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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누피들6] 그리스 비극 <안티고네>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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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잔디 작성일16-06-25 21:20 조회3,655회 댓글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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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고네>라는 작품의 갈래는 비극-비극의 구성요소을 취하고 있으니까, 프롤로고스와 삽화와 엑소더스와 코로스(등장가와 정립가로 구분)-이지만 안티고네라는 인물이 제게는 영웅적인 성격으로 다가와 이 작품이 그렇게 비극적 정서를 일으키면서 읽혀지지는 않았다. 안티고네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까지도 불사하는 너무나 멋진 여전사 이미지가 강했고 오히려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몰락하는 크레온이 비극적 인물(?-이라기보다는 어리석은 불쌍한 인물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듯하다)이라 생각했었는데 저의 이러한 태도가 니체가 싫어하는 늘 판단하는 비평가적인 입장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번에는 니체가 말하는 예술로 비극을 새롭게 읽으려고 노력했다.
 

먼저 비평가 말고 미학적 청중 즉 비극 안에서 유희하면서 미적 쾌감을 누리는 미학적 청중(268)이 되고자 노력했다. 작품 안을 거닐고 머무르면서 그 안에서 놀고자 했다.
[꿈 속의] 이러한 형상들로부터 삶을 해석하고 [꿈 속의] 이러한 사건들에 의거해서 삶의 훈련을 하기 때문(54)이라고 했는데 작품 안에서 인물을 살펴보면 안티고네, 아버지이기도 하고 오빠이기도 한 남자의 딸 이 자체가 디오니소스적인 상태이고 일상에서는 굉장히 예외적인 상황이지만 또 전혀 없는 일도 아닌 이 인물과 그리고 크레온, 우리가 왕일 경우가 얼마나 있겠는가 그 중에서도 사람들이 싫어하는 독재자로서 종국에는 아들도 자살 부인도 자살하는 이 크레온의 삶을 통해 우리는 삶을 경험하고 삶의 기술들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배우고자 하는 자에 한해서만).
예술이 삶의 찬란한 변용이면서 동시에 삶의 추악, 공포, 부조리를 모두 드러낸다(283)고 했는데 가상, , 예술 안에서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똑바로 응시해서 기른 힘으로 현실에서 내 안의 어둠도 똑바로 응시할 수 있을 때 구원과 치료의 마술사로서 예술(117), 계속 살아가도록 유혹하는 삶의 보완이자 완성으로서의 예술(76)을 저는 완벽하게 지지한다.
관조와 동시에 그러한 관조를 넘어서 동경하는 것을 체험(282)으로서 비극을 얘기 했는데 그러한 체험을 통해 우리는 현실을 직면하고 관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정작 거리를 두고 관조해야 할 현실에는 매몰돼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나 자신과 푹 빠져야 할 작품, 예술에서는 거리를 두고 판단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본다는 것은 아폴론의 형상으로 디오니소스적 지혜(263)를 말하고자 하는 비극(예술)을 제대로 체험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니체가 그리스인의 디오니소스적 광란은 세계구원의 축제와 성화의 축일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디오니소스적 광란에서 비로소 자연은 예술적 환희에 도달하며 그것에서 비로소 개별화의 원리의 파기가 예술적 현상이 된다.(67) 고 했는데 그것을 공동체의 예술 의식(?으로 볼 수 있는지 자신할 수는 없지만)으로 본다면 비극을 공유한 그리스인들과 원형 경기장의 검투사들의 대결을 공유한 로마 시민들은 정말 달랐겠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러면 지금 신화를 잃어버린 우리는 무엇들을 공유한 공동체이며 우리들의 의식은 어떤 것이며 수준은 어느 수준일까 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첫째로 음악은 디오니소스적인 보편성을 비유의 형식으로 관조하게 하며, 둘째로 음악은 비유적인 현상이 최고의 의미를 가지고 나타나게 한다.(204)고 했는데 음악 없이 글로만 읽는 비극의 한계와 아울러 코러스 부분이 너무나 궁금한 시간이기도 했다.
 

소포클레스 작품 중에서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서로 연관이 있는데 서사 순서로는 오이디푸스 왕,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안티고네이지만 창작 순서는 안티고네, 오이디푸스 왕,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이다.
 

작품 구성으로 들어가서 보면
프롤로고스, 1~99: 안티고네와 이스메네
등장가, 100~161: 제우스와 전쟁의 신을 노래하면서 형제의 죽음을 드러냄
삽화1, 162~ 331: 크레온, 코로스장, 파수꾼
1정립가, 332~375: 인간에 대한 노래와 크레온 몰락을 암시
삽화2-1, 376~525: 크레온, 파수꾼, 안티고네
삽화2-2, 526~581: 이스메네 등장
2정립가, 582~625: 랍다코스가의 고통을 노래
삽화3, 626~ 780: 코로스 장, 크레온, 하이몬
3정립가, 781~805: 크레온의 안티고네에 대한 사랑을 노래
애탄가, 806~ 882: 안티고네, 코로스
삽화4, 883~943: 크레온, 코로스 장, 안티고네,
4정립가, 944~ 987: 디오니소스신과 갇힌 클레오파트라 이야기를 노래
삽화5, 988~ 1114: 테이레시아스, 크레온, 코로스 장
무도가, 1115~1154: 디오니소스 초청
삽화6, 1155~ 1260: 사자, 코로스 장, 에우뤼디케
애탄가, 1261~1347: 크레온, 코로스
?, 1348~1353: 코로스
 

안티고네에서는 비극성보다는 다들 안티고네의 선택을 지지하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까지도 내걸 수 있는 용감한 여성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니체는 의지의 최고의 현상인 비극의 주인공이 파멸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쾌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주인공은 단지 현상일 뿐이며 주인공이 파멸한다고 해서 의지의 영원한 생명이 손상되지는 않기 때문이다.(205) 라고 했으니 안티고네의 파멸을 통해 안티고네의 의지가 실현됐다고 보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포클레스는 국가의 지원이나 중재 없이도 친족이 존재할 수 있는가, 국가를 지원하고 매개하는 가족 없이도 국가가 존재할 수 있는가, 친족이 국가 권위에 위협적 자세를 위하고 국가도 친족과 대립하여 싸우게 된다면 이 관계들의 상호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대립으로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의 입장이라면? 하고.
안티고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함으로써 죽은 것이 아니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함으로써 죽었다(^^)는 시각과 그녀는 애초에 죽을 마음(463, 464, 555, 892, 893, 905~910)이었기에 오빠의 장례를 지냈다는 의견들이 오고 갔다.
 

개인적으로는 안티고네가 너무 훌륭해서(? 옳고 그른 것을 떠나 그 시대상으로 봤을 때는 완전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행하려 함으로) 이스메네 입장에 더 쉽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었지만 안티고네의 너무나 유명한 구절 나는 서로 미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려고 태어났어요.(523) 하지만 저들이 죄를 지었다면, 저들이 내게 부당하게 저지른 것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하지 않게 되기를!(927, 928) 부분에서는 안티고네가 참으로 멋져 보였다. 여성에게  이렇게 멋진 대사를 부여한 소포클레스에게 다시 한번 감탄하였고 괴테가 말한 구원은 영원한 여성적인(여성이 아니라) 것에 있다는 말이 생각나기도 했다.
 

크레온의 애탄가 부분에서 1345내가 손대는 일마다 잘못되고, 에서 떠오르는 시 한편이 있어 그 시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채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란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신상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니었다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
그것도 파워랄가,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겐
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의 말을 넣어주는 바람이
떠들다 지나갈 뿐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뼈아픈 후회
-황지우
 
 
 
댓글목록

금강석님의 댓글

금강석 작성일

후기 재미있게 읽었스니다. 특히, "시"가 인상적입니다.
<안티고네>에서 자연적 질서와 인간의 질서의 대립속에서 과연 국가와 개인, 사회와 개인은 화해할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사회가 없으면 개인의 의미가 없나요. 개인이 없으면 사회는 불가능한 것인가요.

잔디님의 댓글

잔디 댓글의 댓글 작성일

반가워요, 금강석샘!
그렇죠? 시 완전 좋죠. 황지우샘인데 어련하겠어요. 좋으셨다니 <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홀로 앉아 있을 것이다> 시집을 살짝쿵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금강석샘의 개인이 없으면 사회는 불가능한 것인가...
오랫동안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습니다. 니체와 바그너가 갈라선 지점일 수도 있고요.
디오니소스적 상황을 견디는 디오니소스적 지혜를 사랑하는 자로서 제 개인적인 의견은 개인에게 무게를 두고 싶습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 자연은 가능하게 하고 문화는 금지한다(216쪽)는 구절이 나오는데 요즘 제가 씹고 있는 문장입니다. 자연에서 금지는 없다고 합니다. 자연에서 금지는 그냥 불가능이래요. 문화만이 가능한 것을 금지하고 억압한다는 말이 되겠지요.
문화를 사회로 번역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금지하는 사회를 거부하는 디오니소스적 지혜와 친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시원의 가능성을 모두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전 개인을 우선 우위에 두고자 합니다. 제게 물었다기 보다는 혼자의 질문인 줄 알지만 그냥 대답해보고 싶었습니다. ^-^
낼 뵈요!

금강석님의 댓글

금강석 댓글의 댓글 작성일

<사피엔스> 놀라운 지적 설계를 경험한 책이었는데, '신' 이런 것들이 상징체계라는 것이고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하고 사피엔스들이 살아남은 근거로 제시하였으나, 미래를 암울하게 전망한다는 지적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잔디님의 댓글

잔디 작성일

「오이디푸스 왕」을 읽으면서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감당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지점에서는 이청준의 「조만득 씨」가
오이디푸스와는 다른 의미지만 사랑의 실존적 고민을 다룬 무척이나 아름다운 영화 <더 랍스터>가
이오카스테 입장에서는 너무나 가슴 아픈 영화 <그을린 사랑>이 떠올랐다.

잔디님의 댓글

잔디 작성일

「안티고네」에서 비극적 정서가 잘 안 느껴져 비극의 종류에 대해 찾아보았다. 「안티고네」는 아마도 파토스적 비극이지 않나 싶다.

비극에는 네 종류가 있다.
첫 번째 종류는 복잡한 비극인데 그것은 전체가 급전과 발견으로 되어 있다.-가장 대표적인 것이 「오이디푸스 왕」이다.
두 번째 것은 파토스적 비극인데 아이아스나 익시온을 주인공으로 하는 여러 비극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세 번째 것은 『프티아의 여인들』이나 『펠레우스』와 같은 성격비극이다.
네 번째 것은 단순한 비극인데 우리는 『포르퀴스의 딸들』이나 『프로메테우스』 명부(冥府)를 무대로 하는 비극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문예출판사, 109쪽

파토스란 무대 위에서의 죽음, 고통, 부상 등과 같이 파괴 또는 고통을 초래하는 행동을 말한다. 같은 책, 73쪽

연민의 감정은 부당하게 불행을 당하는 것을 볼 때 환기되며 공포의 감정은 우리 자신과 유사한 자가 불행을 당하는 것을 볼 때 환기된다. 같은 책 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