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수성 1학기 6주차 인문학 후기 > 수요 감이당 대중지성

수요 감이당 대중지성

홈 > Tg스쿨 > 수요 감이당 대중지성

서브배너_수성.png

2018 수성 1학기 6주차 인문학 후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은아 작성일18-03-30 11:56 조회1,576회 댓글10건

본문

2018/03/28

조화석습


루쉰이 어렵다고요??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부족, 루쉰의 결기등의 이유로 루쉰에 대한 이해를 못한다고 숨어버리지 말자.

루쉰을 알기 위해 주석만 읽다가 끝나버리지 말고

그냥 자기식으로 해석하며 루쉰에 대해 육박해보자. (비록 오독일지라도....)




조화 석습은 겉모양은 옛이야기의 형식을 취하기에 말랑말랑한 것을 기대하게 되지만 속에 담은 내용은 아련한 추억, 과거와의 타협이 아니 현실에 대한 응전이다. 이 글을 쓰던 시기는 미학성이 높은 소설에서 완성도와 미학성은 떨어지지만 현장성과 속도감이 중요해지는 잡문으로  변화하는 시기이다.



루쉰은 문학의 경계를 넘어선 글쓰기로 중국의 근대화를 이루고자 했다. 루쉰이 창조점이 되어 새로운 글쓰기, 문제 제기를 할 수 있게되었다. 그리하여 중국만의 근대적인 새로운 문학을 만들어 냈다.


예를 들면, 일본의 어느 원숭이 한마리가 우연히 바닷물에 흙묻은 고구마를 씻어먹으니 더 맛있어지고 이를 다른 원숭이들이 따라하게 되어 어느 순간 원순이들이 죄 고구마를 씻어 먹게되었다. 루쉰이 바로 그 처음 바닷물에 고구마를 씻어먹은 원숭이 역할을 한 것은 아닐까요?


루쉰은 자신을 포함한 구시대의 해체와 몰락을 통해 새 시대의 창조를 위한 밑거룸이 되어주고자 했다.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아침 꽃을 스무살 시절의 첫사랑이라 생각하고  한참 세월이 흘러 (저녁이 되었을때), 첫사랑을 만난 경우가 아닐까 생각해봤다. 첫사랑은 이미 중년이 되었고, 스무살의 나도 중년이 되었기에 첫사랑도 변했고, 나도 변했다. 그렇기에 첫사랑은 그냥 스무살 시절의 그 첫사랑으로 바라봐야 한다. 이십대의 나와 중년의 나는 다르기에....


'루쉰, 길없는 대지'에서 조화석습 편을 문성환쌤이 쓰셔서 몇번 읽으면서 나름대로 이해해봤습니다. 잘 못 이해한 것이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댓글목록

울랄라님의 댓글

울랄라 작성일

내가 기억하는 과거가 어쩌면 왜곡될 것일수 있음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과거를 기억하면서 현재로 재해석해 보려는 루쉰의 삶에 대한 철저함을 배우고 싶어졌습니다.
매일의 삶이 혁명이어야 함을 배우고 있습니다.

임영희님의 댓글

임영희 작성일

에세이 쓸 기간이 되서 그런지 문쌤의 '꼭 루쉰의 텍스트 중에서 구체성을 갖는 부분을 붙잡아봐라' 라는 말을 후기로 남기고 싶네요. 그런데 자꾸만 구체적인 것보다 두리뭉실한 이미지로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수업시간에도 물어봤던 건데, 루쉰이 지금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그런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네요. ㅎㅎ

한성준님의 댓글

한성준 작성일

저도 문샘의 책읽기에 대한 이야기가 좋았어요.

무언가를 읽을 때 이해하지 못하면 지식과 정보가 부족해서라고 생각해서
나중에 다른걸 더 공부하고 나서 이걸 읽어야지 하면서 텍스트와 직접적으로 만나는 걸 유예하게 되는 경우가 있더라구요.

그냥 자기 깜냥만큼 읽으면 되는데 깜냥이 부족한게 들킬까봐 무서워서 그런지 잘 못하는 것 같아요.

읽기 뿐만 아니라 삶도 그렇게 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갑자기 문득 드네요 ㅎㅎ


저는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에서 "왜 아침꽃을 꼭 저녁에 주어야 했을까?"라는 질문이 들었어요.
더 이쁜 아침꽃을 꺽어서 주었더라면 좋았을텐데... 하는 ㅎㅎ

그런데 생각해보니 아침 꽃은 저녁에 주울 수 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더라구요.
아침 꽃의 아름다움은 아침이 아니라 그게 다 지고 나서 저녁에나 깨닫게 되는건 아닐까 하구요.

우리가 일상을 살아갈 때 그 당시에는 그런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또는 의미가 있는 것인지 알 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작은 소소한 일상이든 삶의 중대한 사건이든 돌아보았을 때 그것의 소중함과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처럼...

한정미님의 댓글

한정미 작성일

"나는 나고 루쉰은 루쉰이다."
루쉰의 삶은 저에겐 너무 .......
조화석습
저는 봉오리째 뚝뚝 떨어지는 동백꽃이 생각 날까요?
아침엔 선홍색 동백꽃이 저녁에 보니 거뭇거뭇 시든입사귀
새틋한 겨울바람 속에서 피어올라 따뜻한  봄바람 부니
기다렸다는듯 뚝뚝 떨어지는 동백꽃
시간은 흐르고...
아침에 나는 저녁에도 같은 나 일수 없기에
시든 꽃봉오리 들고 걸어갑니다.

참 뜬금없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트맘님의 댓글

아트맘 작성일

멋진 후기글을 쓰셨습니다요~~ ㅎ

* 아침꽃 저녁에 줍다 *  정말 기가막힌 제목입니다.
뭔가 은유적이면서도 그 이유가 궁금해지는...
저는 또 루쉰을 의심하지요.
맞아요, "의심" . 
끊임없이 편하지않은 그의 글에 지쳐가면서도 조금씩 "역쉬, 그렇지..."
루쉰이니까...  하고 있습니다.

그의 글에는 카메라 엥글이 여러개 있습니다.
어렸을 추억속의 현장에서 꼬마 루쉰이 직접 찍는 엥글1;
이후 동네사람1,2가 하는 얘기를 찍는 엥글2,
현재의 루쉰선생이 직접 엥글1,2를 찍으며 나레이션을 넣고있다.

김은순,목화님의 댓글

김은순,목화 작성일

아침 꽃(과거)을 저녁(현재)에 주울 때, 범할 수 있는 오류는 내 기준에서 알고 있는 것, 믿고 싶은 것만을 가져오는 착각과 환상인듯합니다.
생각해보니 지금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나의 과거도  기억하고 싶은것만을 기억 하는, 사실 그대로가 아닌 조작된 기억,감정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최영숙님의 댓글

최영숙 작성일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아침꽃은 아침꽃으로 인식해야지
지금 바라볼 때 일어나는 연민이나 회한에 사로 잡힌
글쓰기를 하지 않았다는 루쉰.

내가 옛 일을 생각할 때는, 때론 그리움에, 때론 부끄러움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차라리 덮어 버리곤 했었지.....

루쉰의 진지하면서도 유머스러운 이 옛글을 통해,
현재 도주자로서의 불안한 현실 속에서도
담백하게 과거를 회상하는 루쉰의 여유로움이 놀랍다.
마치 휘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 비틀거리고 온몸이 다 젖어도
그저 앞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자를 보는 듯이.....

오켜니님의 댓글

오켜니 작성일

옛기억을 늘 아쉬움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땐 왜 그걸 몰랐지, 부끄러워 지워 버리고 싶다든지, 현재의 내가 과거의 사건을 늘 재단하고 판단했습니다.
1%의 후회도 허용치 않는 루쉰의 '미련없음'이 인상적입니다.

레옹님의 댓글

레옹 작성일

18328 루쉰 조화석습 읽고
망위안에 연재된 ‘옛일을 다시 들추기’ 라는 제목을 '아침꽃 저녁에 줍다’로 고쳤다. 아침 이슬을 함초로히 머금은 꽃을 꺾는다면 색깔도 향기도 더 좋을 터이나, 나는 그렇게 할수가 없다. 현재 내 마음속의 괴이하고 난잡한 생각을 괴이하고 난잡한 글로 재현할수 도 없다. 혹시 훗날에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노라면 내 눈앞에 잠깐 번뜩일지도 모를 일이지만.

아침에 핀 꽃은 지난 과거이다.
그걸 현재로 가져오는 순간 과거성를 잃고 다른 사건이 된다.
아침꽃이 현재의  나를 속일수 있기에 그렇게 할수가 없다.
아침에 바라본 희망은 그냥 ‘희망’뿐이고 그래서 절망 뿐이다.
희망은 허망하다. 절망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현재의 상태의 어려움을
자꾸 과거로 돌아가서,
영어의 가정법을 만들면서, 만약 ~였다면,
핑계를 대고, 숨게 되고, 물러서게 된다.
괜히 딴 곳을 보고, 잘 모르는 척 하고, 허공을 보며 생각 하는 척 한다.
아큐의 정신승리법으로. 나는 잘났다고.

루쉰이 글쓰기를 통해 그 시대와 어떻게 사람을 만나고, 어떻게 그 시대를 이해하려고 한것처럼,
우리도 현재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길지를 고민하게 된다.

중국의 근대화를
루쉰의 눈을 통해  보고
우리의 근대화를 보고
그럼 현재의 우리 시대를 바라볼수 있는 힘이 생길 것이다.

그래 우리는 이미 있다고 생각한 ‘서양것’을 그냥 답습한 결과인 현재에서 시작한다.
그 이상에 있는, 이미 있는게 아닌 것을 바라 볼 힘을 얻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하니씩 하나씩 만들어 간다.

조 영남님의 댓글

조 영남 작성일

선생님은  말하시지~~ " 자기식으로 읽어보라고"
그 말이 저에게는  더 어렵다는요.
내 식이 없는 건지, 현실에 발 붙이고 살고 있지 않는 건지, 답만 있는 교육과 책 읽기에 익숙해서인지.
이 불편함이 편안함이 되는 날이 올런지.
 1925년 45세 이후로의 삶을  훨씬 더 스펙터클 살아 낸 루쉰.
중년 어린이인 나는 어디로 가야 한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