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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기 7주차 수업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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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글길 작성일16-09-04 02:19 조회2,8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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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교시 <원형과 무의식> -- 신근영샘

작년 목성 첫학기 근영샘을 통해 융을 처음 만났던 때가 생각난다. 원형이니 집단무의식이니 하는 개념이 낯설었던 만큼 흥미로웠던 기억이 난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어둡고 은밀한 억압해야 할 대상으로 표상화하고 사적인 것으로 만든 반면 융은 타자성, 무의식이 사회적이라는 측면에 집중하고 있다. 들뢰즈가 융을 존경하면서도 융도 궁극적으로 신화적 원형을 버리지 못하고 무의식을 표상화하고 있다고 비판하지만, 이번 학기 근영샘을 통해 프로이트와 융을 함께 만나니 둘의 차이점이 더 분명히 보여지는 지점이 있다.

<원형과 무의식> 두 번째 시간에는 라캉의 무의식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되었다. 흔히 알려져 있는 라캉 인식영역의 세 가지 층위-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상상계는 거울단계로 말 그대로 거울에 비친 상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시기, 엄마와의 관계 속에서 자아를 구성하는 단계이다. 사회적 체계·구조를 나타내는 아버지(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닌)의 법질서를 받아들이는 단계인 상징계는 결핍된 주체의 차원이다. 주체는 자기가 욕망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사회가 욕망하라고 하는 것을 욕망하는 것이므로 주체는 언제나 결여되어 있다. 인간의 욕망은 언어적인 것으로 다 환원되지 않고 언제나 기의는 기표에서 미끄러진다. 이 언어화에 붙들리지 않는 채 잔존하는 욕망이 항시 있고 라캉은 이를 실재계라 부른다. 근원적 결여로서 욕망을 보는 라캉과 달리 나카자와 신이치는 실재계를 전제하지만 결핍이 아니라 창조성으로 본다는 점에서 현대철학적 관점에 서있다. 마찬가지로 융도 실재계를 인정하지만 실재계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을 결핍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와 라캉과는 다른 입장을 보인다.

프로이트와 융의 글쓰기를 비교하자면 프로이트는 내면을 뚫고 들어가는 방식의 직선적 논리적 합리적 구성이라면 융은 관점을 이동하는 방식의 글쓰기다. 융의 글쓰기를 한의학에 비유해주셔서 이해가 더 쉬웠는데 우리가 한의학에서 예를 들어 12경맥을 통해 장부의 병과 원인을 탐구하듯이 표면의 사건을 통해 내부를 보고자 하는 사람은 다양한 관점에서 봐야 하기 때문에 융과 같은 글쓰기가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찌 보면 병과 삶의 관계를 보는 시선도 한의학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융은 기본적으로 존재는 모순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해서 의식과 무의식을 모순되는 반대되는 힘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의식과 무의식은 서로 다른 어순을 가진 언어를 사용하는 것처럼 완전히 다르게 작동하는 힘이고 이 모순을 대극으로 표현한다. 프로이트가 자아적 차원을 생명의 모든 것인 것처럼 강조하는 것에 비해 융은 자아를 생명의 차원에 떠있는 하나의 섬 같은 거라고 표현한다. 즉 무의식과 의식은 뭐가 먼저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대극적 방식으로 활동하고 반대되는 힘을 통해 그 힘을 조율해 나가는 보상적 관계를 유지한다. 사실 이 부분은 개인적으로도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셨는데 흔히 어떤 선택을 하거나 습관을 고민할 때 그런 것들을 두 개의 힘의 길항 작용 속에서 사유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에세이를 써야 되는데 자고 싶다 이 경우 두 힘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고 결국 내가 더 힘을 실어주는 방향이 이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민이나 습관은 무조건 한쪽의 힘을 없앤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그 반대 방향의 힘을 어떻게 키워줄 것인가 하는 배치의 문제이다. 고민이나 습관을 반복시키는 그 힘을 제어하는 다른 방식의 행위를 어떻게 만들어내고 실험할 것인가 이걸 더 구체적으로 사유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처음이 아니라 내가 움직이기 직전이 가장 힘들고 가장 힘들 때가 가장 방향을 틀 때에 가까이 있다는 말씀이 개인적으로 큰 용기를 준다.^^

자아는 차이를 무화시키고(규정성) 새로운 게 들어오는 걸 막고(정향성) 자기를 보존하는데(일방성) 힘을 쓰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다. 대극의 힘으로 이 자아의 보수성을 깨는 무의식이 불쾌로 느껴지고 돌연한 사건처럼 누미노제(신성한 힘)로 다가온다.

융은 정신적 측면에서 인간이 갖는 관계 기능을 원형이라 부르는데 이 원형은 역사적이고 보편적이며 모든 사람들이 다 갖고 있다. 그러므로 투사가 일어난다. 나의 원형을 다른 사람에게서 볼 수 있고 그러므로 나는 언제든 히틀러가 될 수 있다. 원형의 관계기능 중 대표적인 것이 모성원형과 부성원형이다. 모성원형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표상과는 달리 관계를 자신에게로 접합시키는 방식으로 가는 힘으로 그 발로가 에로스이고 부성원형은 로고스 분리하는 힘이다. 소화도 일종의 모성원형이라고 설명하셨는데 모든 접속을 통해 자기흡수를 하는 힘을 상상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융의 텍스트의 모성성의 비대파트를 읽다보면 섬뜩하다는 느낌까지 든다. 나도 엄마지만^^. 에로스는 소유욕과 같이 갈 수 있고 이게 파괴의 힘으로 작동할 수 있다. 이럴 때 타자를 분리하는 로고스의 힘이 필요하다. 무의식적 에로스는 강력한 권력의지를 발동시키고 그래서 여성지도자들의 권력욕이 더 무섭게 상상된다.ㅜㅜ 비대해진 모성성이 어떻게 딸의 인생을 망치는지는 다음 시간에... 갈수록 흥미진진해진다.

  

2교시 독송: <별자리 서당> -- 김희진샘

왜 여름 하늘에 북현무인가라는 주제로 여름철의 별자리 북현무 7수와 가을하늘의 별자리 서백호를 공부한 시간이었다.

여름철의 별자리 6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보이는 별들 斗 牛 女 虛 危 室 壁

가을철의 별자리 9월의 백로, 추분 10월의 한로 무렵 奎 婁 胃

고대인들은 지상의 시공간과 하늘의 시공간을 복합적으로 사유하고 지도를 그릴 때는 관측자의 시점에 따라 방위가 바뀌기 때문에 사실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다. 태양과 달, 땅과 하늘이라는 우주의 펼쳐짐을 그림 한 장에 담아내기 위한 고대인들의 정성과 노력 앞에 소위 과학의 시대를 사는 내 자신은 얼마나 빈곤한 상상력을 갖고 있나 되묻게 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3교시 글쓰기: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 문탁샘

공부가 친구를 만난다는 건 단순한 레토닉이 아니라는 걸 계속 경험하고 계시다는 문탁샘의 즐거운 증언과 함께 시작된 이번 수업은 추장제에 대한 얘기가 본격화된 시간이었다. ‘어떻게 원시부족사회는 권력이 폭력이 될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을까라는 질문이 여전히 모두에게 가장 궁금한 지점이었다. 문탁샘은 중심이 안생겨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 거라고 중심이 생겼을 것이고, 분명 저 힘들이 뭘까라는 질문이 생겼으며 끊임없이 이 힘이 계속 출현해서 그걸 막는 사회도 넘어가는 사회도 있었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강제성 있는 권력이 되면 위험하다는 걸 직관적으로 알고 끊임없이 그 힘의 출현을 방해하는 사회가 있었다는 게 지금 우리의 상상력으로 접근하기엔 분명 어려운 부분이 있다. 정치나 권력에 대한 표상이 너무나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우리에게 정말 정치가 뭘까요하는 문탁샘의 질문은 일순 정적을 감돌게도 했다. 개인적으로 이 질문에 떠오른 문장은 소크라테스의 정치론이었다.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삶이 정치라는 소크라테스. 일반적으로 정치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표상과는 전혀 다른, 이런 식의 정치나 권력을 바라보는 사유가 절실히 필요할 때라는 생각도 든다. 특히나 요즘 들어 내 안의 목소리가 정녕 있기나 할까 고민하는 나로서는 말이다.

의무만 있고 권한은 없는 추장, 특권이라고 하면 모든 여자를 가질 수 있다는 것뿐이고 부족민들이 필요로 할 때 그나마도 노동력으로 내어주고 끊임없이 말을 하면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줘야 돼는 가장 가난한 자가 추장이다. 추장이 가진 것은 명예뿐이고 그가 가지고 있는 상징적 부는 을 순환하는 의례에 의해 다 해소되는 방식이다. 우리가 보아온 정치지도자나 리더들을 보면서 이러한 원시부족사회의 추장을 상상해보는 것도 심히 어려운 일이라는 씁쓸함이 든다.

외부인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무척 활기차게 운용되는 문탁이 궁금했었는데 문탁샘의 정치적 전략(의사결정기구에 들어가지 않으시거나 말을 실현시키는 교환관계로부터 미끄러져가는)을 들으니 공부공동체에서 생활공동체로 또다시 수행공동체로 끊임없이 변화되어가는 힘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감이당이 추장제인가 아니면? 하는 질문도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이어서 흥미로웠다. 끊임없이 하나의 힘으로 수렴되려고 하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집단성원의 집합적인 지혜가 발휘되었다는 추장제가 조금씩 더 윤곽이 잡히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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