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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주차 수업후기-4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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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혜정 작성일16-03-13 21:20 조회3,66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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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송스쿨 4주차 후기/ 최혜정/2016.3.13.

 

<우주변화의 원리-, >

 

1교시 사주명리 네 번째는 사주팔자 속에 나타나는 합과 충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이었다. 운명(運命)은 명을 운전한다는 뜻이며 그 속에는 시간성을 내포하고 있다. 먼저 운()에는 대운(大運), 연운(年運), 월운(月運), 시운(時運)등이 있는데, 명리학에서는 대운을 10년 단위로 본다. 대운은 각자의 고유한 흐름이 있는 반면, 세운은 1년을 주기로 하며 모두에게 주어지는 공통된 흐름이다.

 

나는 乙木이며 4대운인 사주다. 4, 14, 24, 34...로 대운이 바뀐다. 간략하게 대운에 따라 내 인생을 돌아보자. 24살 때 甲申(비겁과 관)이 대운으로 들어와서 지금의 남편과 오랫동안 친구인 듯 비겁인 듯 연애를 하였다. 44살에는 壬午(인성과 식상)가 들어와서 이 먼 감이당으로 공부하러 오게 되었다.

 

이제 합()과 충()에 대해 알아보자. 화합 한다는 뜻으로 두 가지의 순일한 각각의 오행이 하여 다른 기운으로 생성되며, 특정한 방향성을 갖는다. 천간합에는 갑기합토(+), 을경합금(+), 丙辛합수(+), 정임합목(+), 무계합화(+)가 있다. 그리고 충돌 하다는 뜻으로 원래의 기운을 억제하고 제어하는 기운이다. 천간충에는 갑경충, 갑무충, 을신충, 을기충, 병임충, 병경충, 정계충, 정신충, 무임충. 기계충 등이 있다. 충이란 제어를 통해 새로운 것으로의 변화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필요하면서도 중요한 부분이다. 천간에서는 정신적인 면에서 삶의 방향성이 달라진다는 의미에서 합의 작용이 크다고 보는 반면, 지지는 현실태의 변화와 변동을 의미하는 충의 작용이 크다고 본다.

 

나의 사주를 통해 지지의 합을 알아보자. 나의 일지에는 가 있는데 올해 세운으로 들어 온 과 합해서 라는 다른 기운이 생성되었다. 그래서 일까. 요즘 나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작은 마찰들 때문에 열내던 일들이 차츰 줄어들고 있다. 물론 공부 때문인 부분도 조금 있겠지만. 내 속에서 들끓는 기운이 오래 가지를 않는다는 점이다. 새로 생긴 기운이 를 잠재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 사주에 있는 대표적인 신살은 괴강살인데 년주(庚戌)와 시주(庚辰)에 각각 있다. 괴강살이 있으면 총명하고 리더쉽이 있으며 잘못 사용하면 괴기스럽고 괴팍한 행동하거나 극단적인 일들을 저지른다. 지금 나는 나에게 있는 괴강살을 제대로 쓰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간혹 나타나는 나의 돌발 행동으로 인해 나도 당황하는 일들이 종종 발생하고 있다. 자기에게 들어 온 기운도 운전을 잘 해야 시기적절한 기운으로 사용할 수 있다.

아무튼 일상에서 내가 중심을 잡아야 일들을 순리에 맞게 진행하는 것처럼 사주 또한 내가 중심을 잡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래야 목화토금수를 제대로 밟아 순환할 수 있는 것이다.

 

<글쓰기의 모든 어려움-이언의 세계>

 

2교시는 이옥이 말하는 글쓰기의 어려움에 대해 꼼꼼히 알아보는 시간이었다. 글쓰기는 내 속에 있는 욕망, 잠재적 역량들을 표현해 내고자 하는 자신과의 전투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무언가의 감응을 받아 그 감응이 나로 인해 쓰게 하는 것이다. 내가 체험을 하지 않으면 내 속의 욕망도 역량도 제대로 녹여 내어 쓸 수 없는 것이다. 이옥은 이언-일난에서 짓는 자가 짓는 것이 아니라 천지만물이 나를 빌려 짓는다라고 한다. 천지만물이 나를 통해 글을 짓지만, 날 것 그대로가 아닌 나의 언어로 변화되어 글로 나타난다. 나를 비우지 않고서는 다른 세계와 접속할 수 없다. 이난에서 이옥은 글을 쓸 때 자신의 지층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들에 관해서 글을 쓰라 한다. 글쓰기는 순수한 이념 자체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웃고 우는 우리 모습 그대로다. 또 오물과 피로 얼룩진, 번뇌와 칠정으로 요동치는 현실 그 자체다. 삼난에서 이옥은 작가란 자기 언어에 갇히지 않고 언어의 새로운 역량을 발견하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내 마음에 들어온 천지만물의 소리를 자기 언어로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 언어가 정보화된 언어이거나, 또는 소음으로 처리된 언어라도 상관이 없다. 자신이 속한 언어의 영토에서 한 걸음 넘어갈 수 있을 때, 그때 글쓰기는 비로소 삶이 된다.

 

<문장, 충만한 삶을 위한 길-소동파(2)>

 

3교시는 소식의 문장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이다. “소식은 만물의 모든 본성을 꿰뚫고자 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든 것에 애정을 가진 신체가 바로 소동파라는 것. 그리고 그 애정을 견지하기 위해 본성을 알려고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소동파의 글들이 살아 숨 쉬고 있다고 여기는 이유도 이 애정때문이다. 우주, 자연, 백성...에 대한 애정. 애정을 동반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감응력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람이나 사물에 얼마나 애정을 가지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나 사물을 관찰하는 방법이나 투자하는 시간들도 달라진다. 동파가 황주로 유배를 갔을 때도 그곳에 잘 적응하고 사람들과 하나 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애정에서 비롯되었다. 동파에게 기본적으로 애민하는 생각이 없었다면 그들도 그를 잘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소동파가 작성한 정책문을 보자. 소동파는 군주의 마음이 되어서, 백성이 되어서 정책문을 작성한다. 황제가 판단할 수 있는 배치를 펼치고 그 사건 속으로 몰입하게 만들어 준다. 황제가 다르게 볼 수 있는 지점을 계속 열어주고 있다. 사랑하는 마음 없이는 역지사지할 수 없다. 소동파의 이 애정때문에 황제도 감응하여 동파의 글을 조석으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소동파는 아무리 유불도라 할지라도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참을 수 없어한다. 제일 중요한 것은 지금 이 현장에서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지내는 삶이라고 소동파는 생각한다.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은 현실을 충실히 살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현장을 중요시 여기지 않으면 일상에서 항상 허무만 남게 된다. 그리고 본인 또한 주변인이라는 간극으로 괴로워할 뿐이다. 내가 사는 그 현장에 얼마나 애정을 가지느냐에 따라 자기 삶 또한 윤택해진다. 소동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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