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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누피들7 후기 : 니체는 왜 이렇게 현명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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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씨 작성일16-08-26 15:23 조회2,910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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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자서전 <이 사람을 보라>를 시작했습니다. 저 같은 경우 세미나 준비 전, 과정보다 끝난 후에 이런 저런 생각들이 더 납니다. 다른 사람의 의문과 답들이 제 안에서 계속 맴돌면서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해서, 세미나 때 했던 얘기를 요약하기보다, 세미나 후 제가 들었던 생각들을 정리하는 후기를 쓰도록 하겠습니다.


*세미나 후 얻은 말들

-관점을 전환할 수 있는 힘이 현명함이자 자유다.
-관점을 극복하는 역량이 현명함이자 자유다!
-한 가지 관점에 빠져있는 것, 한 가지 관점만을 강요하는 것. 그것이 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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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직후, 무엇보다 강력하게 와닿았던 말은 ‘관점’이라는 단어에요. 많이 들었던 말이고, 평범하게도 많이 쓰는 말인데, 이번엔 아주, 아주, 아주..... 새롭게 들려옵니다. 아주 오묘하게 들리는 게 징조가 좋아요.^^ 이 책에는 아주 매혹적인 부제가 하나 달려있어요. “어떻게 사람은 자기의 모습이 되는가?”라고 하는. 첫 시간 후기는 이 말을 풀어가는 첫 번째 시도입니다.^^

서문은 니체가 자기를 좀 제대로 알라고 말하면서, 이 책을 읽는 방법도 동시에 제시합니다. 그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서, 이 책을 믿지 말고 떠나라. 그리고 너 자신을 찾으라고 독자들에게 주문합니다. 그러니까 니체는 자기를 어떻게 찾았는지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나는 이런 방법을 써서 나를 찾았다. 그러나 이것은 니체라는 하나의 길과 방법이었던 것뿐. 자기가 보여주는 건 이게 가능한 시도라는 걸 보여주고, 자기는 자기로부터 구원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남깁니다. 우리는 종종 ‘나’라는 말에 속곤 합니다. 니체도 뭔가 ‘진짜 나’, 하나의 실체를 낚았구나 싶은 거죠. 그런데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오히려 니체가 낚은 것은 자기 스타일대로 해석할 줄 아는 능력과 관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 부제가 새롭게 읽혔어요. 세상이 강요하는 관점(ex. 도덕)이 아닌 자기 관점은 어떻게 갖는가? 그리고 한편으로는 무서운 말로 들려요. 너의 해석과 관점이 없다면 넌 없는 것이다, 라는.

그리고 그 관점이라는 것도 다시 질문해봐야 할 것 같아요. 니체가 말하는 관점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갖게 되었는가? 니체는 자기가 어떤 훈련을 했는지 친절하게(?) 대답해줍니다.

나는 데카당스를 앞에서 뒤로, 그리고 뒤에서 앞으로 판독해 보았다...병자의 광학으로부터 좀더 건강한 개념들과 가치들을 바라본다든지, 그 역으로 풍부한 삶의 충만과 자기 확신으로부터 데카당스 본능의 은밀한 작업을 내려다본다는 것-이것은 가장 오랫동안 나의 연습이었고, 진정한 경험이었다. <이 사람을 보라, 333쪽>

니체가 자기를 설명하는데 있어 자주 등장하는 말은 ‘데카당’입니다. 저희를 멘붕에 빠뜨렸던 단어이기도 했어요. 자기는 ‘데카당’이면서 ‘데카당의 반대’라고요. 이 수수께끼 같은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힌트로 삼을 수 있는 말은 “데카당은 그 자체로 항상 자신에게 불리한 수단을 선택(2장)”하는 존재들이다. “특정 유형의 재발과 붕괴라는 데카당스의 주기성(1장)”이라는 말. 니체를 읽을 때는 맥락과 뉘앙스로 유추해야 하는데,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닐까 싶어요. 아마도 모양은 같은 단어인데, 어떤 차원에서 쓰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로 쓰이는 걸로 보입니다. 요컨대, 차원의 문제로 접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인표샘 질문을 길잡이로 가볼게요. <비극의 탄생>의 용어로 보면, 아폴론적인 것(재발)과 디오니소스(붕괴)의 반복은 알겠는데, 그럼 그것을 주관하는 그 힘은 무엇인지 질문하셨어요. 그런데 그 힘도 바로 디오니소스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재발(유)과 붕괴(무)가 반복되는 더 ‘커다란’ 의미의 디오니소스(무). 그래서 데카당이는 말이 작은 차원에선 부정적으로, 좀 더 큰 차원에선 긍정적 의미로 쓰이고 있는 걸로 보여요. 

그런 점에서 니체의 훈련법으로 돌아가 보면, 데카당스를 앞에서 뒤로 뒤에서 앞으로 보았다는 말은, 커다란 차원으로 자기를 관찰했다는 것으로 들립니다(바로 앞의 맥락도 그랬어요. 눈과 위가 아니라 몸 전체의 건강). 재발 혹은 붕괴라는 특정 관점에 머문 게 아니라, 재발과 붕괴의 전체 리듬을 살폈다는 것. 말이 쉽지^^, 전체를 보려면 관점을 계속 이동시키는 작업을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것 같아요. 높낮이는 바꾸면서 세계를 보다보면 자기와 맞는 관점이 발견되기도 하고, 또 바꿀 수도 있다고 이해해도 될 것 같아요(아마 하인리히 폰 슈타인의 일화가 그거였던듯). 그래서 니체는 건강할 때 건강을 사유하지 않고 병들었을 때 병을 사유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정말 하나의 관점으로만 의미를 해석하게 되거든요. 니체는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바라봐야 건강과 병의 숨은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고 본 것 같아요. 이렇게 계속 연습했더니 ‘가치의 전환’하는 힘을 선물로 받았다고 니체는 얘기합니다.   

역지사지라는 사자성어가 다르게 들려요. 관점을 완전하게 전환하라는 얘기잖아요. 그것도 나의 적, 내가 경멸하는 사람의 관점으로 사태를 바라보라니. 그래서 니체는 호전적인 자기 본능에 걸맞는 공부법은 싸움이라고 말합니다.(이때도 우리는 싸움은 좋은 거야 하기보다, 니체는 자기 본능에 맞는 공부법을 찾아냈구나. 내 본성에 맞는 공부법은? 이렇게 생각하도록 노력해야할 것 같아요. 니체가 자기 스스로를 샘플로 보여주고 있다는 걸 자꾸 상기시켜야^^) 니체는 관점을 전환하기 위해서 완벽하게 적이 되는 체험을 합니다. 이전에 읽었던 <비극의 탄생>에서는 소크라테스가 되고, <안티크리스트>에서는 예수가 되어 봅니다. 그 사람의 관점으로 세계는 어떻게 보였을까, 그렇게 보였던 심리는 뭘까? 질문하면서 말입니다. 그는 싸우면서 인식의 성과와 발전을 얻습니다. 여러 번의 피 튀기는 싸움에서 그가 얻은 앎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류(-이상에 대한 믿음-)은 맹목이 아니다. 오류는 비겁이다 …… 인식의 모든 성과와 발전은 용기에서, 자신에 대한 엄격과 순수함에서 나온다 ……(서문, 3장)

니체가 말하길, 자기는 원한에 의해 보복하는 게 아니고 선의를 베푸는 거라고 하는 말뜻을 좀 알 것 같아요. 자기를 건들이기만 해보라!! 과일쨈 통을 보내버리겠다!!라고 귀여운(?) 으름장을 놓은 것도요.^^ 적이 미워서가 아니라 비겁에 대한, 즉 똑바로 보면서 싸우라는 외침입니다. 어쨌든, 이 피 튀기는 싸움의 전리품은 "완전히 다르게 보는 법"이라고 니체는 말합니다. 다음 편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가"도 정말 궁금해지는 대목이에요.
피곤하여 점점 결론이 비겁해지네요.ㅋㅋㅋ 다음 세미나 때도 이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댓글목록

시원한바람1님의 댓글

시원한바람1 작성일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인상적인 후기네요... 역시... 훌륭!!! 좀 토를 달아보면, “어떻게 사람은 자기의 모습이 되는가?”라는 질문에 이미 서문에서 답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를 버리고 너를 찾아라”라고. 자기를 찾아야 자기의 모습이 될 수 있다는 이런 생각인 것이죠... 이런 관점에서 이 책을 읽어가기를 바라는 것도 있다고 생각하구요... 니체는 ‘관점을 전환할 근거’, ‘관점을 전환할 도구’를 가지고 있고, 이것 때문에 ‘가치의 전환’이 가능할 수 있었다고 하고, 그래서 자기가 데카당이기도 하지만 데카당의 반대라고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관점을 전환할 근거’, ‘관점을 전환할 도구’ 이 말들이 저는 한 묶음으로 중요하다고 생각되구요. 이것을 힘에의 의지를 표현하는 ‘인식’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 인식으로 인해서 그가 ‘생명력이 가장 낮았던 그해에 염세주의자임을 그만둘 수 있었다’고 얘기하는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쓰다보니 길어졌네요... ㅎ

미미님의 댓글

미미 작성일

세상에, '사람은 어떻게 자기가 되는가'라니, 이번엔 이 질문을 쭉 가지고 가야겠다 곱씹으며 제목에 다시 눈길을 주고 읽으니 
"어떻게 사람은 자기의 모습이 되는가" 이군요. 두 문장에서 미묘하게 ‘어떻게’(방법/과정), ‘사람’(주체), ‘자기’(본질)와 ‘자기의 모습’(실재와 현상), 이런 차이를 느낍니다. 니체를 읽고 있어도,  나를 읽고 있는 것이려니. 정성 후기 고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