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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기잡스, 장자의 전자방,지북유 세미나 후기 (9월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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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양파 작성일15-09-21 23:22 조회3,33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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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전자방」, 「지북유」 세미나 후기- 2015년 9월 21일
 
이번 주는 1,2학년 에세이 주간이라 많이 모이지는 못했다. 오붓한 분위기 속에 자유롭게 진행되었다. 자유로운 만큼 후기를 쓸려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장자』의 내용은 읽을 때마다 새롭게 읽힌다는 공통된 의견이 있었다. 내가 발제한 부분에 대한 평가는 도(道)를 너무 멀리 있는 거대한 무엇처럼 상정하고 쓴 것처럼 보인다고 영희샘이 말했다.
 
장자는 「전자방」, 「지북유」편에서 도에 대해 여러 버전으로 말하지만 아직 우리는 도에 잘 모르겠다. 예를 들면 송나라 원군이 그림을 그리게 했을 때 많은 화공들은 명령을 받고 그림을 그릴 준비를 하는데 한 화공은 늦게 도착했으나 그림을 그리지 않고 자기 숙소로 가버린다. 거기서 옷을 벗고(벌거숭이로) 쉬고 있다. 그런데 원군은 그야말로 참된 화공이라고 한다. 행위예술을 하는 것이 참된 화공인지, 그림을 그리려고 안달하지 않는 태도가 참된 화공의 모습인지 장자 선생의 깊은 뜻은 짐작이 가지 않는다는 의견이었다.
 
문왕이 만난, 낚시하며 자적(自適)하는 노인이 강태공인데 실제의 강태공과는 다르다고 한다. 실제 강태공은 문왕의 나라를 잘 다스린 후 제나라의 땅까지 받아 금의환향했다. 전자방에서는 문왕이 훌륭한 정치를 더 멀리 펼치길 원하자 홀연 흔적을 남기지 않고 떠난다. 정치에 깊숙이 들어가면 자신에게 미칠 화(禍)가 커지기 전에 떠난 것이 아닐까. 아마 강태공은 언제 떠나야 할지 정치에서타이밍에 道를 알고 있지 않았을까 .
지북유편에서는 이름만 들어도 내용이 짐작이 가는 이름들이 많다. 지(知),무위위(無爲謂),광굴狂屈,태청泰淸,무궁(無窮),무시(無始),광요(光耀),무유無有
 
도는 생사유무를 떠나 끝없이 새로 태어나고 가르침과 배움의 순간에 있다. 주란샘은 이 부분이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공자는 안회에게 말한다. “ 내가 평생 동안 너와 팔을 잡고 살아간다 해도 이를 붙잡아 둘 수가 없으며 언젠가는 서로 잃게 되게 마련이다.... 내가 네게 가르치는 것이란 순간에 지나지 않고 네가 내게서 배우는 것 역시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장자 시간이 끝난 후 라틴 아메리카문화의 즐거움에 대해서는 시간이 어중간해 다음에 하기로 했다. 영희샘은 아쉬운지 자신이 읽은 부분을 전해 주려고 애썼다. 남아메리카의 지형이 뜨거운 불기운이 많아서인지 거기 사는 사람들도 발산하는 힘이 세다고 한다. ‘축구의 사회학’부분이 흥미롭다고 강추! 다음에 만날 때 영희샘이 발제를 재미있게 해 온다고 한다. 추석 지나고 10월16일에 운기잡스 세미나 문을 다시 연다.
 
 
田子方, 知北遊(507p~ 559p) 『장자』, 안동림역 2015년 9월18일 발제자;박경옥
 
                                     천기누설과 묵언수행
 
3년 전 겨울, 안국동에 있는 선원에서 15일 동안 묵언 수행을 했다. 큰 스님은 “당신의 넷째손가락은 누구의 것입니까?” 라는 화두를 던졌다. 묵언을 하는 중 깨달음이 있으면 조용히 큰 스님을 만나 확인을 하면 그 선원을 다닐 수 있는 통과의례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묵언수행을 했지만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200명 정도 되는 사람이 모였는데 그 중에는 시간이 지나자 엉엉 우는 사람, 고함을 지르는 사람이 나타났다. 교회부흥회랑 비슷한 풍경이었다. 평소 가두어 두었던 감정이 둑이 터지는 것처럼 무너지는 현상이었다.난 그런 주변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고 용맹정진해서 깨달아보고 싶었다. 열흘이 지나고도 깨달음이 안 왔다. 14일째 많은 사람들이 깨달았다고 빠져 나갔다. 하지만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생각은 EBS<세계테마기행>에 나온 중국의 한 폭포였다. 폭포의 물방울 하나가 우주이고 그 물방울들이 내게로 떨어지며 경계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불편했던 요실금이 없어졌다. 이것이 몸으로 오는 깨달음인 줄 믿고 비슷한 경험을 한 여러 사람과 큰 스님께 검사받으러 갔다. 거기서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의 공통점이 있었다. 자신 안의 무언가가 쿵하고 내려앉으며 단단하게 싸고 있던 막, 고통, 경계가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에 대한 경험을 장자가 말하는 道와 한 자락이라도 비교할 수 있을까? 장자는 전자방田子方과 지북유(知北遊)에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도에 대해 천기누설을 한다. 그럼 우리는 천기누설을 듣고 어떻게 행동하는가? 도를 들은 후 삶은 달라질까?
 
장자가 말하는 도는 자신이 믿었던 기준을 무너뜨린다. 위나라의 문후는 전자방이 말하는 동곽순자의 사람됨을 듣고 충격에 빠진다. 문후는 칭찬받는 ‘스승‘의 개념을 넘어서는 사람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 더불어 성인군자의 말이나 仁義가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즉, 덕이 온전한 군자란 남에게 칭찬받는 단계를 넘어서 스스로의 모습을 바르게 하고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하고, 사악한 마음을 없어지게 하는 사람이다. 문후는 동곽순자를 통해 이 점을 깨닫는다. 또한, 도는 겉으로 꾸밀 필요도 설명할 말이 필요 없다. 온백설자는 진심이 없는 예의는 소용없는 짓이라고 한다. 공자는 온백설자를 척 보고도 도를 갖추고 있는 것을 안다. 또, 도는 끝없이 생생불식하는 과정 속에 있다. 그 과정 속에 죽음의 순간이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이렇게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모르지만 자연의 흐름에 맞게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거창한 목적의식과 소명을 지니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천지의 사철에 소멸과 소생이 있고 만물에 무성함과 공허함이 있으며 어둠과 밝음이 있고 해와 달의 교체가 있어 하루도 쉬지 않고 진행되지만 그 조화의 功을 알아볼 수는 없소. 만물의 발생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싹트고 그 종말은 다 흩어져 없는 상태로 돌아가는 거요. 하여 사물의 처음과 끝이 한없이 되풀이되어 다하는 일이 없소.”(전자방,516쪽)
 
이런 한없이 되풀이 되는 변화 속에서 마음을 평정하게 유지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는 것일까? 노자(노담)는 공자의 질문에 답한다. “작은 변화가 있어도 생활의 원칙이 바뀌지 않으면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이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518쪽). “천지와 만물이 하나라는 것을 깨달으면 외부의 변화가 나를 괴롭힐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 하늘이 저절로 높고 해와 달이 저절로 밝은데 새삼스런 수양이 필요하냐고 공자에게 되묻는다. 공자는 노담의 설명으로 이전과 다른 천지의 위대한 참모습을 알게 된다.
 
그러면 정치에서는 도를 어떻게 구현하는가? 문왕은 강태공을 등용해 치세를 잘 한다. 그가 강태공에게 정사를 맡기자 선비들은 자신의 치적을 자랑하지 않고 주변 제후들은 문왕의 정치를 믿고 같은 도량형을 쓴다.(524쪽) 문왕에게 道는 나라를 잘 다스리고 이웃 나라와 잘 지내는 것이다. 초나라의 손숙오는 세 번이나 재상이 되었지만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걱정하지도 기뻐하지도 않는다. 재상으로 있어도 그 자리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자리에 연연해하지 않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그런 사람 정말 드물다)
 
한편, 도는 말이 필요 없음에도 사람들은 굳이 말로 표현하는 것을 듣고 싶어 한다. 안회는 공자를 따라했으나 공자의 언저리에 겨우 머물러 답답하여 묻는다. “스승님이 걸으시면 저도 역시 걷고 스승님이 빨리 가시면 저 역시 빨리 가며 스승님이 달리면 저 또한 달립니다. 하지만 스승님이 달리는 말처럼 질주하셔서 먼지가 남기지 않을 정도가 되면 저는 그저 뒤에서 눈만 휘둥그렇게 뜨고 놀랄 뿐입니다(512쪽)”
 
스승이 도를 말할 때 안회도 道를 말하지만 안회는 元祖를 넘어서지 못한다. 공자는 안회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따라하지 말고 시간의 무상성에 대한 본질을 보라고 말한다. 그런데 공자는 안회와는 다른 답답함이 있었을까. 노담을 만나, 한층 업그레이드된(급수가 있다면) 질문을 한다. 만물의 시초에서 논다는 의미가 무어냐고. 노담은 역설적이게도 말로 나타내려 해도 말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도 도에 대해 말한다. 마치 빌브라이슨이<거의 모든 것의 역사>에서 이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고 만물은 어떻게 변하는지 설명하는 것처럼. 공자는 우주의 변화를 안 다음, 그 경지에서 노는 것은 어떠한지 질문을 밀어 붙인다.노담은 “만물이 변하더라도 도는 내 안에 있다”고 대답한다.
 
장자는 도를 표현할 수 없다고 하면서 ‘천기누설’ 처럼 역설적으로 도에 대해 많은 말을 남겼다. 그럼 우리가 도에 대해 들었다고 도를 실천할 수 있을까. 우리가 TV에서 보는 많은 건강 관련, 예를 들어<천기누설> 프로그램처럼 다른 사람이 아무리 몸에 좋은 약이라고 해도 내 상황에 맞지 않고 실천하지 않으면 스마트폰에서 순간 스친 영상과 다름없다.
 
道에 대해 『장자』의 전자방· 지북유에서 많은 인물들이 질문한다. 자신에게 닥친 고민을 해결하는 일은 우주의 본질에 대한 질문과 우열을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안회가 공자가 될 수 없고, 공자는 노담이 될 수 없다. 각자는 자신의 방식으로 도를 찾을 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보면 힘들고 혼란스러운 시기일수록 유토피아를 꿈꾼다. 장자가 살았던 혼란한 시대에도 차원을 달리해서 보는 세계관이 필요했을 것이다. 아울러 우주의 시작과 인간의 근원에 대해, 이상적인 정치에 대한 고민이 역설적으로 도를 찾는 과정에서 더 잘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안국선원에 다니면서 놀란 것이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나 말고도 깨닫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차원에서 무언가를 갈구했다. 도나 깨달음에 도달하기는 어려울지라도. 그때 안국선원에서 몸에 변화가 왔다고 느낀 것은 일시적이었다. 요실금이 나은 것은 묵언수행으로 물을 적게 먹어서였다. 폭포의 물방울이 내게로 떨어지는 느낌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게 깨달음인지는 말로 표현하기는 분명하지 않다. 두 번째는 묵언수행을 하고 밖을 나오면, 주위에서 끊임없이 울리는 광고가 너무 번잡하고 불편했다. 그 느낌으로 광고에 휘둘리지 않게 살아가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 작은 경험은 공자가 말한 항아리속의 벌레 같은 정도라도 되는 것이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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