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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좋은언어 작성일16-12-13 18:10 조회1,84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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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이당 수요대중지성/4학기 에세이/2016.12.13./조은만
운명의 주인이 된다는 것. ( 질문으로 최면에서 깨어나기 )
들어가는 글
시절인연이라는 단어를 품고 수성을 신청하고, 새로운 시공간에 적응하기 위하여 저항하는 몸과 머리를 끌고 한 학기를 마쳤다. 학인들은 어쩌면 그리도 암송을 잘하고, 긴 수업시간 몸도 안틀고 잘 버티는지
처음에는 도대체 이 집단은 무얼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힘든 수업이 끝나고 또 다른 수업을 들으러 저녁도 못 먹고 바쁘게 가는 이들의 뒤 모습을 바라보며 저절로 질문이 나왔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왜 저런 삶을 살아가는 걸까? 그들을 끌고 가는 것은 무엇일까? 등등
낭송을 위해 300번 넘게 읽어도 보고, 손으로도 써보고, 내 목소리로 읽은 것을 녹음해 시도 때도 없이 듣고 따라하고, 이 모든 것을 종합해서도 해보고 이런 저런 방법을 써 보았다. 그러나 그나마 집에서는 잘 외우다가도 막상 사람들 앞에서 하려면 꼭 더듬거리거나 머리가 하얗게 되어 어쩔 줄 모르는 등 노력 한 만큼 만족한 결과를 낸 적은 없었다. 그렇게 한 학기를 마치고 두 번째 학기 마지막 낭송 날 시작하는 일을 핑계 삼아 한 학기를 쉬었다. 버스를 타고 이동 중 아무 생각 없이 차창을 바라보는 것이 그렇게나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쉬면서 알았다. 일하면서도 힘들지 않았다. 그냥 무언가를 외우지 않고 머리를 멍하게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했다. 살면서 짧은 기간 그렇게 치열하게 공부한 적이 없었나보다. 그렇게 찾아온 행복을 느끼며 일을 마치고 보니 마지막 4학기가 되었다. 그런데 암송에 대한 나의 괴로움이 하늘을 움직였는지 ^^ 계획에 없었던 일이 잡혔다. 그것도 주4회 그동안 돈이 급해도 엄마를 모셨을 때의 안 좋은 기억 때문에 피했던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이다. 기존 했던 일들과 새로운 일로 채워진 시간들, 쉬었던 3학기의 일과보다 두 배 이상이나 곽~찬 일정이다. 그리고 새로운 만남과 기획이라 책임감이 머리를 눌렀다. 그러나 이번에는 도저히 쉬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질 체력이 걱정이 되었지만 일단 일과 공부를 감행하기로 했다. 말이 좋아 공부지 그냥 참여정도의 오후 2시간 할애였다. 준비물이 많아 캐리어를 끌고 다녔다. 일과 수업이 중반을 지날 때 쯤 채운선생님의 안티 오디푸스 2회차 강의 시간 그 날도 역시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와 수업을 듣는데 강의가 좋은 것을 머리는 알고 있는데 피곤해서인지 반은 멍, 반은 졸면서 강의를 듣다 가면서 왜 나는 이러고 살까? 싶었다. 수성을 신청하고 열심히 괴롭게 암송할 당시 맴돌던 질문이였는데 어느 사이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 것 이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왜 지친 몸에 무거운 케리어를 끌며 택시도 한번 안타고 올라올까? 힘들게 공부를 하겠다고 왔으면 최소한 듣기라도 해야 하는데 비몽사몽 졸다가 다시 그 무거운 것을 끌고 집으로 향하는 나에게 다시 물었다. “왜 이러고 살까?” 이런 것이 팔자일까? 그러면 팔자를 주관하는 운명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본문
‘명’은 정해진 것이고, ‘운'은 변하는 것이다.
‘지혜롭거나 어리석은 것은 타고난 재능(才)이고, 하고 아니하는 자유는 인간(人)에게 있고, 만나고 만나지 못하는 것은 때(時)이며, 죽고 사는 것은 운명(命)이다.’ 공자
'광땅의 환난“에서 공자는 말한다. 궁지를 면치 못하는 것은 운명이고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시세 탓이라고. 운명이란 ‘명을 운전한다.’는 뜻을 시세는 ‘때의 형세’를 이룬다, 존재의 리듬이 시절인연을 만나는 것, 그것이 곧 운명이다.『"바보야‘ 문제는 돈이 아니라니까’(70P) / 고미숙/ 북드라망)』
시절인연이 운명인지도 모르고 수성에 와서 새로운 방식으로 공부를 접하는 나라는 것에부터 질문을 해보자? 내가 아닌 나라는 것에서부터 (주관적 나와 객관화 시킨 나)
“대개 인간의 연구란 자기를 연구하는 것이다. 천지든, 신천이든, 일월이든, 성신이든 모두 자기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나쓰메 소세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송태욱 옮김, 현암사,2013,429쪽〕
수성을 접하는 나라는 것은 첫 단계 적응하려고 노력을 했다.
두 번째 단계는 이렇게 적응하는 것이 나라는 것에 어떤 의미와 가치인가를 질문하였다.
세 번째 단계는 돈을 더 벌 수 있음에도 몸과 정신이 힘든 것이 버거워 소극적 저항을 하며 삶을 살아온 것과 같이 다시 소극적 저항을 했다. ( 한 학기 휴식 -일을 핑계로)
네 번째 단계는 더 이상 힘들게 살고 싶지 않다. 즉 나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하지말자.
결론은 나라는 것은 적응성이 높다. 그러나 적응이 될 즈음 탈주를 시도하여 다시 나라는 것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번 수성공부의 성과는 돌아왔는데 달랐다. 새로운 시각이 생겼다.
『운명을 안다는 건 ‘필연지리’를 파악함과 동시에 내가 개입할 수 있는 ‘당연지리’의 현장을 확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해진 것이 있기 때문에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우연일 뿐이라면 개입의 여지가 없다, 또 모든 것이 필연일 뿐이라면 역시 개입이 불가능하다. 지도를 가지고 산을 오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명을 따라가되 매순간 다른 걸음을 연출할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운명론은 비전탐구가 된다. 사주명리학은 타고난 명을 말하고 몸을 말하고 그 길을 말한다. 그것은 정해져 있어서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최대한 누릴 수 있음을 말해 준다. 아는 만큼 걸을 수 있고, 걷는 만큼 즐길 수 있다. 고로, 앎이 곧 길이자 명이다! 물론 그 운명의 능동적 배치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사유의 적극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기존의 통념과 표상으로부터 벗어나는 “전제를 바꾸는 데서부터 공부는 시작된다.”(정화스님)( 31p)『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 고미숙/ 북드라망)』
“왜 나는 이러고 살아갈까?”에서 “아~ 나는 다르구나!” 그리고 타인들도 “다르구나!” 나는 용쓰고 살았다. “아 ~ 그들도 용쓰고 사는구나!”를 엿보게 되었다. 모든 것은 용을 쓴다. 산다는 것 자체가 용을 쓰는 것이다. 그런데 운명을 모르면 용을 써야 할 때 안 쓰고 안 써도 될 때 용을 써 힘만 빼고 지쳐 나자빠진다. 산모가 아기를 낳을 때 힘을 써야 할 때 힘을 주어야 아이가 나오지 아무리 힘을 써도 제 때 쓰지 못하면 아이가 나오지 못하고 사산되거나 산모가 죽거나 하는 위험한 일이 바로 용을 제대로 써야 하는 중요성을 알려주는 이치처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용을 쓰는 것이 맞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용을 쓰지 말고 힘을 빼야 한다. 그래야 용을 쓸 때 제대로 쓸 수 있다.
감정들의 어울림과 맞섬이 사람들의 동선과 리듬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곧 인생이고 운명이다. (13p) 감정의 회로가 운명 혹은 팔자의 키를 잡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28P)
운명이란 인생의 우주적 변곡선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운명을 사유한다는 건 인생과 자연 사이의 상응과 교감을 전제한다.(30p) 감정을 이길 수 없다. 감정이 이성보다 훨씬 강력할뿐더러 또 연원이 깊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정을 제대로 콘트롤하려면 고도의 수행(혹은 영적훈련)이 필요하다. 126P 『"바보야‘ 문제는 돈이 아니라니까’ / 고미숙/ 북드라망)』
남편이 가고 나서 남편의 친구를 일관계로 만났다. 그런데 만나고 오면 마음이 복잡했다. 이런 감정이 “무엇일까?”를 잡았다. 나와 맞는 면이 하나도 없는데 왜 그 분만 만나고 오면 마음이 복잡하고 뒤숭숭할까?
처음에는 남편의 상실로 인한 허전함이라고 했고, 조금 지나서는 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나 끌림이라고 생각했다 (상류층) 더 지나서는 나의 숨겨진 욕망을 보았다. (잘 생기고, 돈 많고, 능력이 있는 사람을 안다는 자랑거리로) 그렇게 정의내릴 수 없는 감정을 묻어두고 일상을 보내다 수성공부를 다시 시작하면서 어느 순간 갑자기 최면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아하! 최면에 걸렸었구나!
남편은 아프기 전 잘나가는 이 친구의 힘을 바탕으로 사업을 재기하려고 기획하고 있었고, 이 친구는 거기에 호응을 해 준 유일한 이였다. 남편 주변에서 제일 자랑거리이며 스러져가는 자부심을 지탱해주는 힘이 되었을 친구. 남편이 친구를 자랑스럽게 말하며 칭찬 일색이었던 것들이 떠올랐다. 남편이 가고 나서 나도 모르게 그를 연예인처럼 우상화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만나보니 그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 면모를 지니고 있고 그러니 실제와 허상의 어긋남. 그 삐걱거림을 감정은 감당하지 못하고 어쩔 줄 몰랐다. 운명처럼 그 시절인연은 나를 새로운 시절인연인 감이당으로 보내고 그 감정의 답을 열어주었다.
최면” 나도 모르게 무수히 걸려 있을 최면들. 갑자기 두려움이 밀려들면서 “아! 깨있어야겠구나!” 는 생각이 밀려 왔다. 10여년 전 입버릇이 ‘깨어있어야지’었다. 그 당시의 ‘깨어있어야지’는 지금처럼 강렬함을 동반하지 않는 지식적인 것이라며 지금은 몸으로 반응하는 깨어 있음이다.
마치는 글
사마천은 어려운 기로 들어서 자신을 극복한 인물들을 높이 산다.
자신의 뜻을 지키려는 발버둥. 그것이 삶의 주인이 되는 길이라 여긴 것이다.
자신의 뜻을 지키려는 발버둥. 그것이 삶의 주인이 되는 길이라 여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매일 주변을 청소하겠다는 뜻과 나라를 잘 다스리겠다는 뜻에 위계가 없어진다.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존재감을 드높일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청년백수 자립에 관한 보고서/ 북드라망)
수성에서의 공부는 어느 사이 탈주하는 나에게 화인하나로 되어 있다.
몸이라는 화두의 본질을 엿보았다. 그러기에 감정의 카오스를 잡을 수가 있었다. 다시 그런 카오스가 오면 낭송을 하며 나를 괴롭힐 것 같다.
그리고 나의 운명을 제대로 운영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2007년에는 감이당에서 명리학을 공부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외우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주어진 일에 조급해 하지 않고 완벽하게 하려 하지 않고 그냥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여유를 가지고 바쁘게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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