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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학기 의역학 시간 8주차-1교시만 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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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휴샘 작성일16-12-02 11:53 조회2,0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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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송스쿨 4학기 8주차 1교시 후기


1교시 동의보감 외형편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지희쌤이 발제해 주었어요. 수, 족, 모발, 전음, 후음. 두, 면을 시작으로 해서 항문까지 왔어요. 먼 여행을 한 거죠. 단순한 인체여행이 아니라 정, 기, 신이라는 기의 흐름이 관계망 속에서 드러나는 구체적 현장을 살펴보았습니다. 팔, 다리 사지는 비장에 연결됩니다. 갑오, 을미년 목극토의 영향이었는지 사지가 힘이 없다는 걸 지대로?! 경험했지요. 자라는 시기도 아닌데 밥 먹고 돌아서면 또 밥이 땅기던 그 날들~ 비장이 안 받혀 주니 위장이 진액을 못 받아들이니까 더 달라고 아우성이었나 봅니다. 그래도 오행은 흘러가기에 다시 팔다리를 잘 놀리고 있습니다. 위증(僞證)은 팔다리가 늘어지고 약해지는 병을 이르는 말인데 폐가 더욱 조해져서 피와 뼈가 영양하지 못합니다. 그래서였을까 어쩐지 코안이 계속 마르더라구요. 폐에 병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을 잃어버리거나 바라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입니다. 지족의 삶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쩜쩜쩜 말줄임.


모발은 현대 의학적으로나 한의학적으로나 위로 올라가는 성질의 열을 조절하는 역할을 합니다. 한 오라기의 털도 그냥 있는게 아니군요. 자연스레 떨어져 나가는 건 흘려보내고 그렇지 않은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죠. 머리를 빗는 양생법은 여기저기 많이 소개되던데 이러한 열을 내리는 원리를 품고 있었어요. 곰쌤이 빗질을 열심히 하신다니 따라 해보고 싶어집니다. 털이 여러 곳에 있잖아요. 그런데 눈썹이 헐벗은 저는 눈썹이 목의 기운을 받는다는 문구가 눈에 띕니다. 아~ 역시나 목기 운이 엷은 것을 숨길 수가 없네요. 오장의 상태에 따라 늙어서 하얘지는 속도가 다르니 주위 깊게 보면 이 이치가 더 피부로 다가오겠군요.


생식기가 있는 구멍은 전음입니다. 전음에 두드러지는 병은 ‘산증’입니다. 찬 기운으로 아랫배가 뻐근하며 대소변이 나오지 않는 증상입니다. 몹시 화내거나 과식, 지나친 성생활 이 3종 세트 중 하나 이상이면 간이나 위에서 생긴 열이 비에 습연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남성의 전립선염, 여성의 음부 질환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후음은 항문을 말하는데 대장보다 넓어 광장이라고 합니다. 대장과 마찬가지로 폐에 해당하지요. 항문에 생기는 질병의 대표 주자는 치질이잖아요. 근데 몸에 있는 9개의 구멍에 솟은 것은 모두 ‘치’라고 하는 게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머리에서 시작한 이 여행의 끝은 구멍이었던 거죠. 구멍이 이렇게 계열화 되니까 새롭게 보입니다.


장금쌤이 입에서 항문까지의 소화기를 도덕경의 바퀴통에 비유해서 말씀해주셨어요. 비어있는 기다란 소화관을 통해 외부의 기운이 드나들어 바큇살이 몸의 움직임을 낳는 것이 빈 바퀴통과 움직이는 바퀴살과 같지 않은가 하고요. 그렇습니다. 저는 좀 더 키워보았어요. 그 빈 공간, 우주는 밝혀지지 않은 빈 공간이 떠오릅니다. 생명활동은 그 공간들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하고요. 도덕경으로 마무리라 역쉬 장금쌤입니다.


1교시 현대 의학적 접근도 마지막입니다. 면역의 의미론 세 번째 시간입니다. 면역이라는 시선으로만 보아도 불교적 세계관과 통하는 것이 신기합니다. 미시와 거시가 통하는 거죠. 아니 다르지 않은 거라고 해야 할까요. 계속 등장하는 ‘자기’와 ‘비자기’라는 용어가 반복되니 익숙해졌어요. 자기와 비자기가 고정된 게 아니라 계속 환경에 따라고 변하고 있습니다. 고정된 ‘나’가 있지 않다는 ‘무아’를 이야기 하고 있어요. 소화관은 외부이면서 내부인 오묘한 공간입니다. 자기와 비자기의 ‘사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칩니다. 우리는 그 사이에 있으면서 경우에 따라 여기까지 나고 저기부터는 아니고 이렇게 인식하며 생명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 경계는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며 필요에 따라 계속해서 변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자기와 비자기를 인식하는 것에 의해 생명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12장의 스토리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암도 에이즈도 그 활동들의 변주입니다.


외부가 아니더라도 우리 안에는 자기와 비자기 물질이 존재합니다. 자기를 어디까지라고 보아야 하는지는 외부물질과의 접촉을 통해서 훈련됩니다. 자 그렇다면 자기를 공격하지 않는 이유를 ‘관용’이라고 하는데 이에 대한 정확한 원인은 밝혀있지 않습니다. 미리 정해진 게 아니라 현장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은 명확합니다. 이 과정에서 그 관용의 범위가 적합지 않을 때 자기를 파괴하는 면역계 질환이 생깁니다. 저는 잠시 의문이 들었습니다. 현대의 자가면역 질환들은 관용이 과해서 그럴까 반대일까요. 타자와 담을 쌓는 현대에 접촉이 필요하다보니 자기를 비자기로 인식하면서까지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우선 듭니다. 아니면 무수한 정보들을 적합한 인식 없이 무한 받아들이다보니 자기와 비자기를 고르도록 하는 훈련소인 흉선 프로그램에 혼선이 온 것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렇다면 자가면역 질환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자기와 비자기의 충돌이 약할 경우, 자기에 의문을 갖지 않을 경우 자기 파괴의 방식으로 그 인식 능력을 깨우려고 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발제문에 “‘자기’와 ‘비자기’의 식별은 문맥과 내용 양쪽을 읽는 방식에 의존하게 된다.” “사람의 HLA(사람의 조직적합 유전자)와 관계있는 유전자좌가 6개이므로, ‘자기’는 이 6종류의 문맥으로 기술될 수 있는 내용의 총체이다”라는 내용이 확 들어옵니다. 6종류의 문맥은 사주명리의 육친으로, 사람마다 욕망의 방향이 이리저리 때에 따라 교차되면서 그 안에서 자기가 식별되는 게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관계망 속에서 접촉하며 자기를 인식하고 살아간다고 생각하니 삶의 무게가 더 피부로 스며드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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