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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감 장자의 <제물론편> 수업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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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필벽성옥 작성일13-04-08 13:49 조회4,752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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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3일 <목감 7강>
 
너와 나 사이의 경계를 깨고 물화하라.
- 장자의 “~되기” <제물론편>
길진숙 선생님의 장자 2차 수업 후기입니다.- A반 박성옥
붕이 곤이 되어 하늘에 올라 내려다 본 세상이나 지상에서 올려다 본 세상이나 같다는 것은 지난 시간에 배웠다. 동경하는 삶도 부대낀다는 점은 똑 같다는 것.
그러므로 어떻게 다르게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다르게 산다는 것은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 출발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알고 있고, 규정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와져야 한다. 변화는 어마어마한 전이가 아니다. 생활하면서 만나는 사건마다 상식을 깨고 다르게 보는 것. 이 작은 것에서 변화가 시작한다. 어떻게 나를, 또한 삶을 있는 그대로 볼 것인가.
 
1. 도(道)는 텅 빈 것이다.
 
텅 빈 것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남곽자기의 고사, 고목사회(稿木死灰)가 나온다. 마른 나무처럼, 식은 재처럼 텅 빈 채 앉아 있다는 뜻은 무엇일까. ‘군더더기를 내려 놓는다’는 뜻이다. 내가 가진 편견, 지식, 정견, 정론, 법, 규범, 습관 등등.... 나를 둘러싼 여러 전제들과 내가 구성하고 있는 여러 전제들을 내려놓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도다. 화두를 잡는 것도 모든 잡념을 내려놓고 생각하기다.
이래야 오상아(吾喪我)가 된다. 내가 나를 장사지낸다는 오상아나 앉아서 잊었다는 좌망(坐忘), 나를 잊는 망아(忘我), 마음의 재계인 심재(心齋)가 다 같은 뜻이다. 여기서 잊어야 할 나는 '획득된 자아'다. 그래야 참자아를 만난다. 참자아는 아무 것도 덧붙이지 않은 상태, 사회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없는 무지랭이 상태에서 만난다.
2. 좌망(坐忘)은 대통이며 도다.
 
지난 시간 얘기한대로 장자는 중언(重言)으로 썼기에 고사비유를 많이 했다. 좌망(坐忘)은 안회의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안회는 공자가 가장 총애하는 제자였다. 공자는 안회가 인의를 석달동안 변함없이 지키고 호학하는 제자라고 극찬했다. 하루는 안회가 공자에게 말했다. “저 나아졌어요. 인의(仁義)를 잊었습니다.” 공자는 말했다. “그 정도로는 아직 아니야.”
두 번째로 안회가 와서 말했다. “저 나아졌어요. 예악(禮樂)을 잊었습니다.” 또 공자는 말했다. “그 정도로는 아직 아니야.” 공자는 참 좋은 스승이다. 답을 주는게 아니라 문제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질문만 해주는 사람이다.
세 번째로 안회가 와서 말했다. “저 나아졌어요. 좌망했어요.” 공자는 물었다. “좌망이 뭐지?”
안회가 대답했다. “내 몸의 사지도 잊고 마음도 잊었습니다.” 그제서야 공자는 말했다. “너는 정말 훌륭하구나. 나도 네 뒤를 따르리라.” 공자와 안회, 스승과 제자의 존재가 전복되는 순간이다. 깨달음이 오는 순간 사제지간도 역전될 수 있다.
인의, 예악, 모든 지식과 규정성을 버리고 심지어는 나조차도 잊는 것이 좌망이요, 대통이며 도다. 안회가 위나라에 가서 도리로써 나라를 바꿔보겠다고 할 때 공자는 심재하라면서 말린다. 도리를 얘기해도 위나라 왕의 심기를 거슬려서 죽게 될까봐 염려해서이다. 도는 오직 빈 곳에만 깃든다. 비움이 마음의 재계, 심재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하심(下心)이다. 마음도 성심(成心)에 맞춰 자신에게 부합하는 것만 받아들인다. 마음을 하나로 모아 귀로 듣지 말고, 기로 들어라. 기는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소다. 형체도 보이지 않고 넘나든다. 기가 뭉쳐져서 몸이 되고 흩어지면 정신이 된다.
 
3. 참 주재자는 변화, 그 자체이다.
 
우주의 천뢰, 지뢰, 인뢰 (천도, 지도, 인도)를 살펴보자. 대기에서 뿜어내는 바람이 대지의 많은 구멍에 부딪히면서 소리를 내는게 지뢰다. 사람의 숨이 퉁소를 만나 소리를 내는게 인뢰다. 그럼 천뢰는 무엇일까. 소리를 내게 하는 변화 그 자체가 천뢰다. 천뢰는 참 주재자다.
유가에서의 도는 인의예지다. 장자의 도는 만물이 저절로 그리 가는 길이다. 도는 제각각이다. 도는 다녀서 이뤄지는 것이요, 물(物)은 그렇게 일컬어져서(名) 그리된 것이다. 도행지이성 행위지이연 (道行之而成 行謂之而然). 도를 도라 하면 도라 할 수 없다. 길이 애초에 정해지지 않았듯이 도는 도가 아니다. 대도는 없다. 그냥 길일뿐이다. 도가 굳어지면 법과 관습이 된다. 길을 강요할 수는 없다.
약육강식의 논리대로 강한 자가 살아남는게 진화가 아니다. 변화하는 환경에 잘 변신해서 적응하는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만물은 서로 돕는다. 우리는 진화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도는 매순간 함의를 재구성해야 한다. 우리가 도를 넓히지 도가 우리를 넓혀주지 않는다. 매 순간 살아가는 방식을 재구성해서 변화한다. 새로운걸 봐야 깨달음이 오고 관계의 구성을 다르게 배치한다. 일상에서 만나는 맥락이 달라지면 다르게 바뀐다. 어떤 타자와 사건을 만날지 모르므로 매번 모른다. 나를 모른다는 상태에서 새로 배워야 한다. 지식이 불필요한게 아니라 내가 가진 편견을 버리기 위해 배움이 필요하다. 나는 갇혀있기 쉽기 때문이다.
원래 기는 태허에 모여 있다. 우주만물에 기는 정해져 있다. 기가 이합집산해서 만물을 만들고 죽으면 흩어져서 다시 뭉쳐 다른 존재로 변화된다. 이것은 윤회와는 다른 거다. 나라는 아상(我像)이 없다. 들뢰즈가 우리는 '기관없는 신체'라는 말과 같으며 신근영이 말하는 우리는 '타자들의 공동체'라는 말과도 같다. 내 몸은 내가 아니다. 세포와 바이러스가 자기끼리 부딪혀 생장 소멸한다. 또 다른 타자가 살아야 내가 산다. 그러므로 만물은 형제자매다.
 
4. 도추는 상대성의 원리를 파악하는 깨달음이다.
 
글을 쓰는 이유는 나의 다름을 표현하는 것이다. 내가 다르게 본 세상을 보여주려고 글을 쓴다. 박학에 머물고 싶은 지식중독은 삶에 군더더기를 더할 뿐이다. 안다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공부를 하라. 이것과 저것, 선과 악, 시비, 귀천, 미추 등 우리는 구분하는 경계를 가지고 매여 있다. 내가 포기할 수 없는 마지노선, 그 장벽을 넘어서야 한다. 장자는 경계가 없어야 한다고는 얘기하지 않았다. 음이 없으면 양이 존재하지 않듯이 대대관계는 인정했다. 이러한 구분, 등급, 위계, 차별 등의 인위적 척도는 동일시하려는 욕망이다. 만들어진 욕망이 같은 편을 만들려는 동일성의 폭력을 가져온다.
숙, 홀, 혼돈의 비유를 보라. 혼돈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서 숙과 홀이 인간처럼 일곱 개의 구멍을 내주려고 했다. 혼돈에게 하루에 하나씩 구멍을 내주었더니 칠일만에 죽어버렸다. 인간과 동일하게 만들려는 선의가 죽음으로 내모는 폭력이 된 것이다.
장자는 공자의 인위조차 싫어한다. 상대성의 원리를 파악하는게 도추(道樞)다. 도의 경첩이 도추다. (지도리 추(樞)는 문을 여닫는 경첩이라는 뜻.) 도추는 양행(兩行)이요 천균(天均)이다. (하늘의 저울이라는 뜻.)
만물의 본질, 생명의 본질은 오직 살 뿐, 오직 살게 할 뿐이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도의 지도리다. 도추를 아는게 깨달음이다. 나만 옳은게 아니라 그에게도 옳은게 있다. 노나라 임금이 아름다운 바닷새를 가져와 가두어 아름다운 집과 음악을 줘도 죽어버리지 않았던가.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제도와 사회가 우리를 규정하지만 계속 다른 사회와 국가가 만들어지고 있다. 장자와 같은 사람이 계속 나오기 때문에!
 
5. 양행은 둘 다 살리는 길이다.
 
다름을 깨닫는 도추는 균형을 잡는 일이며, 둘 다 살리는 양행이다. 여기서 조삼모사의 우화가 나온다. 조공이 흉년이라 원숭이에게 줄 도토리가 부족했다. 그래서 하루에 연명할 수 있는 도토리를 7개로 줄여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를 준다고 했다. 원숭이들이 아우성을 쳤다. 그래서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를 준다고 하니 잠잠해졌다. 결국 갯수는 마찬가지인데 이는 교활한 속임수를 말함인가? 장자는 이 우화를 원숭이의 우둔함이나 조공의 간교함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원숭이의 마음과 리듬을 읽은 것으로 보았다. 마음은 미묘한데 따라 움직인다. 존재의 미묘한 아우성을 듣는게 소통이요, 대통이다. 조공은 양행했다. 사람의 마음도 잡고 원숭이의 마음도 잡았다. 둘 다 살리는 길을 보면 늘 세상은 새롭다. 그러면 나도 새로워진다. 우리는 타자들의 공동체이며 외물들과 연루되어 살아간다. 국가권력과 법체계가 있어도 전쟁은 빈번하고 빈부격차와 귀천은 여전하다. 장자는 만물이 공존하는 방법은 없을까 회의하고 질문한다.
격차와 귀천을 나누는 정상, 비정상이 있는가를 고민한 것이 장자의 탁월함이다. 운명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편안해 하는 안명(安命)은 편안하게 삶의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두가지 우화가 나온다. 첫째, 뒷꿈치가 잘린 죄수 신도가와 정나라 재상 정자산의 이야기다. 정자산이 죄수와 동석할 수 없다고 말하자 신도가는 우리가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하면서 같은 뜻을 가진게 아니었나? 19년동안 같이 공부하면서 외발을 의식한 적이 있었는가 묻는다. 정상과 비정상이 없었음을 정자산이 나중에 깨닫는다. 공부라는 뗏목을 같이 타고 간다는 것.
둘째, 왕태라는 스승은 아무 말도 안하고 가르쳐주는 것이 없었다. 텅빈 채로 가서 옆에만 있어도 가득 채우고 돌아온다. 장벽과 장애가 없음이 공부다. 공부는 실천의 문제이며, 행동으로 보여주면서 배운다.
 
6. 들뢰즈와 비슷한 장자의 ~ 되기.
 
들뢰즈는 유기체적으로 우리 몸을 보지 말라고 했다. 우리 몸은 규정할 수 없다. 기관없는 신체를 몸으로 느끼고 오라.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면 우리는 계속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 타자와의 소통, 이해를 통해 물화하기가 ~되기이다. 무위했는데 저절로 스승을 받들고 배우고 왔다가 만물됨이다. 호접몽의 예시는 존재의 관계성을 보여준다. 꿈에서 나비가 장주가 된 것인가? 장주가 나비가 된 것인가? 형태적으로 구분은 있지만 서로 물화되어서 경계가 없다. 존재와 존재 사이, 너와 나 사이에 경계없음은 곧 '타자 되기', '소수자 되기' 이다.
주역의 8괘를 만든 복희씨는 다스림이 필요없다고 믿었다. 신발이 내 발에 꼭 맞으면 신을 신고 있다는 걸 잊어버린다. 존재가 거슬리지 않는 것이 물화요 ~되기이다. 이런 되기는 무위를 바탕으로 한다. 효도를 해야겠다고 의식하는 작위보다는 부모를 잊는 것이 가장 큰 효다. 효를 의식 하지 않고 자기도 모르게 이미 효도를 하고 있는 상태, 혹은 부모가 나를 잊는 상태가 최고의 효도다. 물화는 타자 되기.
유가는 인(仁)을 규정했지만 장자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대인(大仁)은 불인(不仁)하다고 했다. 자연은 쿨하다. 사랑에 대한 감각조차 없다. 시비가 없는 경지가 세상과 딱 맞는 상태이며 무위이다. 여기서 생각해보자. 내가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는 마지노선은 무엇인가? 진짜 내가 욕망하는 것은 뭘까. 욕망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인간이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는게 '소유'다. 그래서 불교가 무소유를 말하는 거다. 사람이 소유를 버리지 못하므로 자본주의를 욕하면서도 소유와 소비를 변형해가며 유지한다. 문턱을 넘는 것은 다른 세계를 만나는 일이지 변형이 아니다.
호접몽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꿈 속 무의식의 나는 나인가? 지인의 마음은 거울과 같다. 거울은 부장불영 응이부장(不將不迎 應而不藏)하다. 보내지도 않고 맞이하지도 않는다. 응하되 저장하지도 않는다. 흔들리지 않는다는 건 무정한 것이 아니다. 감정은 있지만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응하되 머무르지 않는다'는 응무소주(應無所住)의 경지다. 집착하지 않아야 감정의 평정을 이룬다.
장자는 아름답게 죽었다. 죽음을 앞둔 장자를 보고 제자가 후하게 장사지내려 하자 아무 것도 덧붙이지 못하게 했다. "천지가 선물이다. 죽어서 까마귀밥이 되나 땅강아지밥이 되나 같다''고 했다. 부인이 죽었을 때도 질장구를 치던 장자가 아니었던가. 장자는 존재 자체를 실천하고 갔다. "자사자래자여' 생사의 경계를 넘는 벗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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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글님의 댓글

생글 작성일

배움이란, 이렇게 감미로울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마음이 울컥 했습니다. 수업을 들으면서 눈물이 차올라 왔던 것도 폐경 때문이겠죠? 하하. 몸은 노쇠해 가지만 다른 존재가 되어갈 수 있을 듯한 기대감을 갖게 해준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고마운 시간을 갖게 해준 길진숙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장자를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이렇게 도와주신 박성옥샘의 고마움도 잊지 않겠습니다. 장자의 ‘막힘없음’과 ‘통큼’을 받아들여, 오상아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 제 삶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