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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수성 1학기 4주차 인문학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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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영숙 작성일18-03-18 10:51 조회1,702회 댓글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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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의 '들풀'에 대하여



 수성 1학기 4주차 수업이 끝났다. 오전엔 루쉰, 아, 루쉰이여!!

 ‘외침’, ‘방황’에 이어 ‘들풀’이 소개되는 시간이다. 루쉰 스스로 산문시라 한 이 24편의 시들! 문탁샘의 말씀대로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아주 밀착되어 있는 잡문이고, 당시 검열이 심해지면서 작가 나름의 글쓰기 전략이 담겨 있으므로, 이를 이해하고 해석하기는 어렵다고 한다. 몇 번을 읽어봐도 역시 난해하였므로 주로 문탁샘의 강의내용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이해하고자 한다. 


 우리가 루쉰을 읽는 것은, 또 읽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순한 독서를 넘어서는 어떤 실존적 울림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메시지가 언어적으로 명료하게 정리되지 않더라도 그의 글은 우리에게 어떤 울림이나 떨림을 주며, 이것이 나 자신의 삶을 다시 읽는 행위가 되어야 하므로 아직도 루쉰이라고 말 할 수 밖에 없다.


 루쉰의 베이징 시기는 1912년부터 14년간 지속된다. 당시 중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정치적 혁명이 민중들에게 더 나은 삶을 가져다주지 못하자, 중국 민중의 정신적 계몽을 위해 문학혁명의 필요성을 느끼고 루쉰은 적막함(분열, 결별, 질병)속에서 당시 자신의 글들을 쓴다. 1925년은 베이징 후반기 시기로 ‘방황’, ‘들풀’, ‘화개집’ 등 각각 서로 다른 종류의 글들을 가장 많이 쓴 시기이다. 소설 ‘방황’이 당시의 현실적 시대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겉으로 드러낸 겉감이라면, ‘들풀’은 아직 언어화 되지 않은 작가의 상념, 무의식의 세계를 표현한 안감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시간에는 미리 읽어본 ‘들풀’ 작품에 대한 감상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는데, 어느 학인은 읽으면서도 연결하기 어려운 글(‘눈’)에 대해서, 어떤 학인은 자신에게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글(‘길손’)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나 역시, ‘희망’과 ‘아름다운 이야기’편을 엮어 이야기하였다. 현실의 공허함을 때로는 자기기만적 희망으로 메우려했던 점, ‘희망과 절망의 허망함’을 이야기하지만, 작가는 ‘아름다운 이야기’에 나오는 쪽배를 타고 지난 아름다운 기억들을 떠올리면서, 미래에 대한 간절한 희망을 생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이야기 했다가 해석의 오류 지적을 받았다. “글에 있어서 본인이 해석하고 싶은 대로 해석하지 말고 루쉰의 텍스트에 기반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글쓰기 공부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는데, “살아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수 만가지의 상황, 사건, 감정들에 주목하고 그것들을 해석할 수 있는 내 언어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사는 과정에서 내게 일어나는 수많은 감정들, 조건들, 거기서 내 마음을 저해하는, 괴로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치밀하고도 철저하게 들여다보고 그런 감정들이 생겨나는 것에 대해 성찰해야 되며, 그때의 느낌들이 구체적인 글로 나와야 된다”고 하셨다. 또, 글이 “결론으로 바로 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즉, “루쉰을 읽는다는 것이 그 사회에 주는 메시지 때문에 읽는 거라면 그 사회가 지나가면 루쉰은 읽혀지지 않는다. 루쉰은 사는 동안에 끊임없이 사회와 대결하고 고민하고 배신당하고 사랑하고... 등의 치열한 고뇌를 글에 담았고, 이것이 우리에게 울림을 준다”라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간 살면서 몇 개의 걸림들이 떠오르며 나의 무지를 깨닫는 시간이 되었다.)


‘들풀’의 의미에 주목하는 몇 개의 시들을 읽어 보았다.

 ‘그림자의 고별’

-- 동무, 나는 그대를 따르고 싶지 않소. 나는 머무르지 않으려오. 나는 원치 않소. 오호오호. 나는 원치 않소. 나는 차라리 무지에서 방황하려하오. 내 한낱 그림자에 지나지 않소만, 그대를 떠나 암흑 속에 가라앉으려 하오. 암흑은 나를 삼킬 것이나, 광명, 역시 나를 사라지게 할 것이오. 그러나 나는 밝음과 어둠사이에서 방황하고 싶지 않소. 나는 차라리 암흑 속에 가라앉겠소.(---) 

‘복수’

--그 두 사람은 온몸을 발가벗은 채 비수를 들고 광막한 광야에 마주 섰다.(--) 행인들이 사방에서 달려온다.(--) 그 둘은 그렇게 한없이 서 있다. 통통하던 몸집이 메말랐다.(--) 마침내 서로들 마주 보더니 서서히 흩어졌다. 메마른 나머지 흥미마저 잃었다. 그리하여 광막한 광야만 남았다.(--) 죽은사람 같은 눈빛으로 행인들의 메마름을 감상한다.(--) 

‘빗돌글’

나는 내가 빗돌을 바라서서 거기 새긴 글을 읽는 꿈을 꾸었다.(--) “심장을 후벼 스스로 먹다” (--)나는 떠나려고 했다. 그러나 무덤속에서 일어나 앉은 주검이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말했다. “내가 티끌로 될 때에, 그대는 나의 미소를 볼 것이다.”

‘이러한 전사’

(--) 그는 맨몸으로 야만인이 쓰는 투창만 들고 있다. (--) 자선가, 학자-- 머리 아래 각자의 외투를 걸쳤다.(--) 그는 엷게 웃으면서 한쪽으로 치우치게 창을 던졌고, 창은 심장을 명중하였다. -그렇지만 넘어진건 외투뿐이었다.(--) 그는 마침내 무물의 진속에서 늙고, 죽었다. 그는 결국 전사가 못되었다. (--) 그러나 그는 투창을 들었다.


 루쉰은 ‘들풀’에서 당시 ‘피의 살육’이후 진정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포함하여 모두가 몰락하기를 바란다. 계몽가로서 민중을 이끄는데 앞장서면서도 지배자로서가 아니라 자신도 구시대와 함께 몰락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중들의 삶속에 직접 걸어 들어가, 함께 아파하고 서로 사랑하며 어디에도 걸터 쉬지 않는 용감하고 두려움을 없는 삶을 살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을 살다가 갔다. 자신의 영혼과 육신의 있는 힘을 다해 처절하게 살았던 루쉰, 그의 글을 들여다보니 새롭게 울컥하는 마음이 든다.


 (Tip) 루쉰 전집 중 서문만을 따로 떼어 한꺼번에 읽어 보는 것도 루쉰을 이해하는 재밌는 방법이라는 말씀도 잊지 않는다.



댓글목록

한성준님의 댓글

한성준 작성일

다행히 밤 늦은 시간에 갑자기 댓글다는게 생각났네요 ㅎㅎ

저는 이번 수업시간에 루쉰에 관한 내용들도 좋았지만 "루쉰의 결론이 아니라 루쉰이 그 결론으로 가기 까지의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문탁샘의 말이 가장 와닿았어요.

그 말을 듣고 루쉰의 텍스를 읽으니 "희망은 부질없다. 절망이 그러하듯이"라고 말하며 힘든 사건들과 고뇌 속에서 희망과 절망의 사이를 줄타기 하듯 걸어가던 루쉰의 삶이 조금더 구체적으로 다가왔어요.
그러면서 '내가 과연 루쉰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정말 저렇게 루쉰처럼 살아가야 하는가?'하는 의문이 같이 들었답니다 ㅎㅎ

그 답을 찾기위해서는 조금더 루쉰의 삶을 들여다 보아야 할 것 같아요~

문릿님의 댓글

문릿 작성일

루쉰이 왜 루쉰인가, <들풀>은 왜 자꾸 회자되나, 그리고 문탁은 왜 문탁인가 하는 걸 한 번에 느낄 수 있었던 강의였죠? ^^ 우리는 왜 그리고 어떻게 이런 좋은 강의들만 구성하는가?? 이런 니체적 물음을 패러디해보게 되었던 한 주일! 수욜에 뵙죠!
댓글 안달고 계신분들은 숙제 안 한 사람으로 분류할까요, 저항세력으로 분류할까요?

임영희님의 댓글

임영희 작성일

저에게는 루쉰이 참 어렵게 느껴집니다. 루쉰이 맨 몸으로 투창을 끊임없이 들었던 의지와 열정이 어느 정도였을지 체감이 안되는 것도 그렇고, 그가 싸웠던 적이 명확한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모습을 바꾸는 형상이 없는 것들이었다는 것? 끝나지 않는 그 싸움임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투창을 들었던 루쉰이.... 제 입장에서는 참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나는 무언가를 향해 그렇게 치열하게 싸워본 적이 있는가? 싸우기도 전에 싸움이 겁나서 꼬리 내리며 도망쳐왔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나에게 혁명이란 무엇일까? ..... 두서없는 생각들이 꼬리를 무네요.

울랄라님의 댓글

울랄라 작성일

정정욱입니다^^
문탁샘의 강의를 처음 수강했는데 제겐 명강의 였습니다.
루쉰의 삶을 정리해 주시고(수업시간에 시대사건들과 맞추어보느라 ,또수업 속도따라 필기하느라
무지 바쁘고 정신 없었네요^^)
루쉰의 삶을 읽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더군요.
"글에 있어서 본인이 해석하고 싶은 대로 해석하지 말고,
 루쉰의 텍스트에 기반해서 읽어야 한다."
"결론으로 바로 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막연하기만 하던 '들풀'산문시에 대한 해석도 조금 이해가 가더군요.
타성에 젖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깨어있으려 하는 절실함이 느껴졌습니다.
제 삶도 그래야 겠지요.^^
 제노트에 정리안되어 있던 것을 너무 정리 잘 해 주셨네요~

김은순,수목화님의 댓글

김은순,수목화 작성일

지난주 문탁 선생님 수업 마치고 나서 녹음할걸~~~ 했는데 이렇게 정리가 잘 된 후기 글을 보니 반갑네요.^^
댓글을 쓰는 지금  수업시간의 느낌이 살아나는 걸 보니 들풀이 강렬하긴 한가 봐요.
루쉰 글을 읽으면 뭔가 답답하게 남아있는 기분이 있는데, 이런 기분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일부분인 것 같아요.

"그가 말하는 메시지가 언어적으로 명료하게 정리되지 않더라도 그의 글은 우리에게 어떤 울림이나 떨림을 주며, 이것이 나 자신의 삶을 다시 읽는 행위가 되어야 하므로 아직도 루쉰이라고 말 할 수 밖에 없다."

그동안 각 공동체 선생님들이 루쉰의 글을 꾸준하게 읽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이은아님의 댓글

이은아 작성일

긴 글 잘 읽었습니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수 만가지의 상황, 사건, 감정들에 주목하고 그것들을 해석할 수 있는 내 언어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사는 과정에서 내게 일어나는 수많은 감정들, 조건들, 거기서 내 마음을 저해하는, 괴로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치밀하고도 철저하게 들여다보고 그런 감정들이 생겨나는 것에 대해 성찰해야 되며, 그때의 느낌들이 구체적인 글로 나와야 된다. => 격하게 공감합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 내게 다가온 사건과 감정들을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인 뒤 내 언어로 표현해 낼 수 있는 그날까지 정진해야겠어요.  요새 남편과 아이의 진로, 우리의 노후 그에따른  거주문제등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는데, 사회적으로 일반적으로 주어진 대로 (애는 대치동 뺑뺑이 돌려서 특목고 보내고 좋은대학, 좋은 직장갖는 것) 해야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 부부가 보는 미래는 어떤 모습이고 아이가 자기만의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할 것인가등을 고민하고 있어요. 대중매체, 옆사람 영향 바로 받는, 생각짧고 깊이없는 아줌마로서 치열한 자기 성찰을 해야겠구나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