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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성 2학기 에세이 발표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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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유연한활력 작성일21-07-11 20:21 조회1,123회 댓글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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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목성에서 공부하고 있는 박우경입니다. 2학기는 채운쌤과 함께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과 철학적탐구 등을 공부하였고, 그것을 마무리하는 에세이 주제는 '분별고'였습니다. 에세이를 쓰고, 발표하고, 코멘트를 듣고, 후기를 적어보니 비로소 주제가 명확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제야? 이제라도요...하하하하하

 

발표 전날인 수요일까지 게시판에 모~두 에세이를 올려주셨습니다. 짝짝짝.

 

2021 목성 2학기 에세이 발표 순서는 이렇게 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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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조 발표사진을 미처 찍지 못했습니다. 아쉽지만 기웅쌤과 은이쌤은 다른 사진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각 조별 발표 후 글에 대한 질의응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채운쌤의 코멘트 중에서 공부와 글쓰기, 삶 등에 대한 공통되는 부분들을 다시 듣고 일부를 적습니다.

 

  분별고라는 거 자체가 언어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가 글쓰기를 하는 것이 불교식으로 하면 일종의 관수행, 분석수행이다. 분석 수행은 '이게 뭐냐' 라고 계속 질문해서 파고 들어가는 것이다. 예를들면 '뭐가 있다.' '정말 있냐? 있다고 할 수 있는 거냐'. 그것을 쪼개서 보고 이쪽 저쪽에서 보면서 '있다' 라고 할 수 있는 건지, 있는 게 무엇인지 등으로 계속 질문해 들어가는 것이 분석적 방법이다. 글이라는 게 그런 것이다.

  우리가 어떤 분별이 생긴다는 것은 언어적 규정성을 갖는 것이다. 그냥 사건을 흐지부지하고 지나가면 그건 분별이 안 생긴다. 그냥 지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저건 뭐다' 라고 언어적으로 규정을 한다. '아, 이건 슬픈 사건이다.' '이건 불행한 사건이다.' '저거는 나쁜 놈이다.' 등등 이렇게 규정을 한다. 규정을 한 방식 데로 세계가 나에게 기억으로 저장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문제 삼는 건, 그런 방식으로 규정을 하는 것이 과연 맞는가. 그렇게 무언가를 우리가 규정할 수 있는가. 규정한 채로 세계를 동일시 해도 되는가. 이거를 분석해 보자고 하는 게 글쓰기이다.

  나가르주나가 한 것이 그것이다. 예를들어, '현재가 있다. 비가 온다.' 아무것도 아닌 문장 같은데, 현재가 가면 과거가 된다 이게 맞나, '비가 온다'에서 뭐가 오는거냐. 다 분석을 한다. 비는 뭐냐. 온다는 건 뭐냐. 비가 그 자체로 오는 거냐. 온다는 거는 비하고 상관없이 그 자체로 오는거냐. 우리가 이런 걸 분석해야 된다고 생각 안한다. 그런데 그걸 일일히 분석을 한다. 왜? 우리는 그런 언어를 사용하면서 그 언어에 대응하는 세계가 '있다'고 대응관계를 만들고, 그렇게 대응관계를 만들어서 뭐가 '있는' 것처럼 기억속에 저장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꾸 우리의 일반적인 삶 속에서는 다 '있는' 것처럼 전제되어서 사고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제 그것을 우리가 글을 쓰면서 어떤 경험속에서 '이게 분별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구나~' 라는 것을 분석해 보자는 거였다.

 

  '어떻게 그런 말을!' 같은 말처럼, 우리가 누구의 말을 들을 때 어떤 말 하나가 탁 걸린다. 걸리는 말을 평소에 생각하던 방식으로 의미를 단정(규정)해 버렸구나, 그런 것이 있어야 언어에 대한 글이 된다. 겪은 경험속에서 '아~ 언어가 만들어 내는 고라는 게 이런거구나!' 라는 것을 보여주셔야 된다.

  "규정데로 합시다.", "법데로 합시다." 라는 말을 들으면 발끈하게 된다. 이 말에 대해서 우리가 갖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로부터 "법데로 해"라는 말을 들으면 일단 웬지 기분이 나쁘다. '법데로'라는 말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법데로'라는 말에 내가 부여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맥락하고 무관하게 우리가 말을 해석하는 과정속에서 그 분별이 또 다른 분별을 낳고 이어진다.

 

  에세이를 발표할 때 울컥하는 것은 감정의 정리가 안된 것이다. 감정을 담담하게 한 발짝 넘어간 다음에 쓸 수 있는 게 글이다. 글을 읽으면서 계속 울컥한다는 건 그 감정들을 담담하게 지켜보면서 힘 있게 글을 쓴 게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게 글 속에 드러난다. 자신이 공부한 걸 가지고 자신과 거리를 두고 보려고 하는 힘이 되는 무기로 공부를 사용한 게 아니라 배운 것이 어디로 가버렸다. 언어놀이만 딱 가져와서 자기에게 몰입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감정으로부터 못 벗어난 것이다. 글을 쓰고 자기이야기 하면서 울컥하는 것은 반드시 자기연민, 에고가 들어있다. 불교 공부하면서 그걸 가볍게 하던, 그거하고 싸우던 그 문제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거를 보려고 하지도 않고, 본 과정을 쓴 것도 아니다. 최소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라는 개념으로 뭘 배웠다 라는 거 정도는 있어야 한다. 그냥 말을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것을 언어놀이라고 자의적으로 생각해 버렸다.

  슬픈 생각을 하면 부정적 에너지에 휩싸이게 되는 거고, 기쁜 생각을 하면 긍정적 에너지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에너지라는 것도 계속 자기를 유지하려고 하는 속성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부정적 에너지라는 게 기억속에 한 번 각인이 되면 그 에너지가 자기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 부정적인 방식으로 표출을 한다고 한다. 그게 불교에서 말하는 업이겠죠. 에너지가 자기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를 이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부정적 생각을 주체가 하는 것이 아니다. 부정적 에너지를 분석하다보면 거기에 휘말리지 않게 된다. 그것을 연습하면 된다.

  마음속에서 이런가 저런가 이랬다 저랬다 이게 다 에고의 장난이다. 담담하게 공부하고 있는 것에서 배우고 있는 것들로부터 출발해보자. 괜히 나를 본다고 하고 자기생각에 끌려가지 말고. 자기를 지켜보는 것도 힘이 있어야 지켜보는 거다. 우리가 아이한테 자기를 지켜보라고 한다면 지켜볼 수 있겠나. 자기를 지켜볼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이다. 공부하는 거에서 개념 하나 배우고, 생각 하나 배운거로부터 출발해서 그거를 내 수준에서 완벽하게 정리해내고, 그거에 입각해서 자기 문제 하나를 파고 들어가서 보면 된다. 그런 시도를 안했기에 자신으로부터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다음 에세이 쓸 땐 꼭 내가 배운 것이 무엇인가, 배운 거에 주목하는 순간 자기로부터 한 발짝 거리를 두게 된다.

 

  어떤 것을 이상적 상태로 생각하는지, 내가 상식이라는 말로 규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검토하여야 한다. 성실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성실을 규정하는 것은 어디에서 왔을까. 성실도 사람들이 어떤 맥락에서 사용하는가가 다 다르다. 중용의 키워드 성(성실하다의 성)은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운동 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에서 제일 강조하는 것이 성실성, 쉬지 않고 스팩 쌓는 것 아닌가. 부처님이 강조하는 성실은 뭘까. 성실이라는 말 자체로 우리는 너무나 많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나는 성실을 왜 이런 의미로 규정하고, 아닌 사람들을 참을 수 없게 되었는가를 이야기해 주셔야 한다.

  개념과 어떤 상태를 대응시키고 있는데, 글을 쓰면서 그걸 깨는 것이 핵심이다. 깨지지 않으면 계속 그렇지 않은 게 불편한 것이다. 어떤 언어에 대해서 이런 이미지로 규정해 놓고 있었구나. 그것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맥락들을 보지 못하고 규정하고 있어서 나에게 어떤 식의 번뇌가 계속 자라났는가. 그 번뇌가 어떻게 나를 괴롭히고 사람들을 괴롭혔는가. 예수님, 장자는 어떤가. 

  관념(관념에 부여한 상)을 해체하지 않고 그냥 반성하는 것으로는 다른 영토에 이르지 못한다. 상식을 어떤 행위와 대응시키고 있었는가를 보는 것이 해체하는 것이다.(나는 이렇게 대응시키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대응시키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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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 정혜윤쌤, 이종실쌤, 진희수쌤의 발표 모습입니다.

 

  우리가 보통 글을 쓸 때 문제의식의 문제가 이 글에서의 문제가 아니다. 글을 쓸 때의 문제의식이라는 말은 걸려 넘어지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글에서 문제의식 또는 문제화라는 것은 써야 되는 주제를 가지고 그걸 중심으로 생각을 배치할 수 있는 능력, 이런 게 문제인 것이다.

  감이당에서 말하는 공부가 말하기와 글쓰기인가. 공부가 뭐일까. 말하기와 글쓰기는 생각을 다듬고 나 자신의 비전에 이르는 한 방편인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고 글쓰는 법 자체를 배우는 건 아니다. 공부하는 게 힘들다고 한다면 처음으로 돌아가서 난 왜 공부를 시작했지? 공부가 뭐지? 뭔가 지금처럼은 살기 싫다가 다 동하신거 아닌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위기의식일 수도 있고, 뭔가 그럭저럭 사는 것과는 좀 다르게 살고 싶다는 어떤 욕망일수도 있고, 무수히 많은 다른 일들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다 제끼고 공부로 우리를 이끈 그 힘이 있을거 아닌가. 공부를 하면서 살면 그래도 어떻게는 안 살 것 같다 라고 하는. 그러면 그게 힘들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을 바로 알게 된다. 우리가 사는 게 힘들다는 것을 입버릇처럼 이야기하지만 그 때의 사는 게 힘들다는 것이 먹는게 힘들다, 돈버는 게 힘들다를 의미할 수도 있는데, 삶이라는 건 뭘까, 산다는 것은 뭔가 라고 질문해보면 다른 방식으로 풀린다.

  입버릇처럼 공부가 힘들다고 했던 것은 공부를 말하기나 글쓰기로 환원하고 있었구나. 예를들어, 깨달음을 얻으려고 한다면 선정도 해야되고 탁발도 해야된다. 승가공동체에서 부처님과 제자들이 했던 일거수일투족의 모든 행이 아닌 깨달음이 따로 있을까. 탁발이 그 자체로 깨달음은 아니다. 선정이 그 자체로 깨달음은 아니다. 수행을 쉰다는 게 불가능하다. 수행 자체가 깨달음이니까. 과정과 결과, 비전과 비전에 이르는 길을 뒤집어보는 과정을 겪으면 바로 알게 된다.

  번뇌를 안 겪으면 공부할 수 없다. 번뇌를 겪는 자리마다 질문이 솟아 오르는 것이다. 힘들지 않은 게 있을까. 힘들다는 게 몸이 부숴질 것 같은 것인지, 욕망이 자꾸 일어나는 게 힘든건지. 밥 먹는 것도 힘들지 않나. 힘들다는 주관적인 것 속에 사회적인 뭔가 들어있다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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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조 김석영쌤, 구본숙쌤, 강신우쌤의 발표 모습입니다. 

 

  싫어도 피할 수 없는 환경은 불가피하다. 판을 바꾸고 싶다고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인가. 감정을 일으키는 판을 어떻게 바꾸나. 부처님도 못 바꾼다. 조건을 떠날 수 없다. 어떤 조건에서든 감정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지, 부처님이 판을 바꾸면서 다녔나. 안 보고 살 수는 있지만 마음이 계속 거기에 끄달리는 것은 안보는 게 아닌 것이다. 게임의 룰은 내가 바꾸는 게 아니다. 예를들어 학교를 간다면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언어게임의 룰을 내가 어떻게 바꾸나. 교장도 못 바꾼다.

  스피노자가 감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감정이 생기는 것은 어떤 구체적인 장에서 마주침에서 일어나는 변용이 있다. 변용이라는 말은 영향을 상호 주고 받는 것이다. A라고 하는 사람이 10명의 상대하고 똑같은 방식으로 영향을 주고 받지 않는다. 그래서 A는 첫 번째 사람에게는 좋은 사람일 수 있지만, 같은 행동도 다섯 번째 사람에게는 비호감이 될 수 있다. 상호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주고 받기 때문에 동일한 사람에 대해서도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동일하지 않다. 큰 변용(감정, 관념)이 작은 변용(감정, 관념)을 밀어낸다. 감정이 좋아졌다 싫어졌다, 싫었다가 좋아졌다가 하며 바뀐다. 대부분의 판단과 감정이라는 게 편견에 가득 차 있다. 누군가 계속 싫어하는 감정이 있다는 것은 다른 감정으로 변용이 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까 스님들의 말씀이, 싫은 사람에게서 좋은 점을 찾으라고 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좋은 점이 있다. 싫을수록 그 사람의 좋은 점을 찾아내서 장점을 찬탄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을 하면 그 의식적 노력이 나의 무의식적 판단을 바꾸기도 한다. 그런 수행이 내가 싫은 사람하고 공존할 수 있는 길이다. 내가 판단하는 방식과 다른 사람이 판단하는 방식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는 여러 게임에 참여하는 존재이다. 게임의 룰을 내가 성급하게 바꿀 수 없다.

 

  아이가 아파서 학교 안간다고 하는게, 아이의 언어게임 속에서는 아이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구나. 아프다고 하는 얘기가 아니고, 학교에 안간다고 하는 얘기가 아닐 수 있다. 아파서 학교 가기 싫다는 아이를 이해해 가는 과정을 분석하셔야. 엄마들과 이야기하는 언어게임과 아이와 이야기하는 언어게임은 다르지 않나.

  예민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뭘 겪고 있고 어떻게 변화하느냐를 케취하는 것이다. 예민하다는 것은 타인에 대한 관점이 미세한 것이다.

 

  자유가 왜 나한테 번뇌인지 먼저 글에 나와야 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는 누구나 자유로운 상태로 태어나지 않는다. 아이가 가장 자유로운가. 술 먹고 하고 싶은 이야기 막하는 게 자유인가. 부처님이 자유로운 상태로 태어났나. 누구나 성숙하지 않은 상태로 태어난다. 이성을 통해 관계속에서 자유를 만들어 가면서 살아간다. 자신이 어떤 부분에 대해서 대단히 부자유함을 느낀다는 것인가.

  브루주아들이 말하는 자유, 20대가 말하는 자유, 교사가 말하는 자유, 여성이 말하는 자유, 부처님이 자유를 이야기한다면?, 마틴루터킹이 말하는 자유 등 다 다르다. 누군가에게 구속 받는다고 자유롭지 않은 것이 아니다. 구속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나. 사회, 국가, 가족들에 구속되어 있는 건 누구도 피할 수 없다. 그게 연기조건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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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조 정연희쌤, 이동주쌤, 최희진쌤의 발표 모습입니다~

 

  불교의 논리학, 인도의 논리학을 공부하면 어딘가 귀퉁이에 비트겐슈타인이 있다. 논리적으로 사고한다는 거 이게 왜 중요할까. 하나하나 분석하고 캐묻고 따져들어가는 것이 왜 중요할까. 아사모사한 상태로 깨달음으로 갈 수 있을까.

  공부하는 사람들한테 제일 중요한 보살이 문수보살님 아닙니까. 절집에 가면 문수보살님에게 뭔가 하나 꼭 하고 오셔야 되죠. 지혜를 관장하는 보살님. 지혜가 없으면 자비는 홀로 갈 수 없다고 이야기 하잖아요. 자비가 없어도 지혜가 홀로 갈 수 없지만. 함께 불교 공부하면서 어렵고 익숙하지 않은 길이지만 묻고 따지는 글쓰기의 과정을 끝까지 잘 겪어 내시길 바랍니다. 4학기 베르그손 좀 어려우니 추천책 참고하셔서 대강의 스케치라도 읽고 오시면 사고를 따라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4학기에 한 분도 빠짐없이 뵙기를 바랍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책추천

1. 레이 몽크, 『비트겐슈타인 평전』 (개정판)

2. 황수영, 『베르그손』, 자음과모음

3. 황수영, 『물질과 기억, 시간의 지층을 탐험하는 이미지와 기억의 미학』, 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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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가 끝나고 목성 담임쌤이신 장현숙 선생님께서 방학과 코로나상황 관련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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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라는 조건에서도 조심해가면서 쌤들과 함께 공부하고 밥먹고 산책하고 에세이를 쓸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여기까지 에세이발표 현장의 스케치를 마치겠습니다. 

쌤들 모두 방학 잘 지내시고, 3학기에 뵙겠습니다!


댓글목록

유연한활력님의 댓글

유연한활력 작성일

아사모사를 어사무사 또는 생각이 날 듯 말 듯으로 수정합니다.

구본숙님의 댓글

구본숙 작성일

우경쌤~후기 넘 잘봤습니다.
2학기를 마치고 다시 읽어보니 느낌이 또 다르네요^^

신우님의 댓글

신우 작성일

정성스런 후기 잘 보았습니다 수고많으셨어요!

이동주님의 댓글

이동주 작성일

모두 꽃이다
                                                                         
하늘에 떠 있는 흰 구름도
얼굴 비비며 눈뜨는 아침 햇살도
비 그치고 만나는 상쾌한 새벽
라일락 꽃 향기 실어 나르는 바람도
꽃이다

중풍으로 뒤뚱거리며 산책하는 아저씨 안간힘을 지탱해주는 지팡이도
줄에 묶인 동네 아줌마를 끌고 가는 강아지도
커피숍 모닝 커피를 내리는 알바생도
래깅스만 입은 채 조깅하는 아가씨도
따라가며 열심히 쳐다보는 나도
꽃이다

놀이터 자리잡은 할아버지 장기판도
호스피스 병동의 말기 암 환자도
굽고 휜 다리로 넘어질 듯 뒤뚱뒤뚱 걸어가는 울 엄마 뒷모습도
백일 맞는 외손자 찡그림도
모두 아름다운 꽃이다

슬픔과 기쁨, 사랑 때론 허무로
달라이라마, 비트켄슈타인
고단한 삶이 한고비 넘어가고
다시 맞는 아침

어제도, 오늘도 꽃으로 피어 있고
내일도 꽃으로 피어나길 꿈꾸는데
더이상 바랄 게 무엇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