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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기 3주차 후기_양수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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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비타빈 작성일22-08-18 20:22 조회399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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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 태어나면 아플 수밖에 없다>
동의보감에서는 기·형·질이 갖춰지면 ‘아’가 생기고 살면서 얻는 피로들로 ‘채’로 넘어가며 피로가 차곡차곡 쌓이면 ‘병’으로 드러난다고 했다. 탄생하는 순간 질병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 다양한 병 때문에 “아파서 죽을 것 같다.”고 골골대는 현대인은 도대체 “아파야 산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 하는 것일까?
  원하는 대학입학이 삶의 전부였던 재수시절, 갑자기 왼쪽 눈에 이물질이 낀 듯 세상이 뿌옇게 보였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똑같았다. 선천적으로 시신경이 약했고 어릴 적 사시교정 수술을 받은 병력이 있기에 나는 이 증상을 피로누적으로 일어나는 일시적 현상이라 여겼다. 그러나 담당 의사는 망막박리라는 병명을 얘기하며 병이 꽤 진행되었으니 긴급수술에 들어가자 했다. 망막박리 수술 후 보험금 수령을 위해 뗀 진단서에는 “내 눈이 왜 이렇게 된 거지?”에 대한 답이 적혀있었다. 원. 인. 불. 명. 불치병도 아니고 현대의학의 비약적 발전을 운운하는 시대에 원인을 밝힐 수 없는 병이 뭐 이리도 많은가 싶었다. 동시에 병의 원인을 모르는데 재발 가능성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지 막막해졌다.


<몸이 아프면 자기 일상/삶을 돌아보라>
병의 실마리는 의외인 곳에서 찾았다. 여느 날처럼 의사의 처방전을 보고 안약을 주던 약사가 슬쩍 꺼낸 말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사람마다 신체에 약한 부분이 있는데 스트레스가 쌓이거나 심신이 힘들어지면 자기의 약한 부분으로 병이 발현된단다. 나는 눈이 약하게 태어났고, 스트레스가 심하거나 화를 내면 열이 위로 솟구치며 안압이 올라가 눈에 과부하가 걸리니 조심하라고 당부한다. 열을 잘 다스리는 일이 핵심인 줄은 알겠지만 안타깝게도 대한민국 수험생인 내게 입시가 아닌 다른 삶의 방식은 생각해 볼 여지가 없었다. 나는 스트레스만 적절하게 잘 해소할 수 있으면 화가 쌓이지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다시 원래의 일상을 살아갔다.
  꿈도 욕심도 에너지도 과다 분출된 이십대 시절, 무슨 도장깨기도 아니고 “도전! 세계탐험~”을 외치며 배낭여행을 떠났다. 여행 후반부 어느 날, 해변을 향해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굴리다 코너에서 슬라이딩을 하며 넘어졌다. 왼쪽 팔과 옆구리 다리 전체가 까지고 피멍이 들었다. 그리고 몸은 몇 년 전보다 더 큰 위험 신호를 보내왔다. 수술을 했던 왼쪽 눈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병을 살피다보면 새로운 삶으로 가는 문이 열린다>
“이제 그만 좀 돌아다니면 안 될까? 한국에서 좀 조용히 지내자. 일도 웬만하면 행동반경이 크지 않는 걸로 선택하면 좋고.” 담당의사가 두 번째 망막박리 수술을 하고나서 내게 조언했다. “내가 타고난 것과 나의 행동(삶의 방식)이 맞지 않을 때 몸이 신호를 보낸다.”는 복희씨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 하고 싶은 것들에 제약이 생긴다고 하니 억울했다. 병이 걸리면 흔히들 하는 “왜 내게 이런 일이!” 탄식이 입에서 절로 나왔다. 남은 한 쪽 눈이라도 잘 간수하고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이 왕성한 활동력에 제동을 걸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새로운 문이 열린다고 했던가. 덕지덕지 붙은 습을 다른 방향으로 틀 수 있는 기회의 문이 다시 열렸다. 그때부터 나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자고 마음먹었다. 나의 타고난 신체적 특성과 체력, 마음의 메커니즘, 고착행동, 생활습관 등등 객관적으로 찬찬히 살폈다.


<나를 주체적으로 관찰하고 일상을 재배치하라>
복희씨가 들려준 ‘류마티스 관절염과 함께 살아가기’ 이야기 속에서 나와 닮은 그녀의 과거 모습들이 언뜻 언뜻 보였다. 나는 그녀처럼 세상 잡다한 것에 호기심이 많았다(그러다보니 관심사가 자주 바뀌었다). 모든 걸 몸으로 부딪히고 경험하며 삶의 즐거움과 의미를 찾았다. 반복적인 일상이나 한 가지를 뚝심 있게 삽질하는 일은 내게 재미없는 고통일 뿐이었다. 이런 행동의 기저에는 ‘지금 내가 가진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두려움이 똬리를 틀고 있음을 공부를 하다 알게 되었다. 외적인 일들이 나를 행복하게 할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이 내면의 불안과 만나면 탐닉을 일으킨다. 탐닉을 흘려보내지 못하고 올라타게 되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채워지지 않는 일시적 만족을 위해 나 자신을 소진시킨다.
  여기서 문제는 내 체력이 평균 이하라는 거다. 나를 진맥한 한 한의사에 따르면 체구도 내부 장기들도 모두 작단다. 그러니 남들보다 펌핑해서 뿜어낼 에너지도 적을 수밖에. 이런 신체 조건에도 불구하고 내가 폭주하는 기관차마냥 움직일 수 있는 이유는 깡다구 다른 말로 자의식 때문이다. ‘나 이런 사람이야!’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나를 필요 이상을 부풀렸다. 나의 삶의 궤적을 들여다보니 눈이 아프게 된 건 당연한 수순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를 살릴 방법은 하나 밖에 없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나만의 리듬에 올라타는 것!


<다른 감각, 다른 기운, 다른 삶의 방식을 쓰려는 힘을 키워라>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 세상에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만일 먼저 역경에서 견디어보지 못하면 장애가 부딪칠 때 능히 이겨내지 못하여 큰 보배를 잃어버리게 되나니 역경을 통하여 이치에 이를지로다.”- 『보왕삼매경』 중
  나는 눈이 아팠기에 나를 삶을 우주를 공부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규칙적인 생활습관과 운동하는 일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내 몸을 소중히 여기게 되어 음식을 가려먹게 되었고 내 몸과 대화하는 일도 제법 늘었다. 세상은 내 계획대로 흘러간다는 교만이 깨졌다. 고통의 역치가 예전보다 높아졌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졌다. 내게 주어진 것에 만족할 줄 아는 법을 연습한다. 숨을 쉬고 살아가는 현재 삶에 감사하다며 기도한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고 내 고착이 발현되는 순간을 알아차리려 수행을 한다. “질병은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 지혜가 없는 것”이라는 복희씨 말처럼 늘 평온하고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나의 사유를 깊게 만드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병을 통해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나니 지금의 병을 결핍이라 규정해버리지 않고, 나라는 한계를 넘어 살 수 있게 되었다. 결국 내 병이 나를 살렸고 나를 살게 한다.
  소설 <페스트> 속 시청공무원 그랑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사람이다. 페스트가 창궐한 무섭고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매일 같은 시간에 집에 들어가 글을 쓴다. 그에게 글쓰기는 어지러운 세상 한 가운데서도 자기중심을 잡고 열린 신체로 세상을 마주할 수 있게 해주는 수행이다. 이는 “약하게 보이지만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은” 그랑의 저력이기도 하다. 몸에 밴 습을 바꾸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관성의 힘은 강력해서 이쯤 되면 바뀌었겠지 하는 순간 본래대로 행동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만다. 우리는 이제 변화와 흐름에 맞춰 유동하는 신체를 만드는 법, 탐욕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법을 알고 있다. 진실하고 정확한 내 언어를 찾아가기 위한 치열한 여정만이 내 몸에 치렁치렁 매달린 형용사를 덜어낼 구도의 길이다. 죽느냐 쓰느냐는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댓글목록

느티나무님의 댓글

느티나무 작성일

육체의 결핍에서 오는 좌절감은 내적 뒤틀림의 흔적들과 외적 상처의 상흔들이 조금씩 적재됨에 따라 서서히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나무둥치에 빨대를 꽃아 필요할 때 마다 수액을 얻듯 신체의 안정과 심리적 영양분을 제때 공급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모든 사람은 태과불급 상태로 태어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기울어진 상태로 호흡하며 출생한다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 공간이 끊임없이 차이를 생성하고 구겨진 삶을 자연으로부터 살아가라는 숙명을 명령 받았는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그 모든 과정을 스스로 잘 치유하며 살 수 밖에요.

내 안에 갇힌 궁핍한 울음을 하나씩 걷어내고 자신의 벽을 하나씩 ‘도장 깨기’ 하듯 허물며 스스로 날개 달아 궁창을 향해 높이 날아가기를 명령하며 살아가야겠습니다. 삶의 언저리에서 마주칠 고통의 조각들을 어쩔 수 없이 대면해야겠지만 그럼에도 수빈쌤의 말처럼 “진실하고 정확한 내 언어를 찾아가기 위한 치열한 여정만이 내 몸에 치렁치렁 매달린 형용사를 덜어낼 구도의 길”임을 깨닫는 그 순간까지~~~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