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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읽기세미나] 오자서의 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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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라 작성일15-08-25 22:14 조회2,6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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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8.19. 세미나 후기]


회담
애공 팔년 회맹을 자주하는데, 회맹이란 제후들이 모여서 회담하는 것을 뜻한다. 즉 안건을 나누는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중심이 옮겨지다
기원전 6세기이자 춘추시대 때, 정치와 경제의 중심이 북쪽에서 동남쪽으로 이전을 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경제적 조건이 달라지고, 쌀농사가 바뀐 것, 그리고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에 큰 이유가 있다. 그러면서 지식인계층도 형성되었다고 한다. 

오자서의 복수
 애공 8년, 초 영왕이 동생에게 시해를 당해 죽는데, 시해한 자는 바로 평왕이다. 평왕은 형을 시해하고 왕이 된다. 그런 평왕에게는 아들 태자 건이 있었다. 평왕은 태자 건에게 秦나라 여자를 아내로 삼아주려고 신하를 秦나라로 보낸다. 하지만 구해온 여자가 너무 아름다웠던 탓에 본인이 再娶(두 재, 장가들 취-두 번째 결혼)를 한다. 그렇게 재취를 하므로 새로운 아들을 얻는데, 그 아들을 왕으로 등극시키려 태자 건을 죽인다. 

태자 건이 죽을 때 그의 사부도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데, 그는 바로 오자서의 아버지였다. 오자서 또한 죽음을 당할 뻔했으나 오나라로 도망가므로 죽음을 면한다. 도망칠 때 태자 건의 아들인 백공과 함께 도망을 가는데, 너무 스트레스를 받은 탓인지 하룻밤에 머리가 하얘졌다고 한다.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한 오자서는 합려와 함께 힘을 기른 다음, 초나라 수도인 영을 점령한다. 하지만 평왕은 서거하였고 그의 아들인 초 소왕은 수로 달아나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오자서는 복수를 하기 위해 평왕의 시체를 무덤에서 꺼내어 300대의 채찍질로 한을 푼다. 

한편, 초나라의 대군인 신포서가 있었다. 신포서는 오자서와 막역한 사이였는데 초나라를 망하게 하려고 하자 秦나라의 애공에게 찾아가서 구원병을 요청한다. 하지만 애공은 군대를 포병해 줄 처지가 되지 않아 거절을 한다. 이에 신포서는 물러나지 않고 7일동안 곡(큰 소리로 우는 것)과 읍(흐느끼며 우는 것)을 한다. 이것은 신포서가 죽을 각오한 것이라고 한다. 

신포서의 간절한 부탁에 애공은 500승을 보내주어 초나라를 구해준다. 이때의 승의 한자는 ‘乘’ 모양이다. 이 한자 모양에는 말과 사람이 담겨있다. 1승에는 4마리의 말과 올라탄 사람들이 포함되어있는데 대략 100명의 사람이 쫓아다니는 것이다. 5백승은 곧 5만명의 군사를 보내준 것이다. 그러므로  오자서를 물리치고 초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고 한다. 

애공이 초나라를 위해 군사를 보낼 때 지어진 군가가 있는데 시경에서 볼 수 있다. 제목은 無衣, ‘옷이 없어야’이다. 

순장제도
헌공 원년, 순장제도가 폐지된다. 이것은 휴머니즘의 발로이기도 하지만 제일 큰 이유는 인구의 문제이다. 사람을 한꺼번에 묻음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과 그만큼의 인력이 필요한 것이 문제이므로 폐지되었다. 

강대국이 되려면 두 가지의 조건이 따라줘야 하는데, 하나가 땅의 넓이이고 다른 하나가 인구량이다. 잠시 땅의 이야기를 해보자면 이전의 시대에는 약탈경제였기 때문에 땅을 소유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땅을 차지해야하기 때문에 달라졌다. 즉 국가경영의 마인드가 달라진 것인데, 이주정책으로 바뀌는 것이다. 

다시 순장제도로 돌아와서 순장제도는 강대국의 조건인 인구량에 영향을 줬기 때문에 헌공은 순장제도를 폐지한다. 이를 대신해서 사람이 아닌 나무인형(모구)을 집어넣거나 흙으로 만든 인형(토용)을 집어넣었다. 

태사 담
태사 담이 등장하는데 노자라고 추정되는 사람 중의 한 명이다. 노자는 말을 타지 않았다고 한다. 말 대신 소를 타고 다녔는데, 그 소는 푸른빛이 났다고 한다. 이 소를 타고 관문을 나가려고 하다가 문지기인 윤희와 마주친다. 이를 본 윤희는 노자에게서 후광을 느끼고는 그냥 가지 말고 생각을 적어놓고 가달라고 한다. 그 때 노자가 5000자를 적고 서쪽으로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렇게 떠난 노자는 북쪽의 유목민들을 교화시킨다. 그 후 노자는 죽고 천년이 지난다. 그때 우즈베키스탄이나 다른 지방의 사람들(머리를 빡빡 깎은 사람들)이 중국으로 들어오는데, 중국 사람들은 이 사람들이 스님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노자의 제자인 줄 알고 잘 받아들였다고 한다. 즉 불교가 들어오는 것에 종교적 갈등이 없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불교와 도가가 섞이며 의미를 비교하고 격조하는데 이것을 격의불교라고 한다. 불교의 공(空)과 도가의 무(無)를 비교했다고 한다. 이때 금강경을 번역하는 시대가 열린다. 

기상 이변
헌공 16년, 겨울에 도화(桃花)꽃(복숭아 꽃)이 피고, 18년에 역양에 황금비가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정상적인 것은 기록하지 않고 자연의 이변을 기록한다. 겨울에 도화꽃이 핀 것은 그만큼 따뜻했던 것이라고 추측을 하는데, 황금비가 문제이다. 제일 쉬운 예상이 흙비이지만 흙비였다면 원문에 金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진 않았을 것이다. 운석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고, 진짜 황금일 수도 있는데, 아직은 확실한 추측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이변들은 대부분 상서로운 것으로 해석한다. 서양에서는 마녀라던지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는데, 동양은 길조 또는 흉조로만 해석한다. 대부분 길조로 좋게 해석했다고 한다. 이런 것을 황제에게 받쳤는데 이변을 꼭 해석했다고 한다. 해석하는 자가 바로 대학자지고, 주로 공자가 해석을 많이 했다. 


효공의 담화문
“효공 원년, 황하와 효산 동쪽에 여섯 개의 강대국이 있었는데, 진 효공은 제 위왕, 초 선왕, 위 혜왕, 연 도후, 한 애후, 조 성후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사마천, 사기본기, 까치, 132쪽
 
효공때부터 사마천은 지도를 펼친다. 즉 인용문에 나와 있듯이 주변의 나라도 함께 기록하는 것이다. 이때가 맹자, 장자, 혜시, 공손용의 시대인데, 효공은 이들을 만나지 않고 상왕을 만났다고 한다. 
  
효공은 동쪽으로 가고 싶었으나 강대국이 6개가 있으므로 고민을 하게 된다. 또한 진목공 때 진(秦)나라가 지지부지해서 다른 나라들이 우습게 여기는 때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지식인이 없는 문제가 있었고, 문화적인 힘이 약했던 문제도 있었다. 그러므로 회맹(회담)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이 창피한 일을 왕으로서 어떻게 할 것인가. 제일 중요한 민심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왕의 고민이었는데, 효공은 은혜를 베풀었다고 한다. 나라에서 은혜를 베푸는 것은 실질적인 것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쌀을 나누어주고(구휼救恤), 군대를 면제해주고, 죄수들을 재조사해서 억울한 이들을 풀어주었다. 또한 공상도 운영했는데, 공상이란 어떤 자가 공을 세웠을 때 바로 상을 주는 것이다. 이러기 위해선 계산이 철저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문제였다. 이것은 효공뿐만 아니라 진시황도 신경을 썼다. 
  
하지만 아직도 부족했는데, 그것은 나라를 다시 강대하게 키우기 위해선 획기적인 개혁이 필요했던 것이다. 즉 나라에 현자가 없는 것. 그러므로 효공은 국중의 하령(담화문)을 발표한다.  

“헌공께서 즉위하시어 변경지역을 안정시키고 역양으로 천도하여 다스렸으며, 동쪽으로 정벌하여 목공 때의 영토를 되찾고 목공의 정치 강령을 시행하고자 하셨다. 나는 선왕의 유지를 생각할 때마다 항상 마음이 아프니, 빈객과 여러 신하들이 진이 강국이 될 수 있는 기발한 계책을 내준다면 나는 관직을 높여주고 토지를 나누어 줄 것이다.”
-사마천, 사기본기, 까치, 133쪽
 
이러한 담화문을 만들어 중국에 퍼뜨리는데, 이 소문에 의해 중국의 지식인들이 진(秦)나라에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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