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 수업 공지입니다. ^^ > 금요 감이당 대중지성

금요 감이당 대중지성

홈 > Tg스쿨 > 금요 감이당 대중지성

서브배너_금성.png

금성 수업 공지입니다. ^^

페이지 정보

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7-02-12 08:04 조회3,642회 댓글1건

본문

금성 전체 매니저 박장금입니다.

좌충우돌하면서 오티를 시작했지만

공지는 간단하게 하겠습니다. ^^

먼저 조 편성을 알려드리겠습니다.

1. 조 편성

1조

2조

3조

1.김석연(조장)

1.성승현(조장)

1.김희진(조장)

2.이성남

2.김주란

2.김지숙

3.정기재

3.고은주

3.이경숙

4.이한주

4.장현숙

4.강미정

5.안혜숙

5.김현화

5.안상헌

6.양석준

6.이민경

6.김해숙

7.박장금

7.성연

7.신혜정


다음은 수업진행 내용입니다.

1교시 글쓰기

1) 고전 톡톡 1부 분석해서 10~15분 분량 발표

: 쓰기 형식에 유념해서 분석하기, 시작을 어떻게 하고, 중간 논리를 어떻게 끌고 가고,

  마무리를 어떻게 하는가를 체크해야 합니다.

 발표자 : 1장(이성남), 2장(고은주), 3장(김지숙)


2) 리라이팅할 책 선정이유 발표 : 10~15분 분량 발표

 발표자 : 박장금(동의보감 부인소아편), 김해숙(조르바), 성연(들풀)


2교시 주역

2괘씩 발표합니다.  

발표자 : 안혜숙, 김주란

* 8주 후에 16괘 시험을 봅니다.


3교시 세미나

'텍스트의 포도밭' 발제(1~4장),

분량 : A4, 2장

발제자 : 양석준(1,2장), 안상헌(3,4장),

*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는 절판으므로 제본을 맡겼습니다.

* 2학기부터는 그룹별로 세미나를 합니다.


그럼 1년을 아니 우선 1학기를 무사히 보내보아요. ^^a

댓글목록

감이당님의 댓글

감이당 작성일

아래는 수성에 문탁샘께서 올리신 댓글을 퍼왓습니다. 참고하셔서 서문을 무사히 잘 읽어오시길! ^^;

- 아래-

<텍스트의 포도밭>... 읽어보니 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싶으시지요?
일리치 책이 좀 그렇습니다. "정말 좋은데...정말 좋은데".... 근데 하하하....읽기가 좀 까다롭습니다.
하여..제가 준비했습니다.

첫째, 영어와 함께 보세요. 그럼 조금 낫습니다.
https://www.uvm.edu/~asnider/Ivan_Illich/Ivan%20Ilich_%20In%20the%20Vineyard%20of%20the%20Text%20.pdf

둘째, 서문을 제가 거의 새로 번역했습니다. (앗...근데 요기선...첨부파일이 안되는군요. 그냥 긁어서 올려드립니다)
크게 다르지 않은 듯 해도....ㅋㅋㅋ.... 약간 다릅니다. 이걸 잘 읽어보세요.

머리말

p8
*이 책은 '학자식 읽기(scolastic reading)'의 여명을 기린다(commemorate). 그것은 문자중심(approach to letter)의 출현 - 슈타이너가 ‘책 중심(bookish)'이라고 부른-을 말하는 것인데, 이 문자중심이 바로 800년 동안 서구 학교제도의 건립을 정당화해왔다. 보편적인 책 중심주의는 서양 세속 종교의 핵심이 되었으며, 서양 세속 종교의 교회를 학교화(schooling)했다.
*그러나 이제 책 중심주의도 사라지고 다른 교육기관이 급증했다. 즉 스크린, 매체, ‘커뮤니케이션’이 페이지, 문자, 읽기를 대체했다. 
*나는 책 중심주의가 사라지고 있는 시대에 책 중심주의의 출발점을 다룬다. 왜냐하면 바로 지금이 학자식 읽기의 독점 하에서는 번창할 수 없었던 페이지에 대한 다양한 방법을 계발할 수 있는 적기이기 때문이다.
p10
*알파벳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에 관심을 기울임. 이 순간은 페이지가 경건하게 웅얼거리는 사람들을 위한 악보에서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비주얼 텍스트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후 이런 새로운 읽기가 사회활동의 가장 기본적 은유가 되었다.
p11
*책의 시대에 속한다는 것은 읽기의 수단을 소유한다는 뜻. 책은 가정에 두는 물건이고 마음대로 다가가 다시 읽을 수 있는 것이 되었다. 또한 이런 시대는 저널, 학술기관, 커피모임(coffee circle)의 시대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책 문화는 텍스트의 가치와 양식에 대한 일반적 규범(正典/canon)을 요구했고, (이를 다루는 전문가를 발생시켰다.)
p12
*이제 책은 시대의 근원적 은유가 아니다. 스크린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알파벳 텍스트는 지금은 ‘메세지’라고 부르는 뭔가를 코드화(encode)하는 다양한 방법 중의 하나이다.
*책중심 읽기(bookish reading)은 시대적 현상이지 알파벳의 합리적 이용을 향한 진보에서 논리적으로 불가피한 단계는 아니었다는 것, 문자가 적혀진 페이지와 상호작용을 하는 여러 방식 중의 하나였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서로 다른 스타일의 읽기가 공존한다는 것은 더 이상 새롭지 않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이행(악보→텍스트)이 이루어지는 순간에 주목하는 것이다.
*슈타이너와 함께 나는 교육 제도밖에 ‘읽기의 집 houses of reading’ 같은 것이 있으리라고 꿈꾼다. 그것은(houses of reading)은 유대교의 shul, 이슬람의 medersa이나 수도원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읽기에 집중된 삶에 대한 열정을 가진 몇몇이 책을 기리는 어떤 '정신성(spritualities)'이나 방식(styles) 그 어느 쪽으로든 길게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안내와 고요, 그리고 절제된 동료애의 도모를 찾게 될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읽기 수행(asceticism)이 꽃을 피우려면 우선 지난 450년 동안 이어진 책 중심의 ‘고전적’ 읽기가 알파벳 테크닉을 이용하는 몇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p13-2
*이런 이유로 첫 여섯 장에서 인쇄출판(movable type)이 이루어지기 300년 전인 1150년 겨에 일어난 테크놀로지의 약진을 묘사하고 해석했다. 이 약진은 페이지를 악보에서 텍스트로 변화시킨 테크놀로지와 관련된 몇 가지 이상의 발명과 장치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다. 여러 테크닉과 습관들이 모인 덕분에 ‘텍스트’를 페이지라는 물리적 현실로부터 떨어진 뭔가로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p14
*나는 후고의 <디다스칼리콘>에 코멘트를 달면서 중세 독서습관의 역사적 행동학(ethology)과 더불어 12세기 ‘상징으로서의 읽기’에 대한 역사적 현상학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는 수도사적 읽기(monastic reading)에서 학자적 읽기(scholastic reading)로의 전환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다른 전환에도 약간의 빛을 던져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p15
*이 새로운 유럽사는 사회와 그 표기 체계 사이의 상호결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나도 문자문화(literacy)의 역사를 연구하지만, 이것은 읽고 쓰는 능력의 역사도 문학의 역사도 아니며, 글쓰기 테크닉의 역사도 아니고, 상인, 법률가, 시인이 글쓰기를 이용해온 역사도 아니다. 이는 오히려 개념적 공간의 원리와 사회적 현실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역사로, 이런 상호관계가 문자를 이용하는 테크닉에 의해 매개되고 형성되는 면을 살핀다. 이 역사는 문자에 의해 형성된 것, 즉 Schriftstück(문서)에 직접 초점을 맞추어, 이 대상이 규정하는 행동, 그리고 이 대상과 이 행동에 주어지는 의미를 연구한다. 우리는 무엇보다 그것이 한 시대가 세계, 사회, 자아를 이해하는 방식의 본질, 원천, 한계를 다양하게 응결해온 과정을 연구한다.
p16
*알파벳적 인식론의 역사야말로 우리가 살펴보기로 한 주제다. 문자에 의해 형성되는 대상들, 그 사용과 관련된 습관과 환상에 초점을 맞춰 분석함으로써, 우리는 그 대상을 서양 사회의 정신적 형성에서 의미심장한 변화를 비추는 거울로 바꾼다. (mental sphere)
*알파벳의 영향을 보여주기 위해 오랜 역사 가운데 12세기 초를 선택한 것은 내 이력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수십 년 동안 성 빅토르의 후고에게 아주 특별한 애착을 느끼게 되었으며...내가 후고의 <디다스칼리콘>에 대한 해설을 쓰는 것은 논리적이고도 어울리는 일로 보였다. <디다스칼리콘>은 읽기 기술(art of reading)에 관해 쓴 최초의 책이기 때문이다.
p17
*나는 학문적 기여를 하려고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다. 내가 현재를 바라보는 새로운 통찰을 얻었던 과거의 한 시점에 다가가도록 안내하기 위해 쓴 것이다. 나의 주석을 학문의 증거나 그쪽으로의 초대로 잘못 받아들이는 사람이 벗기를 바란다. 주석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은 한 사람이 어떤 구역을 자주 걸으며 주워 모았고, 이제 그 풍부한 기념물 - 돌, 동물, 식물 -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주로 독자들에게 도서관 서가로 가서 여러 읽기 유형을 실험해보라고 권하기 위해서이다.
*이 글은 테크놀로지의 역사 연구에서 시작되었지만 결국 마음의 역사에 관한 새로운 통찰이 되었다. 우리는 후고의 아르스 레젠디 ars legendi를 수덕 훈련 (ascetic discipline =수행)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책중심 텍스트(bookish text)의 방패 아래서 이러한 읽기 양식이 어떻게 생존했는가를 묵상(meditation)하다가 우리는 컴퓨터 리터러시의 위협에 직면한 수행(asceticism)의 역사적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