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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감 장자의 대자유 <소요유편> 수업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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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필벽성옥 작성일13-03-30 15:27 조회4,971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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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6일 <목감 6강>
그 나무 아래 누워 유유자적하면 다른게 보인다.
- 장자의 대자유 <소요유편>
 
길진숙 선생님의 장자 수업 후기입니다.- A반 박성옥
 
“왕멍인지 멍멍인지 어찌나 꽈배기처럼 꼬아대는지 장자를 이해하기 어려워요~~”라는 우리들의 아우성을 들었는지 길샘의 장자수업은 81세 노학자, 왕멍의 소개로 시작되었다. 왕멍은 장자를 무척 사랑하긴 했지만 대륙의 학자다. 마오쩌뚱 혁명이후 마르크스 유물론이 대세라서 유학이나 노장사상을 높이 평가할 수 없는 조심스러운 분위기가 있다. 그래서 개념 설명을 너무 문학적으로 다룬다. 장자도 문학적 비유로 썼기 때문에 <나는 장자다>를 이해가 어려웠을 것이다.
왕멍이 서문에서 쓴 바대로 “나 자신의 견해로 장자를 읽고, 장자의 견해로 나를 읽는다”는 말에 주목하기 바란다. 나에게는 이미 선(先)지식이 있다. 나의 눈으로 장자책을 읽다보면 나를 잊고 장자식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다시 장자식으로 나를 보고, 지금 이 세상을 보면 나는 변화된다. 그러면 지금 나에게서 감지된 변화와 새롭게 보게 된 장자를 증명하기 위해 글을 쓰게 된다.
내가 본 ‘다른 장자’ 가 글로 나온다. 무릇 사람들은 어떤 대상에 대한 넘쳐나는 사랑 때문에 글을 쓴다. 쿨하게 세상을 바라보았던 장자도 자기 자신의 인생을 바라 볼 때는 어쩐지 처연함, 애잔함이 있다. 그런 장자에게 우리도 한없는 애틋함을 가지고 장자를 해석하기 시작했다.
<장자>책은 내편 7편, 외편, 잡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편 7편은 장자의 말이거나 직계제자(장자학파)가 쓴 글이다. 외편과 잡편은 장주학을 따르는 무리들이 내편에 대해 쓴 주석이다. 그러므로 우선 내편 7편을 주력해서 읽으면 된다.
 
1. 전국시대를 거슬러 산 맹자, 묵적, 양주의 같은 점과 다른 점
 장자의 이름은 장주(壯周)다. 그는 2500년전 전국시대 사람이다. 양혜왕(BC 356-319)과 제선왕 (BC 319-301) 시기에 활동했다. 장자는 송나라 몽지역 사람으로 활동은 주로 초나라에서 했다. 동시대 인물로는 맹자가 있다. 장자와 맹자는 동시대에 다른 사상을 펼쳤지만 서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장자는 묵자, 공자, 안회(안연)을 주로 언급하고 있고, 맹자는 몹시 싫어했던 묵자(묵적), 양자(양주)를 주로 언급하고 있다.
아무튼 장자가 활동했던 BC 4세기는 전국(戰國)시대, 전쟁이 끝없이 일어나던 시대였다. 철기 시대에 생산력이 높아지던 당시는 누가 중원을 차지할 것인가를 놓고 다투던 시대였다. 전국시대에 15~ 20만명이 죽고 진나라가 통일할 때까지 40만명이 죽었을 정도다. 백성보다는 이(利)와 명예를 다투는 시기에 학자들은 부국강병을 위한 국가전략을 제시하는데 앞장섰다. 상왕, 한비자 같은 법가와 소진, 장의 같은 합종연행가, 손자, 오기 같은 병가들이 제후에게 발탁되던 시대였다. 이들은 천하는 왕의 소유이며 백성은 어리석다고 보았다. 백성을 잘 다스려 천하통일을 하기 위해 국가는 우민화정책을 채택했다.
 이 때 다르게 살았던 학자들이 묵자, 양자, 맹자, 장자다. (잠깐, 여기서 노자를 언급하자면 노자는 장자보다 훨씬 전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아마도 공자가 만난 노자는 다른 노자일 것이다. 노자는 장자보다 후대 사람일 수도 있다.)
전국시대 전략가들과 다르게 살았던 이들 사이에도 방식의 차이는 있다.
우선, 맹자는 국가 없는 사회는 상상을 못했다. 맹자는 전쟁은 반대했으나 천하는 왕의 도덕정치 아래 인의와 질서를 갖춰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맹자는 소진, 장의, 손자, 오기를 싫어했을까? 아니다. 그는 묵적과 양주를 제일 싫어했다. 겸애설을 주장한 묵적이나 위아설을 주장한 양주나 모두 국가를 부인하는 점에서 가장 위험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묵적은 ‘모두 사랑하라’는 겸애설(兼愛設)을 주장했다. 내 자식이든 남의 자식이든, 내 부모든 남의 부모든 차별없이 모두 사랑하라는 무부(無父)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묵가공동체를 만들어 검소한 원시공산제를 실천했다. 300명이 모여 살며 전쟁은 반대하지만 일어나는걸 막을 수는 없기에 방어전에 뛰어난 무사집단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맹자입장에서는 봉건제의 근본은 가족인데, 가족까지도 해체하는 묵적이 위험하게 보였다. 그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사회적 제도의 기초는 가족이므로 가족을 잘 다스려 국가, 천하로 가는 제도가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수신제가치국 평천하)
한편, 양주는 내가 나만 잘 돌보면 된다는 양생설(養生設)을 주장했다. 사회적, 정치적 제도도, 전쟁과 다툼도 다 거부했다. 양주에게는 국가도 군주도 필요없다는 무군(無君) 사상을 주장했다. 한마디로 나만 잘 행복하면 모두 행복하다는 위아설(爲我設)이 그의 사상이다.
 
2. 세상 속에서 살되 다르게 사는 방법은 없을까?
 
 아마도 장자는 양주의 제자였을 것이다. 위아설을 따르던 장자에게 어느 순간 새로운 깨달음이 왔다. 젊어 한 때 그는 옻나무를 관리하던 말단 관리였다. 어느날 그는 궁실의 사냥터인 밤나무 숲에서 눈이 이상하게 큰 까치가 자신을 탁, 하고 치고 날아가는 경험을 한다. 저렇게 눈이 큰 까치가 왜 나를 못보고 치고 가나 보니 까치는 사마귀를 잡으려고 정신이 없다. 잡아먹히기 일보직전인 사마귀는 또 매미를 노리고 있다. 모두 정신이 없다. 각자 먹을 것을 노리느라. 장자는 숲을 뛰쳐 나온다. 달려가는 장자를 보고 사냥터지기가 욕을 하면서 쫒아온다. 이렇게 세상은 먹이사슬로 되어 있다. 이것이 <조릉의 숲> 우화다.
그로부터 장자는 삼개월간 밖을 나오지 않고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돈, 명예, 권력을 위해 달려가다 죽는 인생은 슬프다. 국가 없이, 제도 없이, 다툼 없이 사는 방법은 없나? 다툼을 만드는 치(治)가 싫다. 천하만물이 다른 천하만물을 다스린다는게 불쾌하다. 모든 인위를 거부하고 자연스럽게 살면 된다. 철기시대에 이미 장자는 문명거부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사냥터는 사회다. 모두가 외형을 쫒느라 자기가 위험하다는걸 못 본다. 만물은 이로움과 해로움을 부른다. 하지만 사회공동체에서 만물은 연루되어 있다. 그러니 세속을 떠날 수는 없다. 입기속 종기속(入其俗 從其俗). 양주는 속세에 들어가면 속세를 따라야 하므로 혼자 살라고 했다. 이렇게 서로 연루되어 있는데 혼자서만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한게 오산이다. 그래서 장주는 스승 양주를 떠나게 된다. 그리고 어떻게 더불어 공생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장자의 핵심은 그가 세상 속에서 살되 다르게 살기를 고민한 진정한 노마드였다는 점이다.
 
3. 절대적 회의주의자인 장자
 왕멍 같은 대륙철학에서는 흔히 장자를 보고 정신적 초월을 지향하는 사상가다, 현실을 회피하게 한다, 망각하게 한다고 비판한다. 심지어는 아큐정전식 정신승리법의 철학이라고 한다. 진정 장자는 고대판 아큐였던가?
그러나 장자는 세속의 초월이 아니다. 다르게 살기다. 그는 발 딛고 있는 현실을 극한까지 의심하고 회의했다. 정견이 진짜 바른 정론인가 의심했다. 장자를 푸코식으로 해석하자면 그는 구조주의자였다. 내가 사유하기 전에 이미 구조가 있었다. 제도, 언어, 사유 등이 이미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나는 주체가 아니다. 주체화된 존재다. 나를 주체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의심했다. 장자는 권력과 구속과 제도를 싫어하고 모든 것을 해체한 인류 최초의 아나키스트다.
 장자는 상식도 언어도 의심한다. 세상에 떠도는 말로는 사상을 말할 수가 없다. 그래서 다른 것에 빗대어 말하겠다면서 우화(寓話)로 말한다. 술잔에서 쏟아지는 술 같은 말, 치언(卮言)으로 횡설수설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중언(重言)으로 말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공자 인용을 많이 했다. 장자의 글쓰기인 우화, 치언, 중언을 보여준 담론이 <장자>다. 이 책은 심신을 바꾸는 힘이 있다.
 
4. <장자> 내편 절
 장자 내편은 7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편 소요유(逍遙遊) - 대자유
2편 제물론 - 장자의 핵심사상인 만물은 같다.
3편 양생주 - 모든 존재는 스스로 양생해야 한다.
4편 인간세 - 인간세상에서 사는 처세법
5편 덕충부 - 덕이 충만한 표시, 상징, 징표, 두려움이 없는 덕
6편 대종사 - 무슨 덕이 있어 사람들이 스승으로 삼고 싶어하나
7편 응제왕 - 제왕이 될 만한 조건
 
 노자의 정치적 텍스트인 <도덕경>은 무위지치를 다룬다. 어떻게 작위하지 않는 다스림을 펼칠 것인가. 어떻게 왕노릇을 할까를 다뤘다. 이 때문에 노자가 전국시대 사람이라고 본다. 도덕경은 이 거친 싸움에서 곧 소멸할 것 같은 작은 나라의 제후들에게 주는 필살기다. 어떻게 살아 남을까 비법을 묻는 제후에게 노자는 답한다. 멸망을 두려워 말고, 멸망이 두렵다면 욕심을 줄이고 낮은데로 임하라. 전국시대에는 사라지는 나라가 많았다. 사라져도 두렵지 않은 훈련을 하면 된다. 전쟁을 안 하면 이상한 시대에서 지면 소멸되야 하는 위기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뤘다. 그래서 노자를 읽으면 짠한 데가 있다.
 장자는 제왕을 높이지도 않았고 다른 신분이나 권위를 부여할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신분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했다. 신성이나 초월, 권력에 대한 믿음도 없었다. 하늘이 내린 신분의 차에 따라 자기의 도를 다하라는 공자를 인정하지 않았다. 공자는 인간세(世)는 인간이, 하늘의 일은 하늘이 한다고 봤다. 그러니 하늘이 하는 일은 모른다. 그런 점에서 보면 장자는 급진적 아나키스트다. 장자와 노자는 철저히 인간중심이다. 초월적 신성의 세계를 부정하고 물질세계 위주로 간다. 신도 없고, 신분도 없으니 얼마나 자유로운가. 그래야 대자유를 말할 수 있다. “철기 시대의 니체”라고 부름직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장자는 깨달음 이후에는 어떻게 살았나? 가난하게 살았다. 기꺼이 가난하겠다며 신을 엮고 살았다. 자유롭다면 부자가 될 수 없다. 모든걸 포기해야 자유롭다. 그러니 초 위왕이 재상자리를 권유했어도 장자가 “소가 되기 싫다. 차라리 시궁창에 살지언정.... ”이라고 거절하는 얘기가 사마천의 사기에 나온다.
 
5. <곤>에서 <붕>으로 비약하면 어떻게 되나?
 장자의 물고기<곤>이 큰 새<붕>으로 비약하는 이야기는 존재다움이 뭘까를 말해준다. 존재성은 화(化)다. 변화만이 존재를 존재케 한다. 변화하지 않는 존재는 존재답지 않다. 누구나 큰 존재가 될수 있다는 장쾌한 희망과 환상을 준다. 모든 존재는 변용능력이 있다. 변화의 잠재태를 능동적으로 발휘해야만 존재가 존재답다. 곤이 붕이 되는 변화가 없으면 감이당에서도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메추라기나 뱁새처럼 정주하고 싶어한다. 구조나 선지식에 따라 산다. 안주하면서도 변화하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갈등한다. 곤은 붕이 되고 나서도 안주하지 않았다. 구만리 날아서 북명에서 남명(천지)까지 날라간다.
 왜 가지? 힘들게? 도를 깨치고 나면 뭐가 달라지지? 그 다음에 얻는게 뭐지? 라는 질문이 당연히 나온다. 곤이 붕이 되려면 구만리까지 날개짓하며 바람을 모으는 수련이 뒤따라야 한다. 구만리 위에서 땅을 내려다 보니 아득하고 파랗더라. 땅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늘이 파란걸까 물었는데 초월하고 나서 위에서 지상을 내려다 보니 똑깥이 아득하고 파랗더라. 늘 다른 세계를 꿈꾸었지만 이상은 현실과 다르지 않더라. 그러니 있는 자리에서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이 자리에서 붕 되기. 이 자리에서 신처럼 살면 거기가 천국이다. 신은 늘 이 안에 있다. 그래서 붕이 되는 과정이 대자유인 것이다.
 
6. <유용>과 <무용>의 경계를 깨라.
 장자의 친구 혜시가 없었다면 장자의 사상도 규정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명가자(名家者)였던 혜시는 말과 사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던 언어학자였다. 혜시는 “중심은 늘 중심인가?”라고 의심하며 “중심은 이동한다”고 주장했다. 혜시는 수레 한 대 가득할 정도로 많은 책을 썼지만 말장난한다고 인정받지 못했다. 18세기에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확신한 홍대용에 와서야 중화가 영원한 중심문명이 아니며 동서남북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사상을 펼쳤던 것을 생각하면 놀랍지 않은가. 기원전 인물이 벌써 이런 중심을 벗어난 사고를 하다니.... 혜시의 사상을 인식의 상대성으로 연결한게 장자다. 즉, 중심이 없으면 누구나 같다.
 이제 쓸모가 있나 없나, 용(用)에 대해 살펴보자. 돈도, 일도 쓸모있음을 따른다. 은나라의 후손이 살던 송나라는 어리석음의 대표주자였다. 송양왕은 전쟁을 하는데 상대가 진을 칠 때까지 기다리다가 도리어 죽는다. 페어플레이를 기다린 그는 어리석은걸까. 인자한 걸까. 송나라에서는 모자(관)이 문명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모자장사가 월나라에 가니 아무도 모자를 안쓰고 빡빡 머리에 문신을 하고 있음을 본다. 모자가 쓸모없다니.....인식이 전환되는 순간이다. 나에게 쓸모있음이 다른 사람에데 쓸모없음이 될 수 있다.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경계없이 자유자재로 생각해보라.
요임금이 허유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제안했다. 왕위를 물려받다니.... 그 엄청난 쓸모있음을 허유는 쓸모없다고 가볍게 물리친다. 오히려 그런 제안을 들어서 자기 귀가 더렵혀졌다고 귀를 물로 씻는다. 당시는 그런 사람이 많았다. 왕위를 받으라고 하면 강에 빠져 죽거나, 돌을 지고 투신하기도 했다. 나의 존재를 무시하다니, 내가 왕 따위나 할 사람이란 말인가 ......
 그러므로 유용과 무용의 경계를 깨라. 굵고 크게 자란 큰 재목은 빨리 잘려나간다. 사람 입장에서 보면 큰 재목이 쓸모 있지만 나무 입장에서 보면 쓸모없음이다. 장자의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이 이것이다. 그 어떤 곳에도 없는 곳에서 굽고 쓸모없는 나무를 심고, 그 나무 아래 눕거나 유유자적하라. 소요유 할 때 보이는 세상은 다른 세상이다. 새로운 인식을 하라. 그것이 다르게 살기의 첫 출발이다. 어떤 전제도, 관성도 없이 전혀 다른 길을 찾아 보는 것. 이때 소요유는 망각과 초월과 게으름이 아니다. 심신을 새롭게 만드는 경지다. 이런 상태에서 사물을 바라보라. 우주는? 나는?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다음 강의 제물론은 계속됩니다. (투비 컨티뉴드~~~)
 
(덧붙이는 말)
왕멍의 책에는 장자의 원문에 대한 해석이 없다. 그래서 소개한 책이 현암사의 <장자>다. 오강남 저. 그 중 제물론을 꼭 읽고 생각해 올 것. 무(無)란 무엇인가, 맹자의 필사기 도(道)란 무엇인가, 무위와 자연, 도추와 원심, 조삼모사와 조사모삼의 양행, 호접몽과 물화(物化)란 무엇인가 생각을 정리해 오라는 숙제를 내셨습니다.
 
이상 빈 종이만 보면 호작질을 해서 필기의 끝판왕이라고 친구들이 호를 붙여준 필벽성옥이었습니다. 안녕히.....
댓글목록

생글님의 댓글

생글 작성일

그야말로 완벽한 필기의 극치를 봅니다!!! 장자 속의 달인을 바로 여기서 만날 줄이야!! 하하하. 저는 매주 감이당에서 다양한 人才와 훌륭한 仁者들을 만나는 즐거움이 참 크답니다. 그 기운들을 먹고 거뜬하게&신나게 한 주를 살아내네요. 길진숙샘의 강의는 장자에 관한 실타래를 쉼없이 술술&조곤조곤 풀어내는 것 같았습니다.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작은 물줄기가 졸졸졸 개울이 되고, 시냇물이 되는가 싶더니 어느새 큰 강으로 범람하고 있었습니다. 그 부드러운 카리스마는 깊고도 폭넓은 공부가 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부러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