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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차 후기-2,3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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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휴은영 작성일15-02-26 17:49 조회3,6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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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 첫날 2교시, 길쌤 방가와요. 길쌤은 "문장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잡히긴 했지만 그리 들어가는 것 대신, 좋은 문장을 우선 살펴보자고 하신다. 좋은 문장을 보면서 간접적으로 글을 어떻게 써야하는지 글이란 무엇인지 각자의 답변을 나름 찾아가보자고 제안하며 시작한다. 길쌤이 좋은 문장가라고 생각하는 한유, 소식, 이용휴, 박지원을 4주에 걸쳐 알아본다고 한다. 다른 문체를 가진 4인의 문장 기대가 가는걸. 이번 주는 한유의 시간이다.

취업 필살기, 한유
당나라 후기는 이백, 두보를 이어 한유까지 정말 문장 풍년이라 할 만하다.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들의 백가쟁명을 지나 남북조의 시대를 지나고 지나, 400여년을 안정적으로 유지된 당나라 후반이라는 시대적 분위기여서 그렇지 않나싶다. 한유 이전 7∼8C는 학문은 곧(=) 문장이었고 문벌귀족이 이를 독점하고 관직을 차지했다. 그런데 한유가 활동하는 8C 안록산의 난과 지방 세력의 흉기로 지방 세력도 사대부의 바운더리로 흡수되는 시점이다. 문장 능력이 있으면 등용이 가능한 시대에 한유가 놓여 있었다. 별볼일 없는 가난한 집안의 선비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 한유는 관으로 진출해야 한다. 고시행시를 능가하는 취업시장에 뛰어든다. 취업20수 정도는 이 바닥에서는 필수! 취업 필살기를 펼치는 한유를 보라. 그런데 어라 그의 글을 보면 배짱가득으로 관직을 구걸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구걸과 배짱은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이런 형용모순이 한유의 매력이렷다.
잠시, 역사시험에 나옴직한 ‘고문운동’은 형식적이며 사대부에게 독점적인 사륙문체에 저항하는 고문 부활운동이다. 유가 성인들의 뜻을 담지만 각자의 개성으로 변주할 수 있도록 한유를 중심으로 무대 위로 전면 등장하게 된다. 상황에 쓸려가지 않으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주저없이 펼친다. 표절, 모방은 사절! 이러하기에 그의 구직활동은 구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고급지다. 에세이 시간에 같은 텍스트를 보더라도 자신만의 글을 구현하라는 것도 이와 통하는 것인가보다. (말은 쉬운데 쩝~)
취업 필살기로 돌아가 보면 한유는 관직을 청탁할 때나 관직을 옮겨달라고 할 때도 구걸이라기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일 뿐이다. 문장 공부를 열심히 했고 이런 인재를 뽑는 것이 당연하다고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치기가 아니다. 정성을 다한 글을 보아달라고 하는 것뿐이다. 이런 사람은 설사 낙방했다고 해도 자책하거나 외부에 잘못을 전가하지는 않은 것이다. 비로소 운명을 사랑할 수 있는 자세이다. 신입사원이 자신의 비전을 포트폴리오에 담고 인간됨까지 은근히 풍기며 자신의 처지를 뽀샵 없이 당당하게 말한다면 이런 구걸 괜찮다. 드라마에서도 이런 신입사원 면접 때 “패기와 솔직함이 맘에 드는군.”이라는 오너의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듣게 된다. 솔직함이라는 미덕, 최선을 다하나 안쓰럽지 않다. 그의 글을 보다보면 끌려가는 듯하나 끌려가지 않는 장력이 느껴진다. 이건 무슨 신공일까. 자신을 “어마어마한 괴물”이라고 풀어내는 문장에서는 재치와 기개가 넘친다. 이 또한 글쓰기에 필요한 항목이 아닐지.
“책에 남아 있는 것들은 크기가 하해와 같고 높기가 산악과 같으며, 밝기가 일월과 같고 어둡기가 귀신과 같습니다. 또 섬세하기는 둥근 구슬과 네모난 구슬과 꽃과 열매와 같고, 변화무쌍하기는 번개와 우레와 바람과 비와 같습니다.” 책을 만나서 얻는 한유의 감응을 표현하는 글귀다. 아마도 이런 감응을 가지고 문장을 만들었기에 그의 문장은 탁월할 수밖에 없다. 그의 말대로 소리 내어 울도록[鳴] 하는 존재의 진동이 가득 찼을 테니 말이다. 삶에 대한 감응이 미약한 나의 신체성은 늘 책을 만나긴 하지만 깊은 감응에 실패하고 만다. 아니 깊이 만나려고 뛰어든 적이 없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살짝 스쳤을 뿐. 소망한다 이런 만남을~. 아니 뛰어든다 이런 만남으로!
생명은 기울기나 차이로 가능하다는 단순명제에 머물러 있던 내게, 한유가 시인 친구 맹동야를 보내며 쓴 서(序)는 신기하기만 하다. 천지의 기울기를 울음으로 표현하다니 그렇다고 서글프거나 아픈 느낌은 아니다. 외부와의 부딪힘인 불평(不平)에서 오는 춘하추동의 명(鳴), 음악의 명, 희노애락애오욕의 향연으로서의 명, 그리고 최종 심급은 문장의 명, 내 존재의 불평을 글쓰기 과정을 통해 평으로 만드는 즐거운 공부의 명, 캬~.

세상에서의 한유
한유는 또한 문장으로 밥벌이를 얻는 것에 더해 “성인의 도”를 담은 문장으로 사회에 참여한다. 재상께 인재를 천거함으로 널리 숨어있는 인재들을 길어 올리라는 글을 올린다. 그 시대를 담고 격파할 수 있는 뜻을 담은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세상에 영합하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포부도 담는다. 외물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정성을 다하는 바탕을 다지면 그뿐이라고. 세상에 영합하지 않는 글을 통해 자신을 다지고 다진다. 그리고 아쌀하게 세상에 등용이 안 되면 학문을 하겠다고 한다. 역시 운명애이다. 그의 표현을 빌면 하늘의 뜻이 한유라는 악기를 통해 운다[鳴]고 할 수 있다. 글이 세상을 얼마만큼 바꿔내는지는 모르겠다. 바른 말이 차고 넘쳐도 세상은 벼랑을 향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는 아름답게 운 것이다. 그 아름다운 울음이 자신의 삶과 더불어 누군가의 삶을 바꿔낼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글은 사라지지 않는다.[不朽] 내 존재의 의미를 세상에 남기는 것도 한유가 문장을 쓴 이유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좋은 문장이란
훌륭한 성현의 가치를 닮기 위해서 다음의 단계를 거쳐 글을 쓰라. 첫 단계에서는 완벽하게 책에 몰입해서 글의 진부함을 떨친다. 주위의 비웃음을 받아들여라. 두 번째 단계에서는 무엇이 부족한지 객관적으로 보이니 글이 잘 써지는데 여전히 평가에 신경이 쓰인다. 세 번째 단계, 도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도가 드러나는 단계. 네 번째 신체성이다. 기가 충만하게 하라. 욕망에 좌우되지 않는 호연지기를 기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기운이 글이 되기 때문이다. 생활이 방만하면 글도 방만해진다. 명심명심 또 명심. (끄덕끄덕×100회)
마지막으로 초특급 울트라급 정리, 뜻만 본받고 언어는 본받지마라. 쉽고 단순하고 간결한 문장으로 자신의 뜻을 드러내라. 답습하지 말고 스스로 세워라.[自樹立]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인데 말이죠^^) 그리고 홍대용의 말도 명심하자. “서두르지 마라.”“책을 읽으면서 자기 견해부터 세우려는 마음을 경계하자.” (찔림×10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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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시간은 몸과 인문학에 대한 곰쌤의 시간이다. 곰쌤 말씀대로 만담처럼 구성지면서 시대의 이야기이자 우리 몸에 관한 이야기였다. 곰쌤은 동의보감, 인문의역학적 사고를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엮어서 술술술 말씀하신다. 그냥 이것저것 하고픈 말을 쏟아내시는 듯한데 고리가 있다. 이것이 신통이 아닐지.

사생활로 숨어드는 사람들
공부하자고 모인 사람들이니 배움 말고는 존재를 구원할 수 없다는 이야기로 요이땅. 얼마 전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씨가 TV 강연에서 공부만큼 재미있는 것이 없다고 마무리 하는 것을 보았다. 당연한 명제이지만 생소한 이슈이기도 하다.(배움만한게 없다는 말에 방청객은 호응하지 않는 분위기) 공부를 통해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은 분명 재미있는 일이고 그 간극에서 존재는 당근빠다 고양될 수 있다. 스스로 재미를 찾고 만족하지 못하면 외물에 끄달리어 중독이라는 생활패턴을 갖게 된다. 특히 관계에서도…. 중독은 둘째시간에 이야기한 호방한 기운의 자수립에서 오는 생활과는 반대의 길로 헛짓하는 셈일 것이다. 새로운 것이 없으니-곰쌤의 말에 따르면 지루하니까- 자꾸만 자본주의가 쳐놓은 이미지에 끌려다닌다. 새로운 것에 대한 욕망은 삶의 의지인가보다. 그런데 핀트가 잘못 되었다.
동양우주론의 기반인 음양오행의 기운은 항시 변하고 있다. 그러니 이 변화속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면 현재를 느끼지 못하고 외부에서 주어지는 이미지에 휩쓸리기 일쑤다. 특히 몸에 대한 얼토당토한 상,(몸매애愛, 40대인 나도 여기에서 자유롭지 않다) 요즘에는 신상으로 부성애를 강조하는 가족에 대한 왜곡된 상이 출시되었다. 타자에게 위로받고 이해받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갈구는 스테디셀러의 위치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쇼핑고수?답게 비유가 쪼매 거시기하다.)
거기에 요새는 SNS 시대답게 개인사생활이 투명하게 차고 넘치는 시대이다. 동양은 사생활이라는게 따로 없는 문화라고 한다. 삶이 있는 것이다. 안그러면 이중생활의 연막장치가 작동한다. 삶이 괴리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실제 사생활이 아닌 것을 사생활인양 절단해서 올리면서 오히려 세상일에 대한 관심은 쪼그라들고만 있다. 카* 잠시 해보았는데 시간 잡아먹는 귀신이다. 에너지가 투여된다는 말씀. 뭔가 뿌듯한 기분도 든다. 무언가를 만들고 장식하는 기쁨이 쏠쏠하다. 하지만 그 안의 비교와 과시 욕망은 씁쓸함을 넘어선다. 이렇듯 가족으로의 횡보이든 사생활로의 귀착이든 작은 일에 끄달리면서 정작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는 문을 걸어 닫는다. 정말 행복이 거기에 있다고 믿는 것일까 싶다. 남들에게 보란 듯이 보여야 하고 실제의 질펀한 삶은 숨어버리는 형국이다.

직립하는 인간
인류는 왜 그토록 직립하려고 애를 썼을까라는 곰쌤의 이번 주 키포인트가 신선했다. 자립하기 위해서 두 손이 자유로워져야 했고 그로인해 하늘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천지에 감응할 수 있는 신체가 된 것으로 이해하면 될까. 직립으로 수승하강하는 조화가 필요한 신체가 되기도 했다. 실은 아직 인과가 잘 엮이지는 않는다. 어쨌든 두발로 서는 자립하는 신체성을 가졌으니 윤리적으로도 자립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로 정리하고 갑니다요~. 자립이 안 되는 나약한 신체이니 울 준비가 되어있을 뿐(토크쇼 모녀이야기를 하셨는데) 새로운 것을 만나려는 배움의 길과는 담을 쌓는다. 아마도 그 담이 눈물이 되는 것이지 싶다. (나도 드라마 보며 엄청 우는데 에구머니 담덩어리)
리얼 스토리에 나온 6명의 할머니가 함께 사는 예를 이야기하면서 가족은 각자의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어야만 소통이 가능하다고 하셨다. 각자의 네트워크가 살아있어야 생의 기운이 순환하며 자살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소통이란 서로에게서 새로움을 발견해가는 과정이라고 한다. 실로 무언가를 배울 때 삶이 똑같다면 그건 배웠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장착하지 않았던 감각 기능을 점유하는 것, 이것이 나의 존재를 우주적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러려고 직립한 것인가 보다.
나에게 작년은 밥세끼 챙겨먹고 잠좀 일찍 자고 남일 신경 덜 쓰는 한해였다. 올해는 쇼핑 중단, 청소, 운동, 필사를 체화하는 한해로 잡았다. 욕망에 끄달리지 않는 신체성 회복을 위한 간략한 프로젝트! 삶을 향상시킨다는 것은 새로운 감각으로 신체성을 기르는 것의 다른 이름이지 싶다. 온전히 두발로 일어서라!!
마지막 말씀으로 우주는 암흑물질로 덥혀 있는데 그것이 중력장의 역할을 한다고∼. 공부에서는 조원이 그 역할을 한다고 하시면서 끝! 조모임으로 헤쳐 모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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