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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경운 작성일19-08-06 15:27 조회1,3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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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성의 현장으로 밀고 나가라


 원국 : 무신/임술/경신/병자 [인성 40, 비견 35, 식상 25]

 대운 :1986 [갑자]1996[정재 정인] 2006[편관 편재] 2016 [정관 정재] 2026[편인 편인]

 세운 : 2019 기해년 [정인 식신] 2018 무술년 [편인편인]

 지지삼합 : 신자진 수(식상과다형)

 백호대살, 괴강살 : 임술



 난 일간 경금으로 그동안 참 날카로왔다. 작년에 들어온 무토, 술토가 인성이 들어와서 인지, 우연히 작년 무술년 입춘에 감이당에 접속하고 동양 고전의 세계에 발을 디디게 된다. 대학 학부에 물리학을 공부해서 자연과학책 위주로 공부했었는데, 동양고전을 집중적으로 하는 공부는 처음이다. 그때 루쉰, 왕양명, 논어, 대학, 중용, 참 많이도 했다.

 난 무신년 가을, 찬이슬이 맺히고 추수하는 절기 한로 출생한 충남 논산 출신이다. 일찍이 학문에 뜻을 품고, 시골 논산에서  대전으로 고등학교를 유학하고, 또 서울에서 대학교를, 그리고 독일에서 물리학을 공부했다. 


갑자의 기운으로 독일로  


 갑자甲子가 들어온 대운에 대학에 들어가고, 식상의 촉으로 학문에 발을 들이고, 바로 독일 유학을 꿈꾼다. 그리고는 군대를 마치고는 무작정, 아는 선배, 친척 하나도 없이 한국을 떠나 뮌헨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배운 독일어로 그냥 독일인들에게 접근하고, 대학 입학 수속을 홀로 외국인 입학 수속처를 찾아가 대학에 입학하고, 어렵사리 전자과에서 물리학으로 전과 등록하고, 바로 대학 물리학 수업을 듣는데, 거의 다 독일인이고 나와 중국인 한명만 있었다. 아는 사람 하나도 없이 오로지 학문에 대한 신념 하나로, 독고다이로 공부를 시작했다. 참으로 외로운 시기였다. 그 힘든 시기를 견디고 어려운 세미나, 교수와 일대일 구두 시험을 통과하고 뮌헨대 물리학과를 13학기만에 디플롬(한국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식상과다 무재성이다

 

 뮌헨에 남아서 뮌헨대 실험연구소에 취직할 수도 있었는데, 더 노력해보지도 않고, 보니까 과다 식상으로 현장 속으로 가지는 않는다. 이론 물리학 중에서도 가장 핫한 퀀텀 컴퓨터를 한다고, 뮌헨서 기차로 10시간 걸리는 도르트문트로 이사를 간다. 도르트문트 대학 연구소 연구원으로 연구비 지원을 받으면서 박사과정을 하는 건데, 이론 물리 연구에서는 지도교수와 같이 연구하여 유명 학술지에 페이퍼도 쓰지만, 실험에서는, 바로 현장에서는 무언가 힘이 든다. 그놈의 무재성으로, 돌진이 잘 안된다. 연구진이 나혼자라서 다른 분야 연구원과 협력도 힘이 든다. 혼자 밤늦게 연구실에서 노력하지만, 일단 선임 연구원에게 계속 물어보고 해야 되는데, 그게 잘 안되니까. 하루는 한 선임연구원(독일인)과 무슨 문제가 다투다가, 그가 나에게 “외국인 어쩌구…” 이말에 난 엄청 화가 났다. 그때 어떻게 말하고 행동했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그 이후로는 그와는 말도 안섞었다. 그러나 그가 바로 내가 필요한 유일한 비슷한 연구분야의 연구원이었다. 그래서 더이상의 실험은 그에게 물어볼수 없으니, 어떻게 되었나! 

 지도 교수가 새로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이론 물리를 하면서도, 연구소내에 자기공명기 기계를 설치하는게 일단의 목표였다. 그러나, 연구 진척은 잘 안되고, 2년후에 연구 지원금도 끊어지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이 상황을 사주로 자세히 들여다 보면, 원국에 재성이 없는 관계로, 현장으로 밀고 나가는 힘이 부족하다. 여기서도 박사과정이 진척이 안되면, 지도교수와 문제를 잘 풀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난 내 생각이 많아지면서 혼자서만 고민한다. 그리고 교수탓, 장학금탓, 선임자탓으로 결과를 돌리고는, 현장에서 도망가는 나를 발견한다. 재성을 피해서 바로 인성으로 간다. 혼자만의 독단에 빠져서.


물리에서 수행으로: 왜?


  이제 물리학 박사과정을 더이상 못하게 되나? 지원이 끊기고. 타도시 대학연구소를 방문하여 프레젠테이션을 했는데, 잘 안됐다. 그래서 독일 회사 연구소 자리를 알아 봤는데, 내 비자가 아르바이트 비자가 아니라서 취직하기도 힘들었다. 일단 한국에 들어가야 했다. 

 그때 우연히 독일 보훔 Bochum 에서 법륜스님 강연회에 참석했다. 그동안 불교 명상에 심취해 있었는데, 특히 위빠사나 명상을 계속하면서 들었던 질문들을 스님에게 물어보고는 나의 이성의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듯 하였다. 그때부터 정토회 수행법으로 한 일 년 간 수행하면서 마음도 편안해지고, 그래 이제는 나를 위해 공부하기보다는 세상을 위해 공부해 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그 당시에 내가 수행하던 위빠사나를 더 공부한다는 핑계를 대고 큰 모험을 걸었다. 부모님에게는 한국에 들어가 연구소에 취직하겠다고 하고 귀국한다. 고향에 내려와서는 명상수련 좀 하고 온다고 하고서는, 경상도 문경에 있는 수행봉사단체 정토회를 들어간다. 


수행 : 대운의 편관를 가지고 시작은 하나,,,


 정토회에서 절의 행자 생활에 해당하는 수련을 1년 정도 문경 수련원에서 했다. 불교를 종교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잘 안되었고, 수행으로 하심하고 하심하고 문경 생활에서 삶의 저 밑바닥에서 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아니 실제로 새벽기도를 시작으로 매일 500배와 대중생활과 그리고 힘든 육체 노동을 어떻게 견디고 했는지 모른다. 잠도 몇 시간 못하고 일어나, 일을 하고 수행하기를 일 년간, 참 힘들었다. 그 뒤에 서울 정토회에 올라와서, 평화재단에 근무하면서 공기가 안좋고 대중 숙소를 10여명이 같이 자는데 매일 코고는 소리가 들리지, 힘들고 하여 비염도 심해지고 억지로 일을 하다보니, 맹장염까지 걸리게 된다. 또한 10여년 먼저 들어온 선임 도반들이 참 힘들게 한다. 수행이란 핑계를 대고, 서울 수련생으로 계속되는 교육과 함께 언어적으로도 독일에서 바로 와서 한글로 된 책을 별로 못보았고, 문서 작업도 독일어나 영어로 했기에, 한국어로 사무일을 못한다고 지천도 많이 당했다. 무조건 수행으로 돌리고 참회하라는데, 그게 참. 잘 되냐구요.

 그동안 있으면서 하심하는 공부는 많이 해서 어떤 상황에서도 가장 밑바닥의 ‘상선약수’의 물로 겸손의 자세를 배웠다. 독일 유학생, 물리학 석사의 지위와 위치를 내려놓았다. 생활 쓰레기를 치우고 화장실 똥을 치우고, 가장 밑바닥의 ‘노가다’의 일들도 다 해보고. 명상수련하면서는 마음 관찰과 몸의 관찰도.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에게서 배우고 자비의 마음을 내기도 했다. 그래서 상구보리 하화중생 한다고 생각했다. 


수행에의 회의(?); 편인의 결과


 정토회 8년 있으면서 일과 수행을 하면서 정토회 다른 스님(유수스님)과 같이 불사(불교 건축일)를 했는데, 외부 업자들과 일을 내가 조율하는 건데, 이 일이 대중 공양간(부엌) 설계를 하는데 스님께서 한 열 번 도면을 바꾸는데, 나중에 업자분이 화를 내고 그만두게 된다. 난 최선을 다했다고 했는데, 거기서 스님에게 직접 말하지는 못하고, 법사님등에게 상담도 하지않고. 다른 도반들에게 스님을 헐뜻고는 나 혼자만의 생각에 또 빠지게 된다. 그만두어야 겠다는.

 그 이후 전체 도반들 회의에서 조직에 대한 문제 제기를 했는데, 이를 스님께서 받아주지 않는다고 고민을 한다. 또 스님께서 조직 회원들을 돌보지 못하고, 일만 벌린다고 문제 제기만 하고는, 직접 스님을 만나서 이 문제를 말하지도 못하고. 회향할 때도 스님이 외국에 있다고는 전화 통화만 하고 만나지도, 아니 어느정도 만나길 회피하면서 그냥 집으로 회향한다.

파리가 한마리 책상 위에 있는데, 손으로 내쫓으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마찬가지로 나도 파리가 한바퀴 돌아 제자리에 오듯이, 고향 논산으로 돌아온다.


수행자(?) 파리의 귀환


 나의 일간은 경금이다. 거기다 비견으로 신금이 2개. 금이 모두 3개다. 난 경금으로 원칙에 철저한 무쇠다. 이를 난 독일 생활을 오래해서 그렇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래서 독일에서 사람관계에서 내 원칙에 안맞다는 하면, 철저하게 그 사람을 무시했었다. 지금 보면 참 그들에게 미안한데. 그리고 정토회에서도 군기반장 같은 대중대표 소임을 맞아서, 사람들에게 칼처럼 원칙을 들이댔었다. 반장이라는 권력으로 그 때 괜찮았던 후배들을 많이 공격했다. 마음은 보지도 않고 원칙만 내세웠던 그 시절의 나. 그들에게 참회한다. 그래서 그 원칙주의자가 옳다고 믿고 또 독일 사람이 원칙과 법을 잘 지키는데, 내가 거기에 물들어서 그렇다고 자조했는데. 경금 인줄도 모르고. 금의 과실처럼 겉은 딱딱하고 차갑게 대하고, 속은 부드러운 과실이다. 그래서 나중에 내 몸이 힘들었고. “대인춘풍 지기추상, 남을 대하기를 춘풍처럼 관대하게 하고, 자기를 갖기를 추상같이 엄격해야 한다.” 신영복 샘의 강의에 나오는 말이다. 


 나의 일간이 신강 하다. 인성이 둘, 비겁이 둘로 75점 입니다. 거기에 지지합으로 신자진 수를 만들어서 식상 과다를 만든다. 무재성 그리고 관성도 부족하다. 과다한 식상으로 일들을 잘 선택은 하는데, 딱 거기까지다. 이를 현장으로 끌고 가야 하고, 사람들과 직접 부딪쳐야 한다. 이 현장을 회피 할 때를 잘 알아차려야 한다. 그리고 그 동안 인성에 너무 메어있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재성, 관성을 피하고 바로 인성으로 독단에 빠져 살았다.


 "공부가 독이 되지 않으려면 세상으로부터 받은 지식을 세상속으로 다시 순환시켜야 한다. 고전이 우리가 받은 선물이라면, 이 글들은 그 선물에 대한 우리의 답례다.”([고전톡톡]의 채운샘) 나의 길이기도 한 것 같다. 인성, 비겁, 식상을 이제는 재성으로 현장속으로 세상속으로 순환시켜야 한다. 글쓰기를 통해서.

“글쓰기가 아니면 동양의 지혜가 현대인들의 현장에 개입하기란 가능하지 않다...여기 담긴 지혜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려면 인문학적 프리즘을 통과해야 한다...인문학적으로 번역해야 한다...글쓰기란 이 심연을 항해하고 돌아온 전령사의 생기 넘치는 번역에 다름 아니다.”(나의운명사용설명서 263쪽) 고전을 보니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는 듯 하다. 그걸 현대의 우리 언어로 다시 풀어 내는 작업이 필요한 것 같다. 


 작년에 수성을 하면서 사서와 삼경을 공부하고 양명학, 루쉰을 공부했다. 이 고전을 보면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인문학적 소양을 배우면서, 동양 고전 속에서 이 지혜를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번 학기에 니체를 보고는 딱 이거다 라고 마음에 꽂힌다. 근대의 문제를 가장 잘 이해한 서양 철학자이구나. 그래서 요즘도 니체 책을 혼자 공부하면서 망치로 많은 것들이 부서지고 있고 다시 새롭게 만들고 있다. 그걸 글로 풀어서 써야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그리고 그걸 우리 시대를  뛰어넘을수 있도록 무언가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독일에서 우연히 가져온 니체 철학책 원서를 보고는 할 수 있겠다 생각이다. 앞으로 동서양 고전과 또한 과학도…독일에서 공부한 물리학을 손에서 놓은지 15년이 넘는다. 이제는 이것과도 연결시켜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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