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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학기 에세이 후기(고미숙샘 튜터- 오후 2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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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탁타처럼 작성일14-12-14 11:00 조회2,6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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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조
<낭송에서 찾은 터- 강희>
-제목과 결론은 낭송인데 본론에 들어간 임꺽정은 연결고리를 찾기 힘들다. 본인이 욕망하는 게 '터'였다. 그래서 갖바치의 '터'를 가지고 왔다. 보통 우리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이미지를 조합하면 글이 된다고 생각한다. 텍스트를 분석하면서 논리분석을 해 나가야 한다. 상생은 갖바치 상극은 간신배인데 원래 상생과 상극은 같이 있는 것이다. 이러면 이분법이다. 사고가 안들어가면 내가 좋아하는 것만 본다. 이것은 공동체에 제일 위험하다. 그래서 지성이 필요하고 이걸 뚫고 가는 힘이 필요하다. 내용을 옮겨 왔지 자기 분석이 없다. 나의 논리가 없는 식의 글쓰기는 나중에 시간의 변화에서 오는 것을 못이긴다. 이런 식으론 나중에 처음으로 싹 돌아간다. 이런 건 이미지로만 의존하는 것이다.
 
<총결산에서 주도권 갖기- 조해숙>
-제목에서 주도권 갖기란 무엇인가의 질문에 외면하지 않기, 정신줄 놓지 않기, 빠뻴은 겪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점을 주도권이라고 생각했다는 해숙샘. 우리가 생각하는 주도권 갖기, 즉 선점과는 다른 생각으로 언어 선택의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밝혔다. 말을 자기 맘대로 만들었고 스토리도 모르겠다. 정리가 안된다. 결산 문제가 이미 머리에 있어 논증해야 될 것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제도 모호하다. 병의 원인, 욕망을 말했으면 끝에 결산되었다는 얘기가 나와야 한다.
 
<내가 읽고 만난 신화- 김해숙>
-제목이 싱겁다. 제목을 처음부터 달고 시작했나? 그렇다. 서론이 왜 이렇게 들어가야 하는지. 내용은 주목할만한데 신화가 왜 부각되어야만 하는지가 아닌데 왜 끌고 갈까? 과잉 방어 아닌가? 신화가 왜 잘 팔리는지 알고 싶은가? 왜 이런 자의식을 가지고 있나? 여성성의 문제와 연결 되어야 하는데, 다 따로 정리되어 있다. 중간에 신화는 재미있는데 서론 본론은 포인트를 잃었다. 전체를 연결하는 고리가 문제다. '질문은 묻는 게 아니라 듣는 것'에서 질문은 왜 뜬금없이 나왔나? 왜 묻는 게 아니고 듣는 것이 나왔나 논증 되어야 한다.
 
<'영원한 남편'에게 필요한 자기 배려- 박성옥>
-텍스트를 잘 따라가긴 했다. 내용 전개는 문장이 깔끔하지만 소제목이 안 맞거나 진부하다. 빠벨이 영원한 남편이 되기 원하진 않았는데 왜 영원한 남편처럼 보였나? 사교계에서만 봐도 알수 있었는데 외면하는데, 진짜 안 보여서가 아니라 안  보고 싶어서였다.  전체 제목도 안 맞는다. 그러면 논리 전개할 때도 걸림돌이 된다. 진흙탕에서 구르는 것을 끝까지 봐야 하는데 다른 곳에서 찾아 덪붙인다. 서두르지 마라. 논리의 근육이 생기면 가능해진다. 소제목 '다시 시도하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제목으로 맞는가? 다시 시도 했다는 게 핵심인가? 빠벨이 동일한 반복에 빠진게 문제지 않는가? 이미 시도했다로 초점이 맞춰줘 있다. '벼랑
 끝까지 가봐야 아는 것'도 빠벨이 벼랑 끝까지 간 것처럼 보인다. 이건 본인의 해석인데 빠벨이 벼랑 끝까지 간다는 건 뭔가? 자기부정이다. 나의 척도가 틀렸구나로 깨닫는 것이다.
 
8조
<신화에서 질문을 배우다- 이성남>
-사유를 안한다는 것은 방어, 거부에도 있다.-강한 거부도 있을 수 있다. 논리가 뒤죽박죽 된 것을 눈치 못챈다. 질문을 배워야 한다. 논리적으로 어떤 구성이 되어있나? 어떻게 꿰야 논리적 연결이 되나? 이 글은 개념층이 다 다르다. 문장은 또박또박하다. <산해경>에선 분별을 벗어나라 같은데 뭘 배웠나?
 
<음허화동의 세계에서 살아가기- 장일영>
-수렴하지 않았어도 잘 산다. 강의록을 인용했는데 꼭 인용해야 아나? 자기 언어로 말해라(습관을 바꿔라) 수렴을 하는 것도 제시가 안 되었는데 뭘 수렴하나? 인용에서 중심적인 문장을 찾았나? 이것으로 벨차니노프를 봤다. 그러나 신체 바꾸기만 가져온 것 같다. 골자를 놓친건 아닌가.
 
<낯선 감각을 찾아서- 이소영>
-머리카락이 빠지는 게 샴푸때문만은 아니지 않는가? 샴푸는 외형인데 나의 신체도 같이 보면서 글을 써야지 그것을 통해서 내 몸을 봐야 되지 않나? 감각을 찾다, 산해경에 또 맞추다. 감각이 서비스인가? 원리를 알고 내가 선택을 하는 공부를 해야한다. 다 논리 결핍증이다. 이것은 채찍이 약이다.
 
<낯선 풍경, 익숙한 풍경, 그 사이의 세계- 이한주>
-신화속에 질문, 답으로 전개 되는데 자연에 대한 겸손으로 결론지었다. 차이의 다양성이 왜 은폐 되었나가 없다. 신화와 풍경의 탄생을 어떻게 연결하지? 일처다부제에 꽂혔다. 자연과 함께 사는데 풍경이 어딨나? 풍경은 내면이 생겨야 거꾸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분리되고 단절되야 고립된 내면이 위안 받고 풍경이 탄생한다.
 
********고샘의 마지막 말씀*******
글쓰기는 돈오점수로 나타나는데 같은 양이 나타나지 않는다.오늘 이만큼 되었으니 내일 또 이만큼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시간성이다. 조금 나졌는데 확인할 징표는 없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건 내가 생각하는 것이 성글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어느 시간성, 그게 운 그럴 때 돈오가 일어난다. 차츰차츰 나아지지 않는다. 전혀 속도가 느껴지지 않는, 시간성을 통과하는 것은 자기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전생에 공덕이 없으면 안된다. 해저 3만리에서도 변화의 시간은 오고 있다.^^
잊고 있었던 돈오점수란 말, '해저 3만리에서 변화의 시간은 오고 있다'는 말씀에 묵직했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 학기마다 있었던 글쓰기를 하면서 변하지 않는 몸과 사유를 발견하고 답답해 했던 차에 시간성의 변화는 또 한번 해봐야겠다는 의지를 준다. 그래 이렇게 이렇게 도반들과 같이 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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