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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 2학기 에세이 발표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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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임잡가 작성일19-07-08 00:12 조회1,491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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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부터 푹푹 쪄대는 걸 보면 올 여름도 무척이나 더울 것 같네요.

너무 더우면 옆에 사람이 오는 것도 싫어지는데 그래서일까요, 저는 니체가 참 가까이 안하고 싶은 남자였어요. 뭔가 가슴에 콕콕 박히는 가시 같은 말들을 해서 속을 뒤집어 놓기도 하지만 끝내는 고개를 끄덕끄덕 인정하게 만드는 남자. 마음이 불편해 그런가 더운 여름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보일러 같은 남자였어요. ㅎㅎ

 

지난 수요일 그 남자를 만난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발표가 있었지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현장에 있었는데요.

각자가 참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는구나 싶었어요.

솔직하게, 용기내어 자신의 속내를 이야기해주셔서 고마웠어요.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 나에게는 참 어려운 문제잖아요.

돌아오는 수요일에 발표하시는 분들도 좀더 힘을 내시고요.

낭송도, 뒷풀이도 함께 하지 못해서 아쉽네요.

저는 다음 학기 때 뵐게요. ^^

 

후기를 쓴다고 피드백 녹취한 것을 푸는데 좋은 이야기들이 많네요.

몇일 지났다고 기억이 벌써 가물가물해져가요. 다시 읽고 곱씹어 볼 수 있도록 기록을 남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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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명희쌤 : 싸워야 되나 안싸워야 되나 고민하는 것은 도덕적인 구도다. 약자들과는 싸우면 안되고 도망가야 한다. 싸울만한 가치, 적이 될만한 가치가 있는 자와 싸우는 거고 그렇지 않은 것과는 싸우지 않는 것이 강자의 덕이고 힘이다. 그런 면에서 싸움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떤 싸움이어야 하는가, 어떤 상황과 조건 위에서 싸움에 달려들어야 하는가가 이야기 되어야한다. 도덕이 아니고 윤리가 되는 거다. 도덕적인 층위에서 이거냐, 저거냐의 이분법적인 구도가 보여서 아쉬웠다. 나는 문제가 없을까?’ 라고 질문하고 있는데 깊이 들여다보지 않은 것은 아닐까, 글에도 쓰고 있지만 나는 직면하려고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진단이 맞는 것 같다. 회사를 정리하려고 하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텐데 어떤 것은 회피하고 싶었고 어떤 것은 두려웠는지 구체적으로 들어나야 할 것 같다. 남편과의 싸움에 대해서도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뭉뚱그려서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상황들을 구체적으로 바라보고 이해해야 어떤 부분이 문제인지가 보이고 그래야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윤리가 나올 수 있다. 뭉뚱그려서 보면 다 문제이기도 하고 다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사건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건건이 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우련샘 : 글에 너무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니체 때문에 혼란스러운 느낌이다. 어떤 부분에서 니체 때문에 불편했는지 불편한 만남에 대해 나열하듯이 썼다. 이상이나 고통, 죽음에 대해 썼는데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우련샘의 핵심적인 지점이 무엇인지를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문제들을 병렬적으로 나열하기 보다는 그것들을 하나로 꿰고 있는, 근본적으로 갖고 있는 도덕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살려서 썼으면... 우련샘 스스로가 어떤 문턱을 넘어야하는지를 수월하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너무 많은 문제들을 나열해서 어느 것부터 시작해야하는지 길을 잡기 어려우니 이 안에서 어떤 것들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승미샘 : 내가 극복해야지 하는 문제랑 글 스타일이랑 비슷한 경우가 많다. 나는 막연하게 다 잘 될거야라며 결혼생활을 시작했는데 글 전체에도 그런 느낌이 있다. 막연하다라고 할까? 약자의 모습, 강자의 모습, 삶의 주인과 같은 표현들이 나왔는데 알맹이가 없어 보인다. 책을 읽을 때는 하나의 개념을 완전하게 내 것으로 만든다라는 치열함이 필요하지 않을까? 설렁설렁 전체를 잘 마무리해서 내면 되겠지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다음에는 약자면 약자, 강자면 강자,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중에서 하나를 잡아서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욕심을 내보면 좋겠다. 좋은 게 좋은 거다 하기 보다는 좀 더 질문을 던지고 나의 어려움을 바꿔보겠다는 욕심을 내봤으면 좋겠다.

 

 

* 2

지은샘 : 타인을 의식해서 생긴 것이다라고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데 거기서부터 글이 시작되고 있다. 앞부분 두 페이지는 질문들을 쓰고 있다. 무엇이 나를 아프게 만드는가? 왜 나는 자꾸 나로부터 도망가는 모습을 보이는가? 탐구해야한다. 이 글은 나는 탐구를 안하고 싶었어라고 끝났다. 글을 쓰는 훈련을 시작한 분들이니까 앞부분의 문제의식을 명확하게 질문을 던지고 출발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내가 어떤 질문을 가지고 갈 건지 집중을 하면서 갈 수 있다. 산만한 이야기들이 나오면서 하나로 질문이 모아지고 있지 않다. 2페이지까지 질문을 잡는 내용으로 끝났다. 타인에 대한 인정욕망과 같은 부분들이 나에게 어떻게 작동되는지 구체적으로 봐야하는 부분에서 글이 끝났다. 이제 이야기가 시작되어야하는 거다. 다음번에 글을 쓸 때는 앞부분에 내가 어떤 것을 질문을 던지고 갈 것인지 그 문제를 풀어나갔으면 좋겠다.

 

정수샘 : 사적인 이야기를 하라는 것이 아니다. 앞부분에 역사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우리의 일상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정보다. 개인적으로 앞부분은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의 사회는? 나는? 나는 원한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그 부분이 들어가야 할 것 같다. 지금 우리의 문제들, 나의 원한감정에 대한 문제들이 빠져있다. 생존에 대한 부분은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니체에서 핵심은 힘에의 의지다. 투쟁적인 생존에서 중요한 것은 투쟁적인이다. 우리는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고귀한 자가 되기 위해서 사는 거다. 우리는 목숨을 넘어서는 어떤 가치들을 계속 추구하고 있다. 의미를 찾는다는 것도 그런 거다. 우리는 삼시세끼 먹고 산다는 것만으로 만족이 안된다. 그런 점에서 생존을 니체와 연결시키는 것은 텍스트를 빗나가게 읽은 것 같다.

 

1영희샘 : 인용문을 쓰고 니체를 풀어서 썼다. 인용문에 책임을 져야한다. 인용문을 내 말로 소화해서 내 언어로 다시한번 풀어서 쓸 수 있어야한다. 그것이 반드시 들어가는 것이 처음 글을 훈련할 때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그 부분을 잘 써줬다. 그런 것들을 발판 삼아서 내 일상을 어떻게 보면 좋을지가 나오는 것이 좋다. 그 부분이 없으면 이야기가 붕 떠있게 된다. 그런데 그 이후에 쓰여진 일상에서의 문제들이 앞에서의 인용문들과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잘 안살아난 것 같다. 니체의 이런 지점들이 나하고 어떻게 깊이있게 만날 수 있는지, 내 경험에서 어떻게 한발 더 나아갈 수 있는지 좀 부족하지 않았나싶다. 예를 들어 첫번째 문단에서 마지막에 게으름과 노예도덕으로 논의를 해봤으면 좋았겠다. 마지막 문단에서 우리가 주인도덕을 갖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내가 스스로 그 장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것의 어려움이 무엇인지를 다뤄줬으면 글에 더 힘이 있었을 것 같다. 그 부분이 빠지면서 개인적인 글이 되어버렸다. 우리가 어떤 것을 탐구할 때는 나침반 같은 것이 필요하다. 우리의 책은 우리가 탐구해 들어가는 방향타가 될 수 있다. 그 책들을 중심으로 나의 이야기를 풀어가면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이야기로 확장될 수 있다. 다음에 글을 쓸 때는 니체와 깊이 만나면서 보편적인 언어로 정리하는 것으로 꼭지를 끝내보면 우리가 다같이 공감할 수 있는 글이 될 것 같다. 영희샘 자신에게도 길이 명확하게 보였을 것이다.

 

 

* 3

2영희샘 : 씨앗문장을 찾기 어렵다고 했다. 책과 만나는 것 위에서 쓰려고 하기 보다는 일상의 문제들을 찾아내고 그에 맞는 씨앗문장을 찾으려고 하다 보니 그랬던 것 같다. 책을 읽는 것은 책을 통해서 이제까지 내가 보지 못했던 경험의 장을 보게 되는 것이다. 책과 만나지 못해서 일상에서 어떤 것을 봐야하는지의 문제들도 추상적이 된 것 같다. 텍스트와 친하게 만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책을 읽는 것도 호기심으로 만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재미와 흥미와 정보를 넘어서 읽는 책과 찐하게 만나는 것이 필요하겠다.

 

종근샘 : 내가 도덕의 계보학을 좋아하는 이유는 비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너무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비판한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신을 욕망하는지, 왜 우리는 배타적인 방식으로 사유를 진행시키는지, 어떤 흐름 속에서 어떤 맥락 속에서 어떤 욕망이 그렇게 만들어내는지 이해하게 되는 거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라고 말하는 것이 비판이 아니라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이해하는 거다. 그래야 내 자신 안에 있는 욕망과, 사회 안에 있는 욕망과도 싸울 수 있다. 그냥 싫어라고 하는 것은 아무 힘이 없다. 기독교에 대한 비판도 그 사람을 이해할 마음이 있는가를 보셔야할 것 같다. 그 사람의 맥락에서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 기생충에서도 그 사람의 맥락에서는 그렇게 살아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거다. 그걸 이해할 때 그 상황과 조건에서 내가 빠질 수 있는 함정들을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비판이라는 것은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걸 계보학적으로 이해해야 힘을 갖는다. 그리고 배타적이지 않다는 것을 사람들이 이해하게 된다. 그걸 이해하지 않는 상태에서 싫다라고 이야기하니까 이 글이 배타적으로 느껴지게 된다. 우리는 이해하면 진다고 생각한다. 저 맥락을 이해하면 저 사람의 편이 되는 것 같다. 그걸 이해하는 자가 승자다. 그걸 이해하는 자만이 그런 삶을 내 안으로 안가져오도록 싸울 수 있다. 모든 사람의 좋은 주인에 대한 욕망, 그 욕망이 우리 일상에서 어떤 식으로 드러날까. 그 모든 것을 기독교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좋은 주인을 만들면 편할 것 같다라는 생각이 모든 사람이 갖는 욕망인 것 같다. 종근샘 자신에 대한 신에 대한 욕망도 보고, 이 위에서 배타성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나와야할 것 같다. 모든 노예들은 배타적이다. 노예로 사는 한 배타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 인과관계가 풀어졌으면 좋았겠다.

 

혜수샘 : 이번에 공부를 하면서 집에서 보지못했던 아이들과의 관계를 봤던 것 같다. 어떤 책을 공부한다는 것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책에 어떤 식으로 질문을 던질지 질문법을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질문은 니체적인 질문은 아닌 것 같다. 누군가에 의해서 칭찬을 받고 누군가에 의해서 혼남을 받는 건 누군가의 인정욕망 위에서 움직이는 거다. 좀더 깊이 들어가서 칭찬과 혼남을 떠난 다른 지점으로 넘어가는 부분이 나왔으면 좋았겠다. 칭찬이나 혼남은 대부분 능력과 성과에 대한 거다. 존재적인 지지가 아니다. 능력과 성과에 대한 칭찬을 받게 되면 더 거기에 목을 메게 된다. 인정욕망 위에 있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것이 필요하다. 더 중요한 문제는 나는 가축이다, 나는 강자이고 싶다라고 했는데 혜수샘 이야기는 없는 것 같다. 아이가 가축이 되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만 나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혜수샘은 사제쪽에 가깝다. 우리가 가까운 상대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다라는 것을 알았을 때 충격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잘 안고쳐진다. 왜냐하면 나는 안아프기 때문이다. 폭력을 당하는 사람은 상대다. 이런 행위를 통해서 아이의 생명력이 시들어가고 있다는 것은 본 것 같다. 한발 더 나아가서 나의 생명력은 어떻게 갉아먹고 있는지, 나를 어떻게 병들게 하고 있는지를 봐야 앗 뜨거워하고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이 굉장히 힘들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왜 못고칠까. 그 고통은 실제적으로 내 고통이 아니다. 내 아이에게 이렇게 함으로서 내가 어떻게 병들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나에게 촛점이 맞춰져야 아이를 위한, 혜수샘을 위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방법이 나올 것 같다.

 

 

* 4

명숙샘 : 차근차근 짚어가면서 글을 쓰는 훈련이 필요할 것 같다. 하나하나의 차서가 있다. 내가 문제제기를 하기까지의 흐름이 있는데 그 흐름이 없는 글이 나와서 일기에 가깝게 되었다. 문단과 문단, 문장과 문장이 어떤 흐름으로 이어져있는지 신경 써서 글을 쓰면 좋을 것 같다. 그래야 내가 앞에서 생각하는 것과 뒤에서 생각하는 것이 충돌하고 있는지도 보일 것이다. 차서 없이 쓰게 되면 내가 어느 지점에 있는지 잘 안보이게 된다. 나는 왜 금욕적으로 살았는지 계보학적으로 따져보면 거기에는 나의 쾌락이 있다. 금욕을 하는데 즐거움이 있다는 거다. 그걸 보지 않으면 계속해서 선악의 구도를 떠나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나는 그렇게 금욕적으로 될 수밖에 없는 상황과 조건에 놓여진 피해자라는 그림이 그려지기가 쉽다. 우리는 힘든데 절대 참고 있지 않다. 우리가 글을 쓸 때는 그 힘듬을 넘어설 정도의 쾌락이 있는 거다. 그것이 있기 때문에 그 힘듬을 통과해가는 거다. 모든 일이 그렇다. 부정적인 사건들 속에서 내가 어떻게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풀었다. 그런데 그런 것으로부터 시작 되서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순간에 그 금욕이 나에게 어떤 쾌락을 주는지 더 깊이 들어가야 할 것 같다. 내가 피해자인 이상 이 문제해결의 키는 상대가 갖고 있다. 내가 이것으로부터 무엇을 얻고 있고 여기에 담겨져 있는 나의 쾌락은 무엇인지를 보면 좋을 것 같다.

 

성희샘 : 내용을 뭉뚱그려서 애매모호하게 보는 지점을 깨야할 것 같다. 내가 어떤 것과 씨름하고 있는지는 정확하게 알아야한다. 그런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니체가 말하는 약자에 대해 단도적입적으로, 구체적으로 다뤘으면 좋았을텐데. 마지막에 약자들을 긍정하는 공동체라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나왔다. 토론을 할 때는 편안하게 약자에 대한 불편한 이야기를 하셨음에도 글에서 왜 그 지점을 잡고 쓰지 않았는지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상례샘 : 두려움에 대한 중요한 지점을 짚어줬다. 옳고 그르다는 생각이 행위를 이끄는 게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해 느끼는 파토스, 감정이 우리를 이끈다. 머리로는 충분히 알아도 그게 두려운 순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무리 좋고 훌륭한 명분이어도 나의 생리학을 넘어설 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상례샘이 두려움의 실체를 보겠다라고 하는 것은 도덕의 구도를 떠나서 본 것이다. 그런데 두려움의 실체에 대한 지점에서 정리가 안되고 넘어갔다. 두려움의 정체가 되는 간단한 에피소드를 쓰고 두려움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더 길게 썼어야 됐다. 상례샘이 지키고자 했던 것이 있었을 거다. 상대에 대한 두려움도 있지만 내가 무엇을 잃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그 측면까지 더 깊이 있게 봤으면 이후의 길을 찾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 같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푸는데 지면할애를 많이 했다. 풀었어야할 핵심적인 지점에서 힘이 빠진 것 같다. 내 경험들을 응축적으로, 핵심적으로 그려내는 내러티브를 만드는 힘이 필요할 것 같다. 그 내러티브를 강하게 밀도있게 쓰고 거기로부터 철학적으로 탐구하고 성찰하는데 힘을 써야하지 않을까. 에피소드에 비해서 우리가 함께 고민하고 성찰해봐야하는 부분에서는 힘이 빠진 것 같다. 다음번 에세이를 쓸 때는 바른 방향에서 힘을 써보면 좋겠다.

 

 

* 5

재신샘 : 경험과 책이 따로 논다. 중간의 인용문을 선생님의 언어로 풀어서 써보면 좋겠다. 인용문과 선생님 경험의 연결고리를 찾기가 어렵다. 책과 선생님의 일상이 어떤 식으로 연결되는지 긴밀하게 탐색해야하지 않을까. 그 방법으로 인용문을 선생님의 언어로 구체적으로 풀어보면 좋겠다. 주석서를 쓴다는 생각으로 풀어보면 좋을 것 같다.

 

영남샘 : 전체적으로 글을 구성할 때는 어떤 문제의식 위에서 쓰는지가 앞에 나온다. 글의 맨 앞은 일종의 문패와 같은 거다. 이 곳은 들어가면 어떤 문제가 펼쳐질 것인지를 보여주는 곳이다. 3개의 이야기가 나열되어 있다. 반생명적인 약자에 대한 이야기를 맥락마다 짚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면 앞에 문제의식을 제시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니체도 나열식으로 썼지만 서문은 썼다. 같이 편안하게 공감하고 들어가려면 앞에 문제를 제시해주는 것이 좋다. 아니면 서문 없이 가려면 뒷부분에 내용을 포괄하는 부분이 들어가야 한다.

 

연정샘 : 우리가 원한감정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선생님과의 에피소드에서 여전히 원한감정에 대해서 느꼈다면 글에서 다시 나왔어야 했다. 내가 원한감정에 대해 벗어났다고 착각하게 되고 다시 어떻게 미끄러져 들어가는지를 썼으면 우리의 피부에 더 와닿고 현실적인 글이 되었을 것 같다. 내러티브를 세밀하게 구성하다보면 다른 것들도 보인다. 이미 이 문제에서 벗어났다고 규정하고 시작하니 볼 수 있었던 것들을 못봤던 것 같다. 우리가 노예가 되는 건 결과적으로 그 사람으로부터 얻을 것이 있을 때다. 그 사람에게 배울 것이 있다면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떤 대우를 하건 배운다. 그 다음 그 사람이 나에게 해줘야하는데 안해주고 있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나오게 된다. 그것은 이미 노예도덕이다. 그 사람 밑에 계속 있어봤자 내가 더이상 클 수 없다던지, 그 사람은 내가 크는 걸 바라지 않는다던지... 이런 것들은 다 나에게도 뒷마음이 있는 거다. 노예심리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갑을관계에서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노예가 되는 거다. 그런 지점들까지 들어가봤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 6

윤선샘 : 문제제기, 질문을 정확하게 하고 들어갔다. 미술에서 연습을 잡고 스케치 연습을 하듯이 문제제기, 질문을 정확하게 하고 들어가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질문이 결론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잘 모르겠다. 나에게 이런 욕망이 있나봐하고 글이 끝났다. 자꾸 질문을 하고 단정 짓지 않는다. 질문을 했으면 답이 나와야한다. 질문만 하고 넘어가지 말고 문제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하다. 질문만 하고 넘어가는 습관이 있는 것은 아닌지 보면 좋겠다. 구속감에 대한 거부감과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 금욕적 소망이 자유를 더 갈망하게 만든다라는 부분을 더 깊이 있게 파봤으면 재미있었을 것 같다. 니체에게 자유와 구속은 반대되지 않는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어떤 특정한 형태로 구속되어 있는 거다. 우리에게는 바운더리가 있고 리미트가 있다. 그것이 없이 한 생명체로 존재할 수 없다. 어떤 구속이냐가 문제다. 나아가서는 그 구속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구속에로의 자유다. 그것이 운명애다. 모든 인간은 자기의 성격적인 것이든, 환경적인 것이든 자기가 원치 않는 어떤 것들 속에 들어가서, 그런 구속 위에서 살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구속이 어떻게 자유가 될 것인가, 그걸 고민하는 것이 니체에게는 운명애다.

 

영숙샘 : 앞부분의 질문과 답이 다르게 나온 것은 중간에 다른 이야기가 나와서다. 도덕적 열등감에 대해서 풀어야하는 방향으로 글이 나왔다. 도덕적인 우월감을 느끼게 만드는 사람들 곁에 있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게 하는 사람들 앞에서 굉장히 무력감을 가지는, 이 양가적 감정을 느끼는 지점을 봐야할 것 같다. 이 질문을 가지고 앞으로 두 학기 공부를 해보면 좋겠다.

 

그림샘 : 텍스트가 나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가 책을 읽는 핵심이다. 니체가 나에게 무슨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문제의식으로 출발해야한다. 제목이 주체적 삶을 살아가는 이라고 했는데 니체는 주체라는 것을 부정적으로 봤다. 주권적인 개인과 주체적 삶을 잘못 이해한 것 같다. 주권적 개인은 강자라는 말과 똑같다. 실행하는 힘을 가진 자, 행위하는 자가 주권적 개인을 말한다. 반면에 주체는 행위와 자기의 존재를 분리시키는 자다. 이런 면에서 니체는 주체적인 면을 원하지 않았다. 인용문을 세 개를 썼다. 보통 씨앗문장을 가지고 정면대결을 하기 어려우면 여러 개를 잡는다. 텍스트가 이해가 안될수록 씨앗문장 하나만 잡고서 씨름을 하면 좋다. 그걸로 충분히 된다. 하나만 가지고도 깊이 있게 들어갈 수 있고 자기 이야기를 충분히 할 수 있다.

 

댓글목록

젤라님의 댓글

젤라 작성일

임작가님 수고 많이 하셨어요^^

박상례님의 댓글

박상례 작성일

우리 조장님,  이렇듯 세밀하게 정성껏 후기 올려주셔서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  읽다보니 다시 새삼스레 울림이 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