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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성 누드글쓰기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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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초원 작성일19-08-07 11:14 조회1,2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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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7 / 감이당 목요일 대중지성 / 1교시 의역학 - 누드글쓰기 후기 / 김은순.
 

    다시 시작하기
 
생각, 행동, 말이 곧 나이다.
    “다른 길로 나서다”라는 제목으로 글쓰기를 했었다. 명리학 적으로 식상과 재성기운이 발달한 기질로 인해 반복적으로 발목이 잡히는 부분을 쓰고 싶었다. 질문 없이 쉽게 벌리는 식상기운과 주변을 소외시킨 체 결과로만 향하는 재성기운에 대한 조절. 그리고 관성과 인성의 기운으로 선 순환되고자 하는 바람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주제와 그 이면에 있는 욕망에 대한 성찰이 부족했고 표현도 미흡하여 전달력이 떨어진 것 같다.
    글의 주제는 나의 일상에 있는 공부와 기도였다. 이에 대한 박장금 선생님의 코멘트는 “이미지 소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재성의 합리화 즉 재성의 깔때기다”, “매뉴얼화 된 느낌이다”라는 말씀이 있었다. 그 외에 글에 현장감이 없으며, 공부를 유랑하는 것처럼 한다고 하셨다. 또한 관계를 살피고 사유를 해야만 재성을 제대로 쓸 수 있다는 조언이 있었고, 인성을 쓰는 공부란 무엇인지, 만나는 사람들, 기운을 쏟는 일들에 대하여 생각해보라는 말씀도 해주셨다.
    길진숙 선생님의 코멘트는 “삶은 긴장도 이완도 되어야하는데 긴장감이 없다”, “공허함, 느슨함의 돌파구인, 그 공부를 어떻게 세게 밀고 나갈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시점이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리고 “공부를 세게 해봐라”라는 말씀과 함께 공부와의 접속에 대하여 당신께서는 “공부 아니면 할 게 없다”라는 마음이 있고, 책을 읽지 않으면 그 틈에 망상이 생기더라, 그래서 세미나를 여러 개 하게 된다고 하셨다.
    고백한다. 글쓰기 기간 동안 마음만 동동거렸고 여러 가지 핑계를 만들면서 깊은 성찰의 시간을 갖지 않았다. 그동안 문제가 되었고 그래서 살피며 살고 싶은 부분인, 질문 없이 써지는 식상과 재성의 욕망에 대해서 깊게 질문하지 않았다. 보기 싫고 드러내기 싫었던 것 일까. 아니면 ‘느슨함’에서 오는 방종 이였을까. 여기에서도 나에게 약한 부분인 관성과 인성, 다르게 말하면 수렴과 성찰의 힘이 부족함을 알겠다. 그리고 힘든 일은 하기 싫어하고 피하려고 하는 습속도.
    피드백 받은 부분에 대하여 정리해본다.
 

기도에 대하여
    공부와 기도를 하면서 이 행위에 ‘이미지 소비’도 들어가 있다는 생각은 못했었다. 문득 휩쓸리듯, 쫓기듯 하여 지칠 때, 왜 이렇게 집착하고 있나! 라는 생각은 했었고, 하기 싫으면 안 해버리는 ‘느슨한’ 태도가 있긴 했었지만 말이다. 나는 기도를 왜 하는가?
   30대 초반부터 누군가가 권하지도 않았는데 지금도 다니는 절에를 다녔다. 당시 절에서 도보로 가까운 곳에 7년가량 살았던 이유도 있었지만, 어느 날 우연하게 들렸던 법당 안에서의 특별했던 느낌이 동기가 되었던 것도 같다. 그때는 불교가 뭔지도, 기도하는 예법도, 심지어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도 몰랐었다. 그래도 ‘기초교리반’에도 들어가고 한때는 왕복 3시간이 소요되는 야간경전수업도 다녔었다. 그때의 기도는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복신앙이었다. 나에 대한 기도는 ‘멋있는 여자’, ‘향기로운 사람’이 되겠다는 막연한 기도를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손발이 오그라들지만 그때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40대 중반부터 불교 철학을 공부하고 부처님에 대하여 알아가게 되면서 소위 말하는 진리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고 싶은 강한 욕구가 생기게 되었다. 아직은 실천적인 면에서 간극이 크고 자주 잊어버리지만 꾸준하게 공부하면서 부처님께서 알려주신 방향으로 가고자 한다. 그리고 기도라는 것은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은가에 대한 마음의 길을 강화시키는 행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화스님께서는 경전을 몇 시간 독송하는 것보다는 그 시간동안 사소한 것이라도 내가 잘하고 있는 것들과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은지를 종이에 적어서 그것을 반복해서 읽는 것이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것에 효과가 있다고 하셨다. 어떤 마음의 길을 내면서 살아가는 행위가 기도이기에 크게 공감이 되는 말씀이다.
    나의 중심기도는 생각, 행동, 말에 늘 깨어있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내용이다. 그렇게 깨어있어 사소한 것에도 지혜와 자비와 복과 덕으로 연결되는 선택을 하며 살겠노라는. 그리고 그 길로 갈 수 있도록 부처님께서 친구와 스승이 되어달라는.
    30대 기도 속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리라는 사무침이 부족했었다. 그리고 남에게 보이고 싶은 모습을 바랬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는, 나만의 만족이 생기는 기도라는 차이가 있다. 기도는 참회와 성찰과 환희심이 함께하게 된다. 그래서 이 기쁨을 위해 절에를 다니는가? 라고 묻는 다면 부정하지 않겠다. 기도하는 시간은 나와 깊게 만나는 시간이 된다. 부처님을 사이에 두고 내면 깊은 곳의 나와 대화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절에 가서 기도하는 것을 좋아한다. 절이라는 공간은 나와 더 깊고 순수하게 만날 수 있도록 환경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도를 하다보면 어떤 문제에 대한 길을 알게 되기도 하고 신기하게 저절로 풀리기도 한다.
    어느 때에는 사업성취기도, 업장소멸기도, 관재구설소멸기도...을 올리는데 시간과 돈을 충동구매 하는 것처럼도 써보기도 했었다. 원하는 바를 ‘메뉴얼’로 만들어서 의지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 단지 ‘소멸’ 되기만을 바라는 것은 욕심과 무지이며, 그런 것과 만날 인연을 애초에 살피는 것, 그리고 그런 것과 만날 때에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도를 하다보면 욕심으로 하는 기도는 결국 몸과 마음이 편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선생님 말씀처럼 이미지 소비를 위해 절에를 가기도했었다. 어떤 상(象)을 만들어놓고 그 만족감을 위해 기도라는 명목으로 포장한. 그리고 지방에 있는 절을 선호하는 이유 중에는 절에서 묵게 되면 자의반 타의반 새벽예불부터 저녁예불까지 참석하게 된다. 자는 일, 먹는 일을 빼고는 거의 하루를 기도하는 시간에 쓰게 된다. 집에서는 불가능한(집에는 법당도 기도를 주관하는 스님도 없으니) 이런 환경이 내가 욕망하는 것과 강하게 만나게 되고 따라서 만족감도 강하게 느끼게 되어 그 자극을 원했던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지나치면 맹목적인 중독으로 갈 것이다. 그리고 또 그 바닥에는 자연 속에서 지인들과 놀고 싶은, 오가는 길에 맛있는 음식을 먹는 즐거움도 어우러져 있었다. 어느 부분은 탐욕과 즐거움을 얻기 위한 선택으로 절에를 다녔던 부분도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도 절에는 다닐 것이며 기도하는 생활도 꾸준하게 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세심한 질문도 함께 할 것이다. 지금 내가 하려고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정 나를 위하는 것인지.
 
공부에 대하여
    공부를 왜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말한다. 행복하게 살려고 한다고. 그리고 그동안 해본 것 중에 공부가 가장 나를 기쁘게 만들었다고, 시간과 비례하여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기기 때문이라고, 뭘 해도 뒤에는 공허함이 남았지만 공부는 그렇지 않다고.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하려고 한다고. 진심이다. 어느 샌가 이렇게 나는 공부를 좋아하게 되었다. 만나는 책들은 이제야 알게 된 것에 마음이 아플 정도로 감동을 준다. 또한 공부 공동체가 만들어주는, 공부하는 사람들과의 이야기 그리고 그 속에서 배우고 새롭게 알게 되는 나의 모습과 만나는 것이 싫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텍스트를 통해 인간학, 자연학, 사회학...으로 풀어서 설명해주시는 선생님들의 강의를 듣고 있노라면 바로 여기가 천국이구나! 라는 기쁨이 올라오기도 한다.
    공부의 수확 중 가장 소중한 것은 막연하게 갈구했지만 그것이 뭔지 몰랐던, 어떻게 살아야 행복하게 사는 것인지 그리고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를 알게 된 부분이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육바라밀을 행하는 삶, 동양철학을 빌어 말한다면 인, 의, 예, 지, 신을 닦으며 자연처럼 사는 삶이다. 기도 내용과도 연결되는, 내 안에 있는 불성을 발현시키며 살아가고 싶은 삶이다. 내가 이런 것을 열망하게 된 이유는 이런 삶을 살지 못했었고 그래서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기 전에는 나에 대해서 잘 몰랐다.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은 사람인지를. 남을 위하는 마음과, 더불어 살아가는 공감대 의식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가치있는 삶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기꺼이 그렇게 살아가도록 용기를 낼 것이다. 이런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무수한 인연들이 나를 감이당으로 보낸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동안의 공부는 지식을 알려고 했지 깨달음으로 지혜를 만들어가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공부를 좋아했던 이유에는 충만한 삶에 끊임없는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있지만, 죽을 때까지 하고 싶은 일이 생긴 것에 대한 안도감도 있었다. 그래서 공부에 집착하기도 했었고 감이당을 의지처로 삼아 의지하기도 했었다. 어느 부분에서는 박장금 선생님의 말씀처럼 이미지에 대한 소비의 방법으로 공부를 대한 것이리라. 그리고 나는 길진숙 선생님의 말씀처럼 공부를 ‘세게’하지 않았다. 공부 근육이 약한 상태에서 욕심으로 여러 가지를 하느라 밀도 있게 하지 못했던 부분도 있지만, 산만한 일상의 습속이 공부에 성실하지 못했던 이유다. 분명히 공부가 좋은데 이 ‘느슨함’은 무엇인가? 공부를 취미처럼 했던 것일까?
    취미라는 것은 그것으로 직업 같은 무엇을 이루려는 목적이 없고, 시간과 돈이 들어가더라도 기꺼이 하고 싶은 일. 그리고 좋아서 스스로 하는 일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나는 공부가 취미이다. 취미로 하는 공부(?) 길진숙 선생님 말씀처럼 ‘긴장감’이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인가. 앞으로 하고 싶은 공부와 그 방향에 대해서 선생님들과 도반들의 얘기를 들어봐야겠다.
    이번 글쓰기를 하면서 새롭게 발견한 나에 대하여 그리고 선생님들께서 해주신 코멘트를 마음에 품고 질문할 것이다. 이래서 감이당 비전 중에 하나가 ‘글쓰기로 수련하기’인가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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