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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주차 인용문 노트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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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산진 작성일19-11-04 21:49 조회7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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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4주차 과제 / 인용문 노트 / 2019. 11. 4 / 3조 최희진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우리 인식자들조차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 여기에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한 번도 자신을 탐구해본 적이 없다.─우리가 어느 날 우리 자신을 찾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너희의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느니라”라고 말하는 것은 옳다. 우리의 보물은 우리 인식의 벌통이 있는 곳에 있다. (도덕의 계보, 서문, 337쪽)

→니체는 도덕의 계보 서문에서 자기 자신을 아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이 작업은 도덕의 기원을 아는 일로 연결된다. 자기 탐구를 통해서만 만나게 되는 자기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 라고 물으면서,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나중에 이르러서야 우리의 체험, 우리의 생활, 우리 존재의 열두 번의 종소리의 진동을 모두 세어보게 된다.─아! 우리는 그것을 잘못 세는 것이다……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이방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혼동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먼 존재이다”라는 명제는 우리에게 영원히 의미를 지닌다.─우리 자신에게 우리는 ‘인식하는 자’가 아닌 것이다…… (도덕의 계보, 서문, 338쪽)

→니체는 진지하게, 시간을 들여서 자기의 체험, 자기의 생활에 대해 살펴보라고 말한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과 사소하게 생각했던 것을 뒤집어보는 시도를 권하는 것 같다. 그렇게 해봄으로써 자기를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 있는 것 같다.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기를 움직이는 힘이기 때문인 것 같다.

 

 

인간은 어떤 조건 아래 선과 악이라는 가치 판단을 생각해냈던 것일까? 그리고 그 가치 판단들 자체는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이제까지 인간의 성장을 저지했던 것일까 아니면 촉진했던 것일까? 그것은 삶의 위기와 빈곤, 퇴화의 징조인가? 아니면 반대로 거기에는 삶의 충만함, 힘, 의지가, 그 용기와 확신이, 그 미래가 나타나 있는가?─이 문제에 관해 나는 나 자신에게서 많은 해답을 찾아보았고, 그 해답을 찾고자 감히 시도해보기도 했다. (도덕의 계보, 서문, 340쪽)

→니체는 가치 판단 자체를 다시 가치 판단한다. 어떤 조건 아래서 가치 판단을 했는지, 그 판단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묻는 것. 그리고 삶의 충만함이라는 기준 아래 기존의 가치 판단들을 재배열한다. 그랬더니 선과 악이라는 가치 판단은 원한 감정이라는 조건 아래서 나왔고, 그러한 가치를 내면화한 약자와 노예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 그렇다면 나에게 되물어볼 수 있다. 나는 무엇을 가치 있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지. 내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어디에서 왔는지. 내가 만든 게 아닌 가치를 위해 살고 있다면 나는 그만큼의 노예가 아닌지. 그리고 니체가 삶의 충만함이라는 기준 아래 가치를 재배열했다면 나는 어떤 기준 아래 가치를 재배열할 것인지도.

 

일정량의 힘이란 바로 그와 같은 양의 충동, 의지, 작용이다.─오히려 이것은 바로 이와 같은 충동 작용, 의지 작용, 활동 작용 자체와 전혀 다르지 않다. 오직 모든 작용을 작용하는 자, 즉 ‘주체’에 의해 제약된 것으로 이해하고 오해하는 언어의 유혹 아래에서만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사람들이 번개를 섬광에서 분리하여 후자를 번개라 불리는 어떤 주체의 활동이며 작용이라고 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민중의 도덕도 마치 강자의 배후에는 강한 것을 나타내거나 나타내지 않는 것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종의 중립적인 기체가 있는 것처럼, 강한 것을 강항 것을 표현하는 것과 분리한다. 그러나 그러한 기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활동, 작용, 생성 뒤에는 어떤 ‘존재’도 없다. ‘활동하는 자’는 활동에 덧붙여 단순히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활동이 모든 것이다. (도덕의 계보, 제1논문, 377쪽)

→아는 것, 이해하는 것, 해석하는 것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 같다. 해석하는 것이 어떤 가치를 낳는다. 그러면 그런 해석 방식은 어디서 오는 거지? 이것이 자기를 아는 문제와 어떻게 연결되지? 


‘좋음’이라는 판단은 ‘호의’를 받은 사람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좋은 사람들’ 자신, 즉 고상한 사람, 강한 사람, 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과 고매한 뜻을 지닌 사람들에 의해 비롯된 것이다. 이들은 모든 저급한 것과 저급하다고 생각되는 것, 비열하고 천민적인 것과는 달리 자기 자신과 자신의 행위를 선하다고, 즉 최상급의 것으로 느끼고 평가한다. 이러한 거리의 파토스에서 비로소 그들은 가치를 창출하고, 가치의 이름을 새기는 권리를 획득한 것이다! 공리가 그들에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공리의 관점은 등급을 정하고 등급을 분명하게 해주는 최고의 가치 판단이 그처럼 뜨겁게 용솟음치는 것과 관련해 볼 때 실로 낯설고 부적절하다. 이러한 경우 그 감정은 온갖 타산적인 영리함이나 온갖 공리적 계산이 전제로 하는 저 낮은 온도와는 반대의 결과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 번만 그렇다든가 예외적으로 한 순간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항구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니체, 『도덕의 계보』, 연암서가, 제1논문, 28쪽)

→ 나는 이것이 좋다, 그러므로 이것은 가치가 있다, 라고 판단할 때도 가끔 있긴 했다. 하지만 그러고 나면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반대로 가치 판단의 기준이 외부에 가 있으면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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