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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기 3주차 수업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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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미승 작성일16-05-20 09:40 조회1,8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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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교시 의역학
 
  「몸의 노래동의보감을 나란히 읽으며 몸을 탐구해 보는 세 번째 시간. 생명이 혈과 기에 뿌리박고 있다고 생각하는 점은 같지만 서양은 분절된 근육으로 동양은 안색으로 그 생명력이 드러나는 것으로 보았다. 지난 시간에 비교해 봤던 박동이라는 개념과 연결되면서 동서양의 몸에 대한 시선이 다름을 확인했다.
  ‘서양에서는 왜 근육에 주목하고 그것을 자명한 것으로 보았는가?’의 물음에 다양한 자료를 통해 답을 구하는 과정을 따라가 보았는데 대부분 처음 들어보는 얘기들이어서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그리고 동양에서의 색에 대한 탐색과 안색이 어떻게 한 사람의 상태를 말해주는지를 논의하는 부분이 재밌게 생각되었다. 또 공자와 맹자의 말을 예로 들어 안색에 윤리와 도를 개입시키는 것에 수긍이 갔다. 동양에서는 어떤 현상 또는 문제를 세계와 분리시키는 관점이 없었던 것에 반해 서양은 자아형성을 하면서 모든 것을 세계와 분리시키려는 생각을 했다는 점에서 몸을 보는 시선의 차이가 나왔던 것 같다.
  그리고 어디에 있다고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 몸을 구성하는 중요한 물질인 정··신중에서 가장 물질적인 에 대해 알아보았다. 물이 없는 곳에 생명체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정은 생명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음식을 먹어 후천의 정을 보충할 수는 있어도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선천의 정(진정)은 소진만 될 뿐 채울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이 소모되지 않도록 각별히 힘써야 한다. ‘정을 아끼자!’가 동의보감의 핵심이기도 한 까닭이다.
  쾌락을 위한 활동이 정을 소모시킨다. 남자는 성욕, 공격적인 사업, 주식 등을 자제해야 하고, 여자는 쇼핑, 식욕 등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정이 부족하면 감정조절이 안되고, 무엇엔가 중독이 되어 자신을 조율할 수 없게 된다. 정은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다.
 
2교시 강독과 낭송
 
  「에티카를 접하면서 만나게 된 실체(), 속성, 양태라는 말들. 지난 시간에 이어 이 생뚱맞은 개념들과 씨름을 하면서 줄곧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다. 조장 샘들의 강의와 함께 그림과 표가 동원되고 반복에 반복을 해서 따져봤다. 어떻게든 이것들을 이해하는 문을 통과해야 이 책을 읽을 수 있을 텐데 머릿속이 복잡했다.
  만물(인간을 포함)이 신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스피노자는 실체, 속성, 양태의 관계를 정립해야 했다. 실체는 분할될 수 없는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된 것이고, 양태는 실체()를 구성하고 있는 속성이 특정한 방식으로 변용된 것이다. 그러므로 양태(만물)는 신의 속성과 상관없이 창조된 피조물이 아니라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속성들의 변용이라는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속성은 신과 양태 사이의 공통성이다. 그래서 신은 만물 바깥으로 나가는 초월적인 신이 아니라 만물에 내재하는 신이 된다. 다시 말해 만물이 신 안에 있다는 것은 속성의 공통성을 통해 신의 변용으로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유비추론의 방식으로 신과 만물사이의 공통성을 부정하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것을 공식처럼 표현하면 : 무한한 선 = 인간 : 유한한 선이 된다. 그러나 이렇게 인간과는 다른 숭고한 신을 얘기하는 신학자들은 결국 논리모순에 빠지고 만다. 신에 대한 유비추론적인 인식 방법은 그저 피조물들에게서 몇몇 특징들을 따와서 그것들을 신에게 다의적으로 귀속시키거나 탁월한 것으로 귀속시킨 것에 불과했다.
  유비의 방법을 통해 최고로 선하고 정의로운 신에 대한 숭배를 하게 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부정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속성 개념은 결코 부정과 관계하지 않는다. 유비에 의한 긍정에 속하지도 않고 탁월성에 의한 부정에도 속하지 않는다. 신과 피조물이 속성이라는 공통성을 중심으로 구성된다는 것, 신이 속성을 탁월하게 소유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 이것이 긍정의 철학을 만든다.
  또 스피노자는 신의 본성이 오해되어왔던 이유를 탐색하면서 오히려 성서를 그 돌파구로 삼아 작업했다. 그렇게 해서 쓴 책이 신학정치론이다. 대체로 신학자들의 주요 관심은 성서에서 자신들이 멋대로 날조한 생각들을 억지로 끌어내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성서가 진정으로 가르치고 싶었던 것은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랑의 삶 속에 구원이 있다는 것이었고 이것이 평범한 대중들에게 말해 주고 싶었던 것이었을 것이다.
 
3교시 고전과 글쓰기
 
  「맹자, 공손추편을 읽고 공부하는 시간이었다. ‘부동심(不動心)과 호연지기(浩然之氣)’라는 말은 일상생활 속에서 종종 쓰이는데, 그 말이 탄생한 곳에서 얘기하는 의미는 우리가 가볍게 사용하는 뜻보다 훨씬 깊고 넓으면서 명확히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맹자는 부동심에 관한 제자 공손추의 물음에 그것은 북궁유의 용기처럼 무조건 자기 바깥의 힘에 대항하는 것도 아니고, 맹시사 스타일로 자신의 힘이 약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돌진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고자가 한 말을 가져와 설명한다. ‘不得於言, 勿求於心; 不得於心, 勿求於氣.’ 맹자는 부득어언, 물구어심’, ‘말에서 얻지 못한 것을 마음에서 구하지 말고에 대해서는 옳지 못하다고 하면서, 말이 이해되지 않으면 마음으로 볼 수 있다(知言)고 했다. 그리고 부득어심, 물구어기’, ‘마음에서 얻지 못한 것을 기에서 구하지 말라.’는 그런대로 옳은 얘기라고 했다.
  호연지기는 기본적으로 集義하는 것, 즉 돌발적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의로움에 의해 일상적으로 축적되는 것이다. 여기에 必有事焉, 勿忘, 勿助長이 추가 되어야 하는데, 의로움을 실천하는 것이 반드시 사건 속에 있어야 하고, 의를 배양한다는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되지만 빨리 효과를 보기 위해 조장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동심을 위한 호연지기는 내 마음이 가 닿아있는 것에 대해 의로움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는 다 똑같지 않고, 나의 는 나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내 스스로가 떳떳할 만큼 행하는 것이다. 또 작은 일이라도 내 마음을 다했으면 의를 행한 것이고, 큰일이라도 마음을 다하지 않았다면 의를 행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텍스트를 숨 가쁘게 따라갔다. 그리고 선생님은 부동심이 무엇이고 호연지기가 무엇인지 단순하게 분석하지 말고, ‘내 생활에서 부동심이 뭘까?’ ‘집의한다는 게 뭘까?’를 생각해 보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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