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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읽기 세미나] 통일제국의 기틀을 다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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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만수 작성일15-08-28 19:40 조회3,0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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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제국의 기틀을 다지다
-진효공과 상앙-

이번 주 세미나에서는 효공-혜문군-무왕-소양왕으로 이어지는 시대를 읽었다. 이 시기는 진이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 시기이며, 유세가였던 상앙이 진효공을 만나 서로를 탐색하는 장면이 잘 드러난 부분이기도 하다. 우샘께서는 상앙이 펼친 신법이 어떤 것인지, 당대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지난 시간 복습 겸 진나라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먼저 정리해보자.

부락에서 제후국으로
진의 선조는 전욱(顓頊)의 후손으로 이름은 여수(女修)이다. 여수의 아들은 우(禹)의 치수사업을 도와 순에게 등용되어 영(嬴)이라는 성을 받았다. 그 후손들은 대부분 서북방의 이민족과 함께 살았다. 진은 제후국 가운데 가장 늦게 건국되었다. 주 왕실이 힘을 잃자 진은 기(岐)와 풍(豊) 일대에서 세력을 키우게 된 것이다. 진의 군주가 제후가 되자 비로소 다른 제후국의 군주들과 외교관계를 체결할 수 있었다. 
  
진(秦)의 목공은 이웃나라 진(晉)이 왕위쟁탈전을 벌일 때, 군사적·외교적 실력을 발휘해 원래 진(晉)의 영토였던 황하 서쪽 땅을 차지했다. 그리고 서쪽으로도 세력을 확장해 국토를 확장했다. 세력이 커지자 다른 제후들은 그를 ‘서융의 패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목공이 죽자 진의 기세는 잠시 멈추게 되었다. 그 이후 몇 세기 동안 진은 중원으로 진출하지 못했고, 다른 제후들은 진을 오랑캐처럼 생각해 제후들의 회맹에도 끼워주지 않았다.
  
진은 귀족들의 세력이 지나치게 센 편이었다. 그들은 군주를 마음대로 옹립하고 폐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정국이 불안해지기 마련이다. 내정이 흔들리자 주변 세력들은 진을 무시해 함부로 대했다. 헌공이 즉위하여 몇 가지 제도를 개혁했다고 한다. (순장제도 폐지, 호적 제도 확립 등) 또한,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는데 재위 기간이 짧아 상황을 확 바꾸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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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효공(秦孝公)과 상앙(商鞅)
 효공의 이름은 거량(渠梁)이며, B.C 381년 정월 경인일에 태어났다고 한다. 21세에 왕위에 오르는데, 그는 원대한 포부를 가진 사람이었던 것 같다. 효공은 즉위하며 어려운 사람들을 구휼하고 지식인들을 등용하는데, 그 중 한 명이 바로 상앙(商鞅)이다. 상앙은 「상군열전」에 자세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름이 앙(軮)이고 상땅을 받았기에 ‘상앙’이라고 한다. 원문에서는 ‘위앙’이라고도 한다. 이는 위(衛)나라에서 왔다는 뜻이다. 
  
위앙은 반포령 소문을 듣고 서쪽으로 진나라에 와서 경감(景監)을 통해서 효공에게 알현을 청하였다. (까치, 『사기본기』, 「진본기」, 134p)

경감은 ‘景’이 이름이고 ‘監’은 환관이라는 직책이다. 위앙은 처음 효공을 만나 오제(五帝)의 도리로 이야기했으나, 효공은 졸며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 위앙이 간 후 효공은 위앙을 소개해준 경감을 꾸짖었다. 닷새 후 위앙은 다시 효공을 만나 열심히 이야기했으나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다. 위앙이 물러간 후 효공은 경감을 다시 책망하였다. 경감이 위앙에게 뭐라고 하자 위앙은 효공에게 “삼왕(三王)의 도리로 진언하였는데 아직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봅니다”라고 하며 다시 만나게 해줄 것을 청했다. 그 후에는 오패(五覇)의 도리로 진언하였고, 효공은 함께 이야기 나눌만한 사람이라고 평하였다. 그제서야 위앙은 효공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 이후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데, 효공은 며칠이고 말을 주고받으며 싫증을 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 위앙은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위앙이 말하기를 “제가 공에게 오제, 삼왕의 도를 실행하면 하, 은, 주 삼대에 비길 만한 태평을 누릴 것이라고 말씀드렸더니, 공께서 ‘너무나 길고 멀어서 나는 기다릴 수 없소. 그리고 현명한 군주는 자기가 재위하고 있을 때, 전하에 이름을 나타내려고 하는 법이오. 어찌 답답하게 수십년이나 수백년을 기다린 후에 제왕의 대업을 성취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하였습니다. 때문에 제가 나라를 강하게 하는 방법을 군왕께 말씀드렸더니 군왕께서 기뻐하신 것뿐입니다. 그러나 역시 은, 주와 덕행을 비교하기는 곤란합니다”라고 하였다. (「상군열전」, 91p)

위앙이 말한 ‘나라를 강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상업보다는 농업을 장려하고,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상을 확실하게 주는 것이었다. 이는 귀족 세력의 힘을 누르고, 농민들의 세력에 힘을 주는 정책이었다. 

3년, 위앙은 효공에게 법령을 바꾸고 형벌을 정비하며, 안으로는 농사에 힘쓰고 밖으로는 전사한 자들의 상벌을 분명하게 하도록 권하자, 효왕은 위앙의 말을 좋게 여겼다. 그러나 감룡과 두지 등이 동의하지 않아 서로 논쟁을 벌였다. 결국 효공이 위앙의 신법을 채용하자, 백성들은 그 법으로 고통을 당하였으나 3년이 지나서는 백성들이 그 법을 편리하게 여겼다. 이에 효공은 위앙을 좌서장에 임명하였다. (134p)

감룡과 두지는 위앙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나오는데, 이들은 진나라의 토착 세력 즉 귀족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효왕은 위앙의 법을 채택했고, 위앙의 말에 따라 수도를 함양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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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앙의 개혁법
이 시기에 행정제도가 개편되었다. 자연부락에서 군현제로 바뀐 것이다. 이는 커다란 변화였다. 한 부락에서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는 것이 자연스러운 부족 형태에서 중앙에서 파견하는 관리들이 다스리는 방식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때 처음으로 ‘부세’라는 세금이 등장한다. 국토방위를 위한 세금으로 일종의 ‘방위세’라고 할 수 있다. 
  
농업과 전쟁을 중시했고, 상업은 게으른 자들이나 하는 것이라며 천대 당했다. 왜냐하면 농업은 한곳에 자리 잡고 사는 것인데 반해 상업은 끊임없이 돌아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상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세금을 받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상앙의 신법에는 이사를 하지 못하게 하는 등의 정착에 대한 항목이 포함되어 있다. 
  
『상군서』에는 상앙의 신법이 소개되어 있다. 
첫째, 관리들을 관리한다.
관리들이 빠르게[敏] 일을 처리하도록 하였으며, 부정부패에 대해서도 엄하게 단속했다.

둘째, 기이한 복장과 음탕한 음악을 금지한다.
사람들의 마음을 홀리게(!) 만드는 것들을 봉쇄하는 방법이다. 미니스커트나 장발을 단속하고, 노래를 금지곡으로 지정했던 것을 떠올리면 된다.

셋째, 술과 고기의 가격을 10배 올린다.
이는 기호품에 대한 중과세를 매기는 것으로 흥청망청 놀고먹지 못하도록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담배값 인상이라 할 수 있을 텐데, 2500원에서 5000원으로 올랐을 때에도 반대가 극심했는데 10배라니! 300ml 맥주 한 캔이 3만원이라고 한다면… 먹고 싶은 마음이 사그라들 것도 같다.

넷째, 이사 금지 & 우민 정책
이는 세금을 잘 확보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백성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함이기도 할 것이다. 

다섯째, 중농정책
황무지를 개간하여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또, 상앙은 국가의 중요한 데이터들을 수량화하는 ‘통계 정치’를 펼치기도 했다. 그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13개 항목들은 국경 안 식량 창고의 개수, 총 인구의 수, 남자의 수, 여자의 수, 노인의 수, 몸이 허약한 사람들의 수, 선비의 수, 유세가의 수, 농민의 수 등등 세분화 하여 관리했다. 가축으로는 말, 소의 수치와 먹이인 꼴의 수치까지 세밀하게 관리했다.

상앙의 신법이 처음 도입되었을 때 백성들 뿐 아니라 귀족들도 법을 잘 지키지 않았다. 태자가 법을 어기자 상앙은 태자 또한 처벌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왕이 될 사람인지라 태자의 스승이 대신 벌을 받았다. 그 벌은 이마에 죄인의 표시를 하는 경형(黥刑)이었다. 태자가 또 법을 어기자 이번에는 코를 베는 의형(劓刑)을 태자의 스승이 받게 되었다. 이처럼 엄격하게 상과 벌을 내렸기에 진나라는 차츰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졌다. 그러나 효왕이 죽자 태자는 상앙을 바로 처벌했는데, 사지가 수레에 찢기는 거열형을 받게 되었다. 상앙이 죽은 이후에도 그의 신법이 계속 유지되면서 진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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