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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1학기 루쉰 글쓰기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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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레옹 작성일18-04-24 16:33 조회1,377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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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 로드스콜라 루쉰 글쓰기/임경원

2018 4 24

후지노 선생의 사진

석별의

 Auld Lang Syne (스코틀랜드 민요)

오랫동안 사귀었던 정든 친구여

작별이란 말인가 가야만 하는가

어디간 잊으리오 두터운 우리정

다시 만날 그날 위해 노래를 부르자


1936 루쉰의 죽음이 일본에 보도되자, 후지노 선생은 소식을 전해 듣고 말을 전한다.

사진을 방에 걸어 두었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죽을 때까지 소식을 알고 싶어 했던 것이라면 소식을 전했으면 무척 기뻐했을 텐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일본 논문『魯迅と仙台』>루쉰은 후지노 선생의 사진을 평생 그의 책상위에 간직해 온다. 무엇 때문에 루쉰은 그의 서재에 사진을 간직해 것일까? 그리고 후지노 선생의 사진은 루쉰에게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나

도쿄도 그저 그런곳이었다. 우에노 공원에벚꽃이 만발할 ’, 밑에는청나라 유학생속성반 학생들이 무리지어 있었다…  다른 곳으로 보는 것이 어떨까?” <「후지노 선생」, 『아침꽃저녁에줍다』206>

1904 4 30 루쉰은 도쿄를 떠나 센다이로 간다, 그때 기차 안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번역된 역사책으로부터 일본의 유신이 대부분 서양의학에서 발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문, 『외침』 22그렇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 과정을 밟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루쉰은 일본에서 무언가를 찾으려고 했다. 그리고 루쉰은 알고 있었다, 일본의 근대화가 네덜란드로부터 서양의학을 받아들이고 거기서부터 서양의 과학적 합리성을 배웠다고. 1774 일본 최초로 서양 해부학 번역서해체신서' 일본인 의사 스기타 겐파쿠가 번역 출간한 이후부터 일본은 서양의 과학을 받아들이고 서양 학문의 꽃을 피었다는 것을.<신상목,『학교에서 가르쳐주지않는 일본사』129>

1904 9 루쉰은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 정식 입학하고, 1학년 수업 해부학을 듣게 되는데, 거기에서 운명의 후지노 선생을 만나게 된다. 후지노 선생도 바로 교수로 승진하여 수업으로 해부학을 맡고 강의에 일본 해부학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유명한 [해체신서] 다른크고 작은 책들 가져온다.<다자이 오사무,『석별』문학동네 242> 해부학 강의에서 루쉰은 후지노 선생의 열의와 미래의 희망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후지노 선생은 간사이 출신으로느릿느릿하고 억양이 심한 사투리 써서 일부 학생들의 비웃음을 산다. 당시 교토 표준어를 안쓰는 사람은 팔렸던 같다. 그러나 루쉰은 자기도 청나라-일본어 사투리를 쓰고 있어서 느릿느릿한사투리에 정감을 느낀다. 후지노 선생은 학교에 청나라 유학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일주일 루쉰을 불러 그의 노트를 가져오게 한다.          

강의를 학생은 받아쓸 만하오? 그는 이렇게 물었다.

어느 정도는 받아쓸 있습니다.”

가져오세요, 내가  봅시다!” <「후지노 선생」,『아침꽃저녁에줍다』 209>

루쉰은 해부학 노트를 돌려 받아 펼쳐보고몹시 놀랐고 동시에 불안하면서 감격했다. 일본과 중국은 당시에는 같은 한자 문화권이라서, 해부학 노트에 한자는 첨삭되어 있었고, 일본어도 문법 오류는 고쳐져 있었고, 독일어도 고쳐져 있었다. 일년 동안 계속되는 해부학 강의는 주말 동안에 후지노 선생은 정성을 다해 노트를 고치고 첨삭했고그림까지 일일이 수정을 했다. 노트를 베이징 루쉰박물관에서 있는데 (물론 인터넷으로 봤지만), 참으로 지극 정성이다. 후지노 선생의 일상에서의 진실이 담겨있는가 보다. 일상에서 충실하게 어떤 댓가도 바라지 않고, 정인군자들처럼 명예욕이나 돈의 욕심이 없이. 그래서 루쉰은 후지노 선생을 존경하게 되었나 보다. 나는 한편 부럽기도 했다. 이번에 나도 유학시절 노트를 찾아보았다. 빨간 글씨는 볼수 없었다. 힘들게 수업을 들었지만 이해 못하는 부분을 혼자서 끙끙 앓면서 고심했었는데. 또한 독일어 때문에 힘들었는데, 그때 힘들게 공부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당시 일본은 개인주의 사회라 친한 친구 몇명만 있고 출신 지역별로 무리지어 다녔고, 학생들은 외롭고 혼자였다. 루쉰은 외국인인데도 친구들을 사귀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외롭지는 않은 했다. 루쉰은 매주 토요일마다 노트를 가져다 주면서 후지노 선생을 만나 해부학에 대해 질문하고, 일본의 의학 모델로서, 독일 의학에 대한 의견도 나누었을것이다. 일본에는 청나라 유학생에게 훌륭한 학문을 가르쳐서 귀국시키지 않으면 청나라에 면목이 서지 않는다는 의견이 있어서 인지, 후지노 선생도 루쉰의 열정적인 공부에 감동을 받고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주었다. 후지노 선생이 30세로 루쉰과는 7 차이밖에 안나서, 제자로서 후배처럼 대했을 것이다. 그러니 후지노 선생은 루쉰에게 전족에 대해 연구해보라고 제안하기도 하고, 루쉰 해부학 노트의 혈관 그림에 대해 고치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당시 해부학책은 너무 귀하고 비싸서 학생들이 구입할 없었고, 강사가 칠판에 쓰면 학생들이 다들 노트에 필기 했었다. 루쉰은 특히 그림에 어릴 적부터 관심이 많았고 소질도 있었다. 루쉰이 객관적 사실을 떠나 미학적으로 그린 혈관 그림을 후지노 선생이 비판한다. 후지노 선생은 과학적 분석은 사실을 기반으로 해서실물을 바꿀수없다고 말한다. 서양의 과학적 분석법이다.

1906 1 2학년 새학기에 세균학 수업을 듣는데, 남은 시간에 환등기로 러일전쟁에 대한 슬라이드를 보았다. 중국인 총살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고, 의학을 그만두고 문예를 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해 2월달 루쉰은 친한 친구들과 이별을 고하고 기념사진을 찍는다. 한국 최초 사진관이 1907년에 세워진 것을 보면, 1906년에 찍은 사진은 1 정도로 고가였고, 루쉰이 부탁하여 경비를 내고 찍은것 같다. 당시 청나라 유학생 장학금 (한달 30원정도) 일반 학생 생활비도 많았다고 한다. 사진 속에서 모두들 폼을 잡고 있다. 루쉰이 어얼리 어답터인가 보다. 청나라 유학생 중에서 의학을 공부한 사람은 거의 최초인것 같고, 센다이 유학생도 최초이고 보면. 루쉰은 비싼 돈을 내고 사진을 찍은 이유는 뭘까? 사진을 통해 순간 순간을 살고 이별할 사람과 소통의 방법이었던 것인가?

1906 3월에 후지노 선생에게 사실을 알렸다. 후지노 선생의 얼굴에서글픈 떠오르고 무엇인가 말을 하려다가 그만 둔다. 떠나기 며칠 전에 후지노 선생은 루쉰을 집으로 초대하여 이별주를 나누었을 것이다. 후지노 선생은석별이라고 글자가 쓰여진 사진을 주고 루쉰에게도 사진을 달라고 한다. 전에 루쉰은 친구들과 사진을 찍어서 사진이 있었는데도 없다고 하고 주지 않았다. 미안한 마음에서 였을까. 일년 동안 정이 많이 스승과 제자의 사이였는데, 후지노 선생은 루쉰을 각별히 아끼고 제자로 삼고 싶었는데, 이별을 앞두고 스승과 제자의 애틋한 정을 나눈다. 후지노 선생은 루쉰에게 의학을 가르치면서, 루쉰이 중국에서 새로운 의학을 싹트게 하고 전체 중국에 새로운 의학을 전파하기를 희망했었다.

루쉰은 항상 후지노 선생의 사진을 자신의 책상에 두었는데, 사진속검고 야윈얼굴로억양이 심한 어조 말하려는 같아 양심의 가책을 받고 용기를 북돋우곤 했다. 루쉰은 평생 누구도 스승으로 모시지 않은 하다. 그리고 스승을 구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사진 속의 후지노 선생이 있었으니까

전진하려는 젊은이들은 대개 스승을 구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감히 말하건대, 그들은 아마 영원히 구하지 못할 것이다젊은이가 황금 글자의 간판을 내걸고 있는 스승을 구해야 필요가 있을까? 차라리 벗을 구해 힘을 합쳐, 생존할 있는 방향을 향하여 함께 나아가는 나을 것이다.”  <「스승,『화개집』86> 길손처럼 앞으로 그냥 가면 된다고. 루쉰과 같은 진정한 스승이 함께 있지 않아도, 해부학 노트에서 처럼 함께 나눈 우정의 기억 만으로도, ‘석별 사진 장만으로도, 우리를감격시키고 고무해 것이다. 묻어둔 사진첩에서 과거 유학 시절 많은 인연들의 사진을 다시 한번 보고, 나도 거기에서 그들이 나에게 말을 거는것을 들을 있다. 안녕하냐고, 살으라고

댓글목록

장형순님의 댓글

장형순 작성일

루쉰도 경원샘도 신기해요. 우리말로 해도 어려운 공부를 남의 나라말로 할 수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