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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누피들> 비극의 탄생, 19장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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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미미 작성일16-06-02 16:26 조회2,2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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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의 비예술적 성분을 따져묻다


19장의 니체는 16세기 피렌체에서 탄생한 오페라의 내적 생성 과정을 샅샅이 살피며, 그것이 예술의 진정한 과제에서 벗어나 있음을 지적한다. 여기서 예술의 진정한 과제란 가공할 두려움 앞에 선 존재에 대한 위로와 삶에의 구원이다. 구원은 대담하고 자유롭고 당당히 활보하는 태도로서 드러난다.


니체는,


예술에 주어진 진정으로 엄숙한 최고의 과제는 가공할 어둠 속을 응시한 눈을 〇〇하고 〇〇이라는 치료약으로 주체를 의지활동의 경련으로부터 〇〇하는 것이다.

-19(239p)


라고 했다.

 

예술은 그 태생과 목적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충동이자 상생적 세계관이다. 나는 니체로부터 죽음과 고통, 넘치는 생명과 쾌락, 고뇌라는 존재 한계와 세계 본질을 응시하고서야 인간은 존재 자체로 위로받을 수 있으며, 가상과 환영이라는 숭고한 세상을 만들며 허무와 염세, 무기력과 나태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고 들었다. 물론 이렇게 단순 양분하여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와 같은 나의 짐작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20장의 다음 부분이다.


넘치는 생명, 고뇌, 쾌락의 한 가운데에, 〇〇한 황홀경에 〇〇 〇〇 있는 것이 〇〇이다. 비극은 저 아득히 멀리서 들려오는 애수의 노래에 귀를 기울인다. 이 노래는 광기, 의지, 비통이라는 〇〇〇〇〇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렇다. 내 친구들이여. 나와 함께 디오니소스적 삶비극의 재탄생믿자.

소크라테스적 인간의 시대는 끝났다. 담쟁이 넝쿨을 가지고 그대들의 머리를 장식하라. 바쿠스의 지팡이를 손에 들어라. 호랑이와 표범이 그대들의 무릎 아래에 와서 상냥하게 누워도 놀라지 마라. 이제 비극인간이 되어라. 그러면 그대들은 〇〇될 것이다.

디오니소스의 축제 행렬에 가담하라! 격렬한 전투를 준비하라. 그러나 그대들 (디오니소스)신의 기적을 믿으라.”

- 20(250p251p)


니체는 16세기 피렌체에서 유행한 오페라를 예술의 진정한 과제를 수행한 것으로 인정할 수 없음을 한 예로 들었다. 니체는 우선 오페라의 출생과 성분을 위주로 살폈다. 오페라는 예술의 영원한 진리 곧,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부터 탄생하지 않았다. 이는 오페라의 특징은 음송조’ - 오페라의 대사() 부분과 감탄 부분의 처리 방식 인데, 예술적 본능(디오니소스적 삶과 비극의 재탄생)에 의거하지 않고 극히 외면적이고 모자이크적인 조합에서 나온 것이다. 청중의 개념과 표상에 작용하다가 어느 때는 청중의 음악적 소질에 작용하는 ()음악적 화법의 오페라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모순될 뿐만 아니라 그 결합이 서로 조급하고 부자연스러운 노력에 불과하다고 한다.

한편 니체는 오페라가 비예술적이고 일반적인 견해를 따라서 호메로스의 세계를 선량한 인간이 사는 낙원으로 원시세계를 상정하고, 탁월한 순수성, , 무구함 등을 몽상, 미화, 동경하고 이를 믿으면 구원된다는 방식으로 전개되었음을 지적해냈다. 오페라의 목가적 경향이랄 수 있는 이러한 전개야말로 대중 영합적, 공허한 기분 전환의 오락적 경향이며 원시인간의 정열로서 현대인이 박식함과 문화만 포기하면 선량한 원시성을 부활시킬 수 있다는 병폐적 생각을 후대에 남긴 것이라고 한다. 이는 이론적 인간의 명랑한 낙천주의(이론적 세계관, 소크라테스 문화)와 다를 바 없으며, 오페라가 드러낸 속물근성임을 비판했다.

아티카의 새로운 주신찬가가 신화 창조의 능력을 상실한 비()디오니소스적 정신이자 예술을 흉내낸 회화적 음악이었듯, 오페라 또한 비가적 고통 없이 그저 원시세계의 재발견을 즐기는 명랑성이 서린 장소일 뿐이었다며, 오페라를 진정한 예술에 대해 기생충적이라고 몰아붙였다.

 

- 믿으라니, 비극의 재탄생

이제까지 니체는 그리스, 로마, 중세, 르네상스, 근대 독일을 망라해 학문, 종교, 갖은 예술(비극)의 변주를 섭렵하고 인간이 창조해온 무수한 구원의 시도들과 번번한 실패를 열거해왔다. 도대체 존재는 위로또는 구원될 수 있는가? 역사적으로 이론적 세계관의 우세로 비극적(디오니소스적) 세계관을 박탈당한 우울감이 짙어지자 니체는 당시 독일 사회에서 그리스 비극이 마침내 재탄생하는 마력과 같은 기적을 믿기로 한다. 느닷없다고 할까? 불쑥.

물론 그간 차곡히 쌓아온 논증의 토대가 없지는 않았다. 칸트와 쇼펜하우어를 통해 학문적 소크라테스주의의 한계가 증명되었고, 바흐로부터 베토벤, 베토벤으로부터 바그너에게로 이어지는 독일 음악에서 그리스 비극의 재탄생이라는 희망을 보았고 했다(음음음, 난 독일음악은 잘 모르겠다). 그리고 그는 축제의 행렬에 거리낌 없이 가담하라며 강력히 권고했다. 이때의 니체는 교주 같았다. ‘믿어라라니!

그토록 절실하고 박식하게 그리스 비극 정신을 설파하던 니체가, 그것의 몰락과 파산을 그토록 핏대를 올려 변증하던 니체가,


 ...아무리 혹사당하더라도 그의 (디오니소스적)신적인 이 영원히 소진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독일 정신의 디오니소스적 기반으로부터 하나의 이 솟아올랐다.

-19241p

 이제까지의 문화가 행했던 모든 노력에 의해서 전혀 건드려지지 않은 〇〇 측면으로부터 부활한 비극 음악이 〇〇스럽게 울리는 가운데 갑자기 저 〇〇의 문이 저절로 열리는 것이다.

-20249p


라고 했다. ‘비극의 재탄생의 방식이 놀랍지 아니한가. ‘구원은 이렇게 느닷없이 오는 건가. 저절로, 솟아오르다니. 그리고 그걸 설득하기보다 믿으라는 강권하는 방식이 참참참... 참으로 미꾸라지 같고 연어 같이 구는 니체의 귀염 매력이다.

 

-그리고 나의 질문 : 구원'은 믿음의 방식?

삶과 불화하거나 역력한 패배의 기운을 감지할 때, 그 중압감을 종교나 학문이나 오락에 넘겨주곤 한다. 위로해 줘, 구원해 줘, 너만 믿을 게... 흔한 방식이다(, 한 가지 더 회피의 방식이 있다). 문헌학자 니체는 고전을 훑으며 집요하게 물었다. 그리고 질문의 자리에 그리스 비극이라는 예술의 비극적 세계관을 놓았다.

그리스 비극? 호메로스? 허무맹랑한 데다 잔인하고 비도덕적인 신화, 영웅담이었던가? 무지로 당혹스런 와중에도 나는 읽기를 거듭하며 구원과 삶에의 태도에 대해 깊숙이 질문당하고 있는 느낌이다. 종교도 학문도 오락도 아니라니... 염세를 극복하려는 음악정신으로부터 비극의 탄생의 니체를 따라가며 나는 그리스인의 삶과 고통을 대하는 태도를 상상하고 예술적 태도로 삶을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을 가다듬어가고 있다. ‘내가 고통을 마주하는 방식은?’ ‘어떤 태도로 살아가고 있 지?’ 음악정신으로부터 비극의 탄생을 집어든 이상,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이 아닌가. 19장과 20장을 읽고 추가한 질문은 삶의 구원은 믿는 방식이어야 하는 것일까?’이다.

 

(* 20장 스포 있었습니다. 20장 발제 후기 맡으신 쌤 영역 침범 용서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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