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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누피들>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5장 발제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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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세븐세븐 작성일15-07-17 15:07 조회2,7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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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누피들 새 시즌 세미나의 3번째 시간. 간식으로 참치김밥과 김치김밥, 야채김밥을 고루 섞어 13줄을 준비했다. 감이당 학인의 고향인 강원도에서 공수했다는 옥수수는 방금 쩌냈는지 손으로 잡기 힘들 정도로 뜨거웠다. 스누피들 세미나의 열기 만큼이나.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을 통해 그 시대 교단의 성서 해석의 오류를 철저하게 비판한다.  성서의 내용이 정치적으로 왜곡되는 지점을 공격하고 바르게 읽어나갈 방법을 제시한다. 바로 성서라는 텍스트에만 근거해 철저하게 분석한다. 또한 "이성적 논거 또는 성경의 권위에 의해 지지되지 않는 건  상상의 허구"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힌다. "자신에 대해 올바른 추론을 위한 능력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추론에 의해 자기 주장을 증명할 수 없다"(5장 105p)는 것이다. 그게 바로 성서를 대하는 스피노자의 위대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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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장 '의식(儀式)이 제정된 이유에 대해...'는  구약성서 속의 의식은 단지 헤브라이인들만을 위한 것으로 '신성의 법칙'에 속하지 않고, 축복과 덕에 공헌하지 않음을 증명한다. 신(神)은 번제물과 속죄의 공양물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단지 유대 공동체의 통합 강화를 위한 관례에 따랐다는 것.  "의식의 거행이 오로지 세속적 번영에만 관심을 가지고 축복에는 조금도 공헌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오직 성서에 의해 명백하다."(93P 2번째 단락). 의식은 단지 헤브라이 국가를 보존하고 강화하는 데 기여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모세가 애굽 땅에서 탈출한 헤브라인들에게 물질적 보상을 약속한 반면 그리스도는 정신적 보상을 약속한다. 그리스도가 개인들이 마음의 평온과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도덕적인 가르침에 더 관심을 뒀던 이유다.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파하며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면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칠 것이며..."(이사야 58장) 

      유대 공동체가 출애굽 이후 혼란한 상황에서 사회 통합과 질서 유지를 위한 규범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만 결코 건전한 이성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속적 욕망에 따라 움직이다 보면 감정에 휘둘리기 마련이다. 사람들의 강한 욕망과 멋대로의 충동을 억제하기 위한 법과 이를 강제할 수 있는 국가가 출현한 배경이다.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을 쓸 당시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제시된 국가론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 지점에서 스피노자의 국가론이 언급된다.

     

     스피노자는 '온건한 통치론'을 편다. 폭력에 의존하는 통치는 오래 지속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형벌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행해야 할 행동의 유익함과 필요성에 자발적으로 따르도록 유도하라는 것이다. 온건한 통치를 위한 전제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공동체 전체가 유일한 조직체로서 정부에 대한 통제권을 가져야 한다'. 홉스가 자연 상태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종식하기 위해 개인들은 계약을 통해 1인에게 절대적 권한을 위임하는 것에서 진전된 개념이다.

    2) '모든 국가에서의 법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다급히 욕구하는 어떤 선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도록 고안되어야 한다'. 법을 지키도록 긍정적인 동기를 부여하라는 것이다.

    3) 주권이 모든 국민에게 부여되어 있고, 법이 공동의 동의에 의해 공인된 공동체에서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주권이 오직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을 경계한다.     

      

     스피노자는 이어 두 번째 주제로 넘어간다. '누구를 위해, 어떤 이유로 성서의 이야기들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 부분에 대한 스피노자가 제시하는 답변은 아래 내용에 담겨 있다.

     "성서 전체는 먼저 한 나라의 전체 국민을 위해 계시됐으며, 결국에는 모든 인류를 위해 계시됐기 때문에, 그것의 내용은 특별히 보통 사람들으 이해력에 적응되어야마나 했고, 오로지 경험에만 호소해야 했다."(102P) 신의 실체와 사물의 창조 등 성서의 가르침은 철학적 문제들과 관련돼 있다. 하지만 성서는 그 용어들에 대한 어떤 정의도 제공하지 않는 만큼 보통 사람들의 이해력으로 이해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삶의 방식을 실행하는 사람이 가장 복(福)이 있다고 한다. 신과의 관계를 인식하는 앎의 문제가  중요한 지점이다. 하지만 성서의 이야기를 전혀 알지 못하더라도 유익한 믿음을 갖고 참된 삶의 방식을 실행하는 사람도 유복하다고 강조한다. 그들 자신 안에 진정한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 기쁨, 평온, 인내, 친절, 선량함, 충실함, 온화함, 자제 등의 덕성이 많은 사람은(그가 이성에 의해서만 가르침을 받든 성경에 의해서만 그러든) 진정으로  신에게서 가르침을 받으며, 아주 유복하다."(106P). 5장에서 스피노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의 결론적인 부분이다. 이성의 명령에 따라 신과의 관계를 알고, 성서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그렇지 않더라도 일상에서 이웃을 사랑하고 그러한 마음을 실천하는 것. 그것 또한 그리스도의 정신을 구현하는 삶이다.

    

    세미나에서는 지식/지성/지혜에 대한 차이와 문명/야만에 대한 스피노자적 해석에 대한 의견이  뜨거웠다. 지혜는  인과성을 아는 지성을 뛰어넘어 직관과 유사한 3종지에 가까운 것이 아니냐는 용남샘의 생각에 공감했다. 

   반면 "문명의 영향을 받지 않고, 야만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비참하고 거의 짐승과 같은 생활을  하며.."에 언급된 '야만'이  이성(자연)의 빛을 따르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문명의 혜택에서 벗어난 원시상태를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논의하기로 했다.  

     5장을 마치면서 '과연 스피노자가 현대 한국 사회의 대형화한 종교 시설과 형식화한 예배, 헌금 등을 지켜본다면 무슨 말을 할까'라는 질문이 생겼다. 한국 교회는 성서의 가르침을 제대로 가르치고 있는가?  그리고 신도들은 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가? <신학정치론>을 썼을 당시 스피노자의 문제의식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 첨부 자료:  이스라엘의 역사와 관습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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