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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기 에세이 발표 후기(3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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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물 작성일17-07-04 22:54 조회1,9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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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춘애 

충분히 소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에세이를 쓰려 하니 머릿속만 복잡했다.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정확하지 못하다 보니 애매모호한 표현들이 많았고 의미를 너무 두려고 하니 자꾸 흐름이 끊어졌다.흐름이 있는 글쓰기를 위해서는 감정에 솔직해져야 한다.

상상하면서 읽고 질문하면서 읽어야 하며감정이입을 하고 대화를 하면서 읽어야 한다.”는 말을 염두에 두고 읽는데 노력을 해야겠다.



윤현정


이번에 글쓰기 목표가 오타 안내고 비문 없는 것이라 했는데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는가? 그렇지만 오타는 있다.^^

다이스케와 롄슈를 보고 이들이 어려운 상황에서 용기를 낸 것이라는 느낌이을 받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롄슈의 용기는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했어야 한다.

다이스케의 용기는 선명하게 보여 준 것 같은데, 롄슈에 대해서 용기가 있다는 점은 어떤 점인지 설명이 필요하다. 불편하고 답답한 감정이지만 이들은 무언가는 하고 있는 것이 전체적인 느낌인 것 같은데 이 전체적인 느낌을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주면 이것보다는 더 논리적인 글을 쓸 수 있을 거 같다.

그런데 자신이 없으니까 이 용기를 팍 밀고 나가서 드러내는 과정이 약한 것이다. 과감하게 나는 롄수나 다이스케가 이런 점에서 용기 있다. 그리고 다이스케와 롄슈가 보여준 용기가 나에게 어떤 마음을 일으키는 가 또 이런 루쉰이나 소세끼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를 결론으로 내도 좋을 것 같다 .


최소임

  길샘은 우선 내가 이번 학기 주제에 충실하지 않는 태도에 대해 말하셨다. 이번 학기 에세이 과제는 루쉰과 소세키의 작품에서 각각 한 인물을 찾아 비교하여 쓰기였다. 근데 나는 소세키의 한 인물로만 에세이를 썼다. 루쉰의 인물이 이해하기 어려워서 그랬다고 했는데, 길샘은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글을 쓰면서 많이 고민하고 책을 한 번 더 읽고 다가가 보려고 하는, 그런 과정에서 뭔가가 찾아진다. 그리고 조금씩 이해되고 정리되는 부분이 있다. 아무것도 쓰지 않으면 어느 부분에서 어려웠는지 혼돈이 일어났는지 전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함께 이야기 나눌 수가 없게 된다. 혼란스럽더라도 썼으면 거기에서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안 쓰면 자신에게 의심만 남긴 채로 끝나버리고 만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어진 과제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에세이에 대한 구체적인 코멘트는 쓰고자 하는 인물에 대한 자신의 해석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아서, 그 인물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를 알 수가 없다. 글이 짜임새가 없어서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급하게 마무리가 되어 글을 읽다가 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이번 에세이는 과제에 충실하지 못한 부분이 나 자신에게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다. 어렵고 잘 안 되니까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는 심정으로 그렇게 한 것인데, 길샘 코멘트를 들으면서 생각해보니 그것은 회피이고 변명에 불과한 것이었다. 정리되지 않는 것, 혼란스러운 것을 남에게 드러냄으로서 겪게 되는 부끄럽고 불편한 상황을 감당하기 싫어서 도망쳤다고 밖에 볼 수 없을 것 같다. 참 속상하다. 그래도 무슨 다른 방법이 있겠는가. 그런 나를 인정하고 다시 시작해보는 거 말고. 이번 에세이에서 큰 수확이라면 에세이는 쓰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발표하고 학인들과 의견을 주고받고 샘의 코멘트를 듣는 이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 번 가슴 깊이 새기게 되었다는 것.  


김나영

작품을 마음대로 보고 있다. 『광인일기』를 오독했다. 이 글은 자기 문제가 먼저고, 작품을 자기 문제 속으로 재단했다. 이거야말로 인물을 자기화하는 방식이다. 네가 감정이입을 해야 하는데, 결국 네 문제도 사라져 버리고 『광인일기』의 문제의식도 사라져 버렸다. 『광인일기』에서의 광인은 남들이 못 보는 걸 보는 자라서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면 역설적으로, 사람들이 비정상이라고 하는 이 사람은 비정상인가? 정상이라고 하는 이 사람들은 정상인 건가? 이것이 이 작품이 보여주는 바인데, 완전히 거꾸로 해석을 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남을 잡아먹을 생각을 하면서 웃고 행복해 하며 살벌하게 살고 있고, 광인은 자신이 홀로 깨어난 자라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결국은 나도 또한 식인의 역사에 동참한 자라는 것을 깨닫는다. 광인이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의 깨우침인 것이다. 나는 식인의 역사로부터 벗어난 자가 아니고, 나도 이 안에서 같은 짓을 똑같이 저지르고 있었던 자라는 것. 밖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왜 그 문턱만 넘으면 되는데 못 넘느냐고 하던 자가, 그러면 함께 어떻게 이 식인이라는 문제를 넘어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자가 되는 것이 광인이다. 광인의 고립은 깨우친 자의 고독이다. 내가 적극적으로 만드는 고독이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기 때문에.

광인이 질문을 안 해서 이렇게 된 건가? 왜 사람을 잡아먹어? 라고 말하잖아. 식인이 상징만인 것은 아니다. 루쉰은 이런 일이 20세기 초반 중국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아무도 믿지 않을 거라고 말했었다. 나중 사람들은 이 일을 허구라고 생각할 거라고. 식인은 단순한 비유인 것이 아니다. 잡아먹히고 잡아먹는 이 악랄한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구경꾼이 되지 않고 깨어있는 자가 될 것인가? 이것은 스스로의 자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민중도 믿을 수가 없다. 묻지 않은 것이 아니라, 물었는데 결과가 이런 것이다.

『그 후』의 다이스케도 묻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자신은 가는 길이 다르기 때문에, 자신은 자기의 길을 가겠다고 한 것이다. 말했지만 안 된다고 자각했기 때문에 자기 길을 간 게 아닌가? 나는 너희랑 똑같은 길을 갈 수 없어 라고 저항을 했다. 미치요가 얼마나 목이 말랐으면 수반에 있던 물을 마셨을까? 우리가 모든 걸 다 물어봐야 하나? 어떤 걸 질문할까가 되게 중요하다. 다이스케는 왜 나는 아버지 돈으로 사는가를 질문 했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자연의 아이가 될 것인가, 의지의 아이가 될 것인가 라는 질문을 계속 던졌다. 다이스케는 질문을 계속 했다. 어떤 질문을 해야 하는지는 너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광인이나 다이스케는 모두 센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나는 무엇을 망설이고 있고, 어떤 것에 무지한 상태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어디서 내가 비겁하게 어정쩡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그런데 그런 건 직면하지 않고, 작품을 자기화해버려서 주인공들에게 다른 형태의 캐릭터들을 씌워버렸다.

너가 네 자신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지 않는지를 봐라. 작품 분석도 철저하게 하지 않았고, 광인은 뭔지, 다이스케는 뭔지 철저하게 질문을 했어야 한. 타인을 신뢰하지 못하는 게 너의 문제라면, 나는 타인의 어떤 부분을 신뢰하지 못하는가를 봐야 한다. 신뢰할 수 없는 건 신뢰할 수 없는 거다. 다이스케가 아버지나 형을 신뢰해야 하는 건가? 무조건 사람들을 다 신뢰해야 하는가? 너에게 타인을 신뢰한다는 건 어떤 것이고, 거기에서 어떤 자격지심이 일어나는지를 보는 게 중요할 것 같다. 이 작품 속의 인물들은 그것을 충분히 보고 있는 존재들이다.

이들이 어디서부터 자기 출발을 하고 있는가 하는 이 지점을 확실하게 분석을 해야, 네가 어디서 벗어나야 할까가 확실하게 보일 것 같다.

진짜 묻는다는 것은 뭘까? 질문은 자기에게 던져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어디에서 비겁하게 굴고 있고, 어디를 가리고 있는가를 보면서 질문해야 한다. 내가 뭔가를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면, 뭐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건지, 저 말이 나에게 감정을 일으킨다면 어떤 말들이 나에게 감정을 일으키지? 이런 걸 물어야 한다. 광인은 ‘남만 잘못 됐어’ 라고 말했는데, 자기도 잘못한 존재라는 것을 본다. 광인은 자기를 보는 자다. 다이스케도 결국 사건으로 자기를 보게 된다. 남을 보는 게 아니다. 이 작품들을 통해서 나의 어떤 면이 보이는가를 투철하게 해부해야 한다. 작품의 맥락을 따져가면서 캐릭터 분석을 해야 한다.



양서영


제목을 보면 '자기본위'의 뜻이 '다른 사람을 위해 울어주는 삶'이 되어버린다. 왜 그렇게 되는지 설명이 필요하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다른 학인들도 지적해 주셨는데 왜 지적을 받아야만 깨달음이 오는지^^.. 정말 저렇게 되어버리면 완전히 잘못 쓴 글이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글을 읽어보면 왜 다이스케와 렌슈를 비교한 것인지 의아하다. 다이스케에 대해서는 분석을 한듯 만듯 하고 렌슈는 타인본위의 삶이라고 논리 전개를 했는데 제목과 논리가 연결이 안 된다.

자기본위에 대해서는 '쓸쓸하다'는 부분이 맘에 안 들었던 것 같은데 왜 자기본위에 '쓸쓸함'이 따라오는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하고 생각해봤다면 설명이 더 필요하다. 

남을 위해 울어준다는 것도 미봉책에 불과해보인다.

다이스케는 쓸쓸했나? 생각해보면 쓸쓸하다고 느낀 것 같지는 않다. 오독한 것 같다. 그는 쓸쓸함이 아니라 권태를 느낀 순간 미치요를 만났다. 쓸쓸함이라고 해석한 것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미치요를 선택하고도 남는 쓸쓸함이 있다면 그게 무엇인지 설명해줘야 한다.

자기본위는 본질적으로 고독한 것이다. 그 고독은 단독자의 고독감이다. 소세키가 말하는 고독과 나의 표상이 같은 것인지 따졌어야 했는데 글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롄수가 타인본위의 삶은 선택한 것이라고 했는데 롄수의 복수는 용기였다. 고독이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롄수와 다이스케의 어떤 점을 비교하는가가 나와야 하는데 정리가 안 되어서 혼란스럽다. 그래서 왜 이 둘을 비교한 것인지 묻게 되는 것. 더 많은 해명과 설명이 필요한 글, 혼돈스럽고 산만한 글이 되어버렸다. 

(에세이 발표를 하고 학인들과 길샘의 코멘트를 들으면서 역시 글은 정직하다는 생각을 했다. ㅠㅠ 이번 학기 에세이에 많은 고민과 시간을 쏟아붓지 않았다. 닥치듯이 글을 썼다. 그러면서도 뭔가 논리적으로 해결을 했다는 생각이 있어서 뿌듯함이 있었는데 코멘트를 들으니 하나하나 다 와닿는 지적들이었다. 항상 에세이 발표를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발표를 하기 직전까지도 내 눈에는 글의 결점들이 전혀 보이지가 않는다. 사람들과 나누지 않으면 얼마나 내가 혼자만의 생각에 갇히기 쉬울까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쓰고 나누는 시간이 정말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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