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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학기 루쉰 에세이 쓰기 발표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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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상례 작성일20-12-14 00:41 조회3,118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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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수성 수업의 마무리, 4학기 루쉰의 에세이 발표 시간!

 

한 공간에서 발표하고 질문하고 토론하며 느꼈던 현장성과 공감의 시간을 사랑하는 수성학인들, 결국 줌을 통해 에세이를 발표하는 특별한 현장과 만나게 되었다.(부디 특별한 것으로 남아 주길...)

 

문탁샘께서 루쉰 수업 첫 시간에 작품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루쉰이라는 텍스트를 읽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4주간의 강의를 들고 그의 작품들 속에서 시대적인 문제에 대해 저항하면서도 철저하게 생활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루쉰을 접하게 되었다. 안일하게 나와 가족의 삶에만 매달려 살고, 그 조차 후회의 시간으로 채워진 나의 이야기를 루쉰의 작품에 얹어 풀어낸다는 게 뭔가 죄송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샘의 코멘트 가운데  에세이를 쓸 때 일반적으로 숙지해야 할 내용을 정리했다.

전혀 낯선 시공간에 살았던 루쉰이라는 한 인물의 생애와 글을 읽는다는 것이 과연 뭘까?’를 질문해야 한다. 텍스트를 자기한테 가져와서 지금의 자기에게 적용 시키고, 문장과 그 문장을 쓴 작가의 사상에 대해 공감한다는 방식의 글을 통해서는 글쓰기와 책을 읽는 힘, 사유하는 힘,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기존의 자기 상태를 정당화 하거나 그것을 설명하는 다양한 레토릭을 받아 오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공부가 아니다.

루쉰의 삶과 사유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해석하고, 이해하고 그것으로부터 삶의 통찰을 얻는 게 우리의 과제다.

질의응답은 각자의 삶에 대한 것에서 그치지 말고 루쉰의 텍스트를 만났던 글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

 

발표 순서대로 에세이를 살펴보고, 그에 따른 문탁선생님의 코멘트를 정리했다.

 

박연자샘 다시 사막 위에서’ <후지노 선생>

겉으로는 화려했지만 조력자로만 살아왔던 삶 속에서 느꼈던 회한이 많았다. 루쉰의 적막과 공허와 공감이 되었다. 이제 내안의 적막을 깨우면서 소통하고 연결하는 삶을 살고 싶다. 공부와 책을 통해 연결되는 것을 감이당에 와서 알게 되었다. 루쉰처럼 젊은이들을 일깨우는 대단한 혁명은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내게 혁명이란 평범한 생활을 기반으로 척박한 사막에서도 작은 꽃을 피우는 삶이다.

코멘트: <후지노선생>을 갖고 글을 썼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글의 일관성이 부족한 면이 있다. 루쉰을 읽고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그 접속 지점을 더 명료하게 풀어주어야 한다. 공부는 자기를 떠나기 위해서 하는 건데 여전히 자기가 너무 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의 상황을 아는 학인들뿐만 아니라 글의 맥락에서 공감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강혜성샘 오늘의 생활력

어렸을 적 생활력이 없던 여성분들에 대해 가졌던 답답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는데도 여전히 시간의 꼭두각시로 살아가고 있다. ‘여자의 생활력이라는 과거의 신념, 과거의 망령에 휩싸이지 않고, 지금 살아있는 현장을 기반으로, 생기를 꽃피우는 삶을 살고 싶다. 루쉰의 말대로 지금 자신의 사상과 행동을 다 기록해 두고매일의 나를 생생히 해부하고 마주보겠다는 마음만은 망각하지 않으리라.

코멘트: 샘이 갖고 있는 문제에 공감이 갔다. 내 경험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구조 속에서 루쉰이 살아와서 생활력이라는 족쇄에 갇혀있는 나에게 뭐라고 했을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생각을 더 밀고 나갔으면 좋겠다. 바로 답이 나올 수는 없다. 그럴 때 루쉰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던 인물일까를 생각하게 된다. 그래야 루쉰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루쉰의 입을 빌어 자기의 문제를 진단할 수 있다.

 

박상례 믿음이 절망으로 변할 때’ <죽음을 슬퍼하며>

위대한 혁명의 발걸음이라고 생각했던 쯔쥔과 쥐안성의 동거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경제적인 압박과 서로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어긋나기 시작하면서 죽음과 혼란만이 남았다. 쯔쥔의 죽음을 잊고 새로운 삶의 길을 선택하려는 쥐안성. 그러나 쯔쥔의 죽음을 되새기는 과정을 통해서만 진정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한다.

코멘트: 나는 상례샘과 해석이 다르다. <죽음을 슬퍼하며>는 읽을 때마다, 읽는 이마다 다른 해석이 가능한 밀도 높은 작품이다. 낭만적 사랑만으로는 새로운 가정, 새로운 여성상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여성에게 가혹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나타내기도 한다. 쯔쥔이 죽은 뒤에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쥐안성.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엄중한 명령이다. 회한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일까? 쥐안성에게 너무 쉽게 면죄부를 주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비겁하고 이기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한 시점을 확실하게 논증을 통해 좀 더 세게 더 밀고 나갔으면 좋겠다.’

 

김선경샘 위선에도 크고 작음이 있을까?’ <비누>

 쓰밍에게서 필요한 만큼 자신에게 가져다 쓰는 모습, 옳고 그름이 아니라 내가 이해한 만큼 세상을 보고, 내가 필요한 만큼 가져다가 나를 위한 변명으로 사용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자신의 위선을 모르는 쓰밍과 위선을 자각한 나는 뭐가 다를까? 적어도 내가 철방에 있음을 안다는 것은 나를 겸손하게 만든다. 내 철방의 크기는 얼마 만큼인가 들여다보는 것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지 싶어진다. 결국 시작은 나를 바꾸는 일부터 해봐야 겠다.

코멘트: 글의 흐름을 연결하는 능력이 있어서 더 가다듬으면 좋은 글이 될 수 있다. 루쉰을 갖고 수없이 많은 수업을 했는데 <비누>를 갖고 글을 쓴 사람은 처음이다.^^재미있게 읽었다. 지식인들의 위선에 대한 풍자에서 나한테도 그런 모습이 있다는 게 환기 됐다고 했는데 그런 모습이 좀 더 잘 드러났으면 좋겠다. ‘철방에 갇혀있다는 문장은 기본적으로 오래 된 습속, 너무나 완강한 습속 안에 갇혀 있는 무지몽매한 인간들에 대한 것으로 방황에 와서 신청년들이 기성세대가 되고 난 뒤의 위선의 문제는 철방의 비유를 쓰기에는 애매함이 있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나, 스스로의 위치만 안다는 것만으로도 나를 겸손하게 만든다는 내용을 자기 해부나 루쉰의 일관된 태도를 갖고 와서 자기에게도 이러한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하는 방식으로 풀었으면 좋았겠다.

 

박지은샘 불쌍한 샹린댁’ <축복>

풍속의 종으로 살 수밖에 없고 고립감을 갖는 샹린댁에게 공감을 느꼈다. 교회를 통해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샹린댁은 첫 번째 결혼에서 모진 시집살이를 용감하게 뿌리친 여자이고 주인아저씨는 성리학자이며 국자감생 벼슬까지 한 사람이다. 그런데 둘 다 왜 이렇게 종으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 나 역시 종으로 살고 있었다. 모두 욕망의 노예인 것이다. 루쉰의 소설은 쓸모없음에도 불구하고 냉철하게 기록 한다.’라는 루쉰의 삶과 붙어있다. 축복의 소설집의 제목은 방황이다. 그리고 100년 가까이 지난 지금, 나는 그의 소설을 읽고 있다.

코멘트: 짧은 글에서는 테마가 한 가지인 게 좋다. 샹린댁은 풍속을 해치는 자인가? 교회를 안나가는 나도 풍속을 해치는 자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까지는 신선하다고 생각했다. 거대한 습속을 교회와 연결해서 쓰는 경우를 잘 못 봤기 때문이다. 샹린댁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쓸모없다고 버려졌지만 사실은 아큐와 달리 습속에 저항했던 사람이고, 그녀의 죽음을 기억하는 지식인 화자가 있다. 이런 점을 볼 때 <축복>방황이라는 소설집의 어두운 정조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출구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글을 진행할 수도 있었겠다.

 

문명샘 희망도 없이, 절망도 없이’ <술집에서>

가족이 싫어 집을 나온 지 4년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온 나에게 <술집에서>다시 고향에 돌아온 두 친구가 만나는 장면이 마음에 와닿았다. 왜 돌아오냐며, 더 멀리 갈 순 없었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예전과 달리 의기소침해보이고 눈의 정기를 잃은 뤼웨이푸가 변변찮은 일’, 자신의 이념이나 돈보다 어머니의 마음이 놓이는 길을 택했다고 한다. 아순의 행복을 빌고 그녀를 위해 세상이 좋아지기를 빌었을 때를 말한다. 생활은 끊임없이 유지되어야 하고, 옆에는 헤아려야 할 사람들이 있다. 섣부른 희망도, 그렇다고 좌절에 빠지려 하지도 않는다. 다시 돌아온 집에서 가족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많이 달라진 듯하다.

코멘트: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지는 알겠다. 루쉰의 상황과 <술집에서>를 접목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만난 두 친구, 옛날 같으면 반발하고 비판했을 법한 변변찮은 일을 대하는 이들의 태도와 마음을 갖는 게 삶의 혁명이라고 보는 것에 공감한다. 희망을 갖고 공동체 생활을 하다가 작은 일로 절망에 빠졌더라도 이러한 태도가 삶의 지침이 될 것이다. 루쉰과 나의 이야기를 통해서 발견한 그 지점을 보편적인 방식으로 쓰려고 노력해야 한다. 더 설득력 있고 완성도 있는 글을 쓰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삶의 한 국면이 넘어갈 것이다.

 

신해선샘 돈이라는 이름의 현실과 욕망’ <죽음을 슬퍼하며>

(먹고 사는 것)을 하찮게 여겨 혁명에 실패한 그들과 돈(돈의 증식)에 집착하며 괴로워하는 나에게 돈의 의미는 무엇일까?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는 사상의 진보나 사랑의 창조를 운운할 여력이 없다. 그러나 나의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는 한 돈에 대한 집착도 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 욕망을 보란 듯 휙 던져 버릴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허상적인 욕망이 나의 실제적 현실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쥐안성에게 돈이 구체적 현실이라면 돈은 나에게 허상적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돈은 내 삶을 충만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도구에 불과하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충만한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집중해 보려한다.

코멘트: 돈이라는 테마를 루쉰과 접목시킨 점이 재밌었다. 루쉰의 다른 자료들을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그가 돈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좀 더 탐구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는 엄청난 욕망이나 증오 등의 망상적 방법으로 돈과 관계를 맺고 있다. 지극히 생활인의 자세를 갖고 살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삶을 살았던 루쉰의 모습에 비추어 나의 돈에 대한 욕망의 실체가 무엇인지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새로 글을 쓰면 좋겠다.

 

이번 학기의 진정한 장원은 <비누>라는 작품으로 자신의 위선을 자각하고, 작은 변화를 시작해보겠다는 김선경샘입니다. 축하합니다!!

 

이제 다음 주 낭송 발표로 2020년 감이당 수요 대중지성 수업이 끝나네요.

코로나가 우리의 생활을 구속했지만 그 안에서 적응하고 극복하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공부의 장을 만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일 년 동안 많은 것을 함께 한 수성 학인들, 지난한 과정을 이끌어 주신 김희진 담임샘과 배서연, 최희진 두 튜터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정숙샘, 희정샘과 함께 모두 한자리에서 만나는 날을 기대합니다.


댓글목록

shinsun14님의 댓글

shinsun14 작성일

지난주의 일인데 벌써 한참전의 이야기 같아요.
마지막 뒷풀이도 못한채 줌으로 수업을 마친 아쉬움이 큼니다.
1년동안의 소중한 만남이 우리들의 삶을 더욱 충만하게 만들어 준 것 같습니다.
소중한 인연에 감사드립니다~~

강강님의 댓글

강강 작성일

잘읽었습니다. 일목요언하게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쓰기 발표현장에 다시 머문 것같은 기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