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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누피들 6] 15장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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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씨 작성일16-05-16 11:37 조회2,2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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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후기


15장에서 니체는 우리 예술의 기원이 소크라테스로부터 재탄생한 것이며, 따라서 우리의 예술이 디오니소스적 충동을 되찾으려면 소크라테스라는 자리로 가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재밌는 것은 니체의 시선입니다. 14장 마지막에 니체는 장면 하나에 포커스를 맞춥니다. 소크라테스가 <파이돈>에서 독배를 마시고 죽기 직전 돌연 자신이 경멸했던 음악을 긍정하는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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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공부 그만, 음악을 하거라~~~^^;;


니체는 그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이 터닝포인트에서 새로운 사상을 이끌어냅니다. (니체는 정말 텍스트 읽기의 달인입니다!) 소크라테스, 즉 세계를 모두 설명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이론적 인간은 학문의 한계를 만남과 동시에 예술을 지향하게 되어있다고 말입니다. 학문은 이러한 메커니즘에서 원래 예술을 지향하는 것이다.”(191) 새로운 것에 눈 뜨게 해줬던 학문, 세계를 설명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학문, 나를 변할 수 있게 만들어줄 거라는 희망을 주었던 학문이 근본을 향해 깊숙이 진입하는 길이 아니라, 옆길로만 새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때 비극적 인식이 터져 나온다고 봅니다. 이 비극적 인식의 보호제와 치료제로서 예술이 필요해지는 것이라고요. 니체는 우리에게 현대라는 시공간에서 이 싸움(낙천주의적 인식욕 vs. 비극적 예술에 대한 욕구)이 어떤 양상을 보일지, 싸움 구경을 해보자고 제안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제3자가 아닙니다. 이러한 싸움을 바라보는 자는 이 싸움에 가담해야만 한다는 것, 이것이 이 싸움의 마력인 것이다!”(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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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 꼬마 뱀파이어는 어른 브래드피트 뱀파이어를 사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이 영원히 성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갇혀버린 운명에 절규하며 히스테릭한 비명을 지릅니다. 머리를 잘라도 몇 초 후면 다시 원래대로 자라나는 걸 확인하는 장면이었는데, 그 처절한 비명 소리가 아직도 쟁쟁합니다. (니체가 만난) 소크라테스처럼 학문의 벽에 부딪혀야만, 우리는 근본으로 가는 길을 찾고 싶다는 충동을 갖게 됩니다. 니체는 예술 특히 음악이야말로 현상의 배후(=세계의 의지=)의 표현이라고 생각했고, 그 음악으로부터 그리스 비극이 탄생했기 때문에, 비극이라는 예술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 점에서 보면 공부는 괴로운 게 정상입니다.^^ 내 한계를 만나야 세계의 본질의 표현인 예술의 길로 들어설 수 있으니까요. 공부는 원래 비극적이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네요.


세미나 시간에도 질문을 했었지만, 생각이 진전이 있어서 한 발 더 나아가 볼게요. 소크라테스는 살아생전에 '무지의 지'를 강조했는데, 이것은 학문의 한계와 만나는 것과 다른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걷다가 생각해보니, 어쩌면 니체의 소크라테스에 대한 지적은 <안티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가타리가 프로이트에게 했던 비판과 닮은 점이 있는 것 같더라구요. 전면적으로 니체가 이 점을 내세우지는 않지만요. 즉 소크라테스는 앎을 무지로 탈코드화 시켰는데, 다시 교육적 방향으로 재코드화시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궁금해진 것은 이 무지와 앎의 한계 지점에 간신히 이르렀는데, 바로 그 다음에 펼쳐질 사태의 장면입니다. 그때 어떤 조건에서 어떤 힘을 만나면 세계의 본질로 진입하게 되고, 또 어떤 조건과 힘을 만나면 다시 복귀하게 되는걸까요. 주로 후자에 우리들이 열광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우리는 익숙한 힘이 새로운 듯 포장한 것에 눈속임을 당하는 것 같습니다. 왜 자꾸 우리는 '삐끗'하게 되는 건지, 진짜를 알아보는 눈은 어떻게 키우는 것인지 궁금하고. 학문이 알려고 하는 의지라면, 예술의 영역에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세계의 본질을 감각할 수 있을까요? 어떤 잠재력을 발동시켜야 우리는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걸까요? 아주 궁금해집니다. 


 다음 세미나를 기다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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