와 문제인식을 드러내는 글쓰기가 좋겠다는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저에게는 다소 특이한 이력이 있습니다. 보수성향이 짙은 한국교회 문화에 반감이 들었던 시기에, 개혁적인 교회공동체를 운영 중인 스승을 알게 되어 기존의 관계를 뒤로 하고 수도원 성격이 짙은 교회공동체 마을에 자발적으로 들어가서 약 6년 가까이 생활한 경험이 그렇습니다. 이 곳이 개혁적이라고 느꼈던 이유는 1호 스승인 담임목사만 설교하는 게 아니라, 교인들도 돌아가면서 설교를 한다는 점이였습니다. 이 바탕에는 스승-제자의 수직적 관계를 인식하면서도 ‘서로에게 반대하며 돕는베필’이라는 <파르헤지아>를 행사할 수 있는 우정관계가 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고전(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매주 1편씩 글을 써서 그 글을 게시판에 올립니다. 읽고 듣고 쓰고 말하기 모두를 아주 여러 사람이 함께 매주 하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함께 모여 세미나(인문학)도 하고 운동도 하고 주2회씩 밥도 먹고 텃밭도 가꾸는 곳이였습니다. 스승들이 보여주는 언행에 완전 매료되었지요.

문제는 당장 이사하고 싶은데, 대기자도 없이 2년간 다수의 스승으로부터 감시와 통제를 받으면서 ‘모두에게 좋은 때’를 하염없이 기다렸지요. 스승이 기다리라고 하니까요. 그래도 계속 질문했습니다. 이유에 대해서 듣고 싶었으니까요. 돌아오는 대답은, 나의 스승에게 답을 듣지 못했다. 스승에게 물어본 것을 내가 놓쳤다. 너의 또 다른 스승과 이야기를 나눠봐라 등이였습니다. 또는 대부분 묵언과 정숙이였지요. <고행>이였습니다. 저로서는 분노로 온몸을 휘감고 싸울 태세를 해야 하지만, 참았습니다. 다른 내가 되어야 했으니까요. 공동체의 의미심장한 어떤 게 있을 거라고 여기며, 또 그것 역시 통과해야 하는 <고행>이라고 여기면서 저를 다독였습니다. ‘진짜 진리’를 발견하고 경험하고 싶었기에 모욕감을 느끼면서도 참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1호 스승께서 ‘이사해야지’를 언급해주신 어느 날, 도둑처럼 갑작스레 마을 쉐어하우스로 이사했습니다. 그렇게 공동체 생활구성원으로 3년을 살았습니다. 3년 동안 여럿이 한방에 잠자고 생활하다가 일하고 교회가서 모임도 하고 하면서 서로의 한계를 여과없이 다 보게 되었습니다. 그 경험이 은총이라고 여기며 불편한 것도 참고 인내하고 양보하며 살았습니다만, 나중에 다 터질 건 터졌습니다. 지난한 과정을 거치지만 기어코 변하지 않은 것만 확인했지요.

그러던 중, 교회공동체 1호 스승과 그의 오랜 제자들(또 다른 저의 스승들)간의 <파르헤지아>를 행사하지 않고 묵힌 사건으로 인해, 진실(또는 사실관계)이 묻힌 최악의 사건이 발생되었습니다. 그 결과 공동체 2호 스승이 공동체 3호 스승에게 형사소송과 민사소송을 당했습니다. 개신교개혁진보계에서 해당 사건을 공론화하면서 까지 중재를 시도했지만, 이례적인 미결 사건으로 종결되었습니다. 수도원교회공동체는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1호 스승의 오랜 제자들(또 다른 저의 스승)이 떠났습니다. 저는 그 현장에서 의리(?)를 지키려고 애쓰면서도 <파르헤지아>를 실천하였지만, 다수의 냉냉한 압박 기운으로 온전한 <파르헤지아>를 실천하기엔 역부족이였습니다. 발끝부터 눈밑까지 종기가 뒤덮히고 나서야, 기존의 신앙을 뒤로 하고 제 발로 그 곳을 나왔습니다. 그 전환기에 가장 힘이 되었던 것이 ‘감이당에서의 공부’입니다. 15개월 전 교회공동체와 결별하고 스승이 말한 담론이 아닌 ‘나의 참된 담론’을 찾고 구성하고자 일성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푸코를 만났습니다.

기독교공동체(수도원)생활에 대한 언급이 책 중간중간 나옵니다. 소름끼치도록 적확하게 설명한 부분에 한번 놀랐고, <고행> <파르헤지아>의 개념 차이에 또 한번 놀랐습니다. 분명 제가 경험한 공동체에서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서로에게 스승이자 제자이다. 열린 마음으로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주체적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네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으니, 신(스승)에게 묻고 복종해야 한다. 내 말(스승의 말, 말씀묵상, 기도)을 경청해라. 그러나 너는 나의 스승이 아니다. 그러니 나는 너에게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없다. 너는 너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너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그것을 해라. 너무 모순적인 이 언표들을 교회의 모범을 실천하는 곳에서 반복적으로 경청했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문제제기(언어화)를 할 수 없었지요. 다만, 이상하다는 느낌만 가슴에 얹혀놓고 제 자신을 기만하며 진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존재처럼 논리적으로 저항 한번 못해 보고 나왔습니다. 의리가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힌 채. 그토록 오래 헤매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6년 가까이 기독신앙생활의 마지막 정착지라고 생각한 공동체 경험을 하면서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자문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이 질문을 만났습니다. <<인간은 과연 인간 스스로 자기구원을 이룰 수 있을까?>> 그리고 지난 경험과 사건들을 종합해볼 때, ‘주체의 해석학’을 공부하면서 <<철학을 공부하고 자기를 계속 변형시키는 실천을 지속할 수만 있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라는 잠정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넘어지고 깨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나고를 반복해야겠지만요. 혼자서 하면 힘들겠단 생각이 듭니다.   

푸코가 말한 <파르헤지아>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가르침을 받으러 온 제자에게 먼저 자신이 솔직히 말하기(모두 말하기)를 실천하고 보여줘야 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제자가 스승을 떠날 수 있도록, 자립할 수 있도록 스승이 먼저 파르헤지아를 실천해야 합니다. 수동적인 자를 능동적으로 만들어주는 스승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스승의 담론이 아닌, 제자가 자신의 담론을 가지고 떠나게 해주어야 합니다. 상호 능동성이 없고 위계가 있는 진실 말하기는 파르헤지아가 아니라고 언급합니다. 수사학이나 아첨 따위에 휘둘리지 않는 스승이 되기 위해서라도 스승은 자신이 먼저 제자에게 파르헤지아를 실천해야 합니다. 반대로 아첨과 유혹, 엄청난 말빨로 제자를 유혹시키는 것을 푸코는 경계합니다. 기독교에서 강제되는 고행과는 다르다고 언급하면서, 기존의 나에서 다른 나로 살기 위한 철학적 <고행>이 불가피하다고 푸코는 말합니다. 파르헤지아를 먼저 행한 (도덕적인)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 제자 역시 스스로 스승이 되는 길로 가는 것이 파르헤지아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이것이 주체화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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