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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학기 소논문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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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유유자적백수 작성일19-11-11 21:38 조회8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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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제 : 인간을 자연화하라!

 

물음 1. 플라스틱 쓰레기로 인해 생태계가 병들고 있다. 코에 꽂힌 빨대를 빼지 못한 채, 바다 속을 헤엄치는 거북이, 플라스틱 그물에 목이 걸려 힘겹게 숨을 내쉬는 바다표범, 죽은 고래의 뱃속에서 나온 다량의 플라스틱 등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낸 물건들이 육해공 동식물의 생존을 위협 하는 것이다. 피해자 동물-가해자 인간! 해서 지금 전 세계는 생태계를 향한 연민과 더불어 그런 생태계를 병들게 하는 인간에 대한 자성이 하나의 커다란 담론을 형성하고 있다. 플라스틱을 덜 쓰는 것은 물론, 녹는 플라스틱을 개발한다거나, 종이 빨대의 사용, 나아가 반영구적인 플라스틱을 사용해 일회용을 줄이자는 움직임까지. 그런데 여기서 드는 한 가지 의문! 과연 지구는 인간이 플라스틱을 덜 쓰고, 플라스틱 대체물질을 만들어 사용하면 깨끗해지는 그런 존재일까?

 

물음 2. ‘중국발 미세먼지! 중국을 규탄한다!’라는 피켓을 들고 중국정부에 항의하라며 청와대 앞에서 시위하는 시민들. 그런데 과연 국내 미세먼지의 원인이 중국에만 있는 것일까? 얼마 전, 평상시 지상의 미세먼지 농도가 50일 때, 지하철 내부의 미세먼지 농도는 150, 지하철 환풍구의 미세먼지는 250이라는 미세먼지에 대한 흥미로운 측정결과가 발표되었다. 이 결과가 보여주는 건, 중국이 아니어도,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들은 매일 매일 매우 나쁨수준의 미세먼지를 호흡하고 있는 것이었다. 가시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기술이 없을 때엔 그것이 미세먼지인줄도 모르다가, 미세먼지를 측정할 수 있는 기술이 갖춰지고 나서야 지하철 내에서 호흡기 건강을 운운하는 도시인들.

공공시설에 공기청정기를 달아 달라, 더 깨끗한 지하철 환경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지만, 정작 더 빨리, 더 편하게 목적지에 가고자하는 욕망이 그런 미세먼지를 유발하는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에도, 현대인은 그 원인의 대부분을 외부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강하다. 미세먼지 보다 훨씬 더 많은 유해물질이 나오는 담배를 피우면서도 미세먼지 심한 날이라며 마스크를 챙겨 쓰는 이 이기주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1.

 

환경보호! vs 지속가능한 자연개발! 주지하듯 이 상반되는 구호에는 정답이 없다. 좌파와 우파, 흑과 백, 진보와 보수와 같은 진영논리처럼 끊임없이 갈등만 양산될 뿐, 이 구도 안에서는 어떠한 합의에도 이를 수 없다. 왜일까? 그건 이 구호가 동일한 전제위에서 논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환경을 바라보는 이러저러한 의견들은 모두 인간적인 가치평가로, 자연을 대상으로 놓고, 인간이 자연보다 조금 더 주체적인 존재라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즉 인간중심주의(인간특권주의, 휴머니즘)를 전제하는 것이다. 해서 생명, 환경, 자연, 문제가 등장할 때마다 현대인은 인간을 중심에 두고, 외부의 자연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인간인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를 고민한다. ‘개발과 보호는 바로 이러한 전제 위에서 논의되는 담론이다. 자연을 길들이는 인간! 무척 당연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할 사실은 이러한 인간중심주의는 오직 현대인만의 독특한 사유라는 점이다.

오랜 시간동안 인류에게 자연은 경외의 대상이자, 감응의 대상, 무엇보다 정복이라는 개념을 떠올릴 수 없게 만드는 대상이었다. 전 세계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칭기즈칸은 텡그리(하늘 신) 앞에서는 한 없이 겸손했으며, 모든 권력을 다 가진 황제라도 자연 재해 앞에서는 자기 정치의 부덕함을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성인 공자 조차 천둥이 심하게 치고, 바람이 거세게 불면 낯빛을 바로 했다고 전해진다.

동물에 대해선 또 어떠한가? 사냥은 언제나 목숨을 내걸고 하는 일이었기에, 부족에서는 사냥 나가기 전 사냥의 성공과 무사안위를 기원하는 제사의식을 지내곤 했다. 그 어떤 동물이라도 절대 씨를 말릴 정도로 잡아들이지 않았으며, 호랑이나 곰 사자와 코끼리와 같은 영원히 정복되지 않는 맹수들이 인간을 끊임없이 긴장시켰다.

그러나 현대인에게 자연은 더 이상 경외의 대상도, 공포의 대상도 아니다. 자연은 그 자체로 자연스레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돋보이기 위한, 인간의 행복과 생존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도무지 현대인은 천둥번개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코끼리와 호랑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현대인에게 그들은 보였다 하면 SNS 업로드 용이다. 현대인은 인간을 중심으로 그 모든 자연을 배경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니체가 자연을 바라보는 태도는 이와는 전혀 다르다. 니체가 보기에 자연은 인간이 대상화할 수 없는 존재로, 인간은 거대한 자연 안에 소속된 개체에 불과하다. 그러한 즉, 니체는 인간이 자연에 대한 모든 문제를 직접 해결해야하거나, 해결 할 수 있는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다. 인간은 자연에 대해 전혀 특권적이지도, 우월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하여 니체는 자연을 착취와 보호라는 이분법적인 구도로 보지 않는다. 오직 인간의 자연화’, ‘자연의 탈인간화를 말할 뿐이다.

니체가 인간을 자연화하라!’는 건 한마디로 인간이 자연을 대하는 방식에 들어있는 온갖 인간특권주의를 깨야한다는 의미다. 이렇게 말하면 과거와는 달리 현대인이 과학을 이용해 자연을 길들이고 있는 것은 사실 아니냐?’라는 반문이 나올 수도 있겠다. 그렇다. 인간은 분명 자연을 길들이고 있는 측면이 있다. 문제는 범위다. 인간이 길들이는 자연은 우주 전체가 아니라, 우주라는 거대한 카오스 속에서 일부 중에 극히 일부다. 니체가 보기에 인간은 다른 동식물에 비해 엄청 우월한 것이 아니라, 다른 동식물들이 자기 영역을 다스리듯, 특정한 범위 내에서 일부의 동식물을 길들이는 일개 동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 견해는 도가가 바라보는 세계관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 도가에서 인간은 나충(裸蟲)이다. 나충! 벌거벗은 벌레라는 의미로, 자연적인 차원, 지구적인 차원, 우주적인 차원에서 보면, 인간도 우주를 구성하는 하나의 미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차원에서 인간과 자연을 인식한다면, 인간이 자연과 관계 맺는 방식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우리가 생명문제를 새롭게 볼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그러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특권주의를 깨고, 인간을 생명차원에서 다시 정의하는 일이 필수다. 인간이 자연과 맺을 새로운 관계는 결국 인간이 새롭게 정의되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해서 본 논문에선 니체의 생명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현대인의 기존 생태에 대한 관점을 전환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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