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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읽기세미나]9월2일 후기-상군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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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깜봉시연 작성일15-09-08 20:31 조회2,69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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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법(新法)으로 이름을 남긴 상앙

-상군열전-


‘우샘 검색창’(묻기만 하면 다 나오니까^^)에는 신법(新法)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둘이다. 하나는 전국시대의 인물인 상앙이고, 다른 한명은 송나라의 왕안석이다. (신법이 무엇인지는 지난주 만수의 후기에 자세히 나와 있다.) 상앙은 신법 개혁에 성공했고 왕안석은 실패해서 죽음을 맞이했다. 물론 상앙도 말로가 그다지 좋지는 못했지만 아무튼 그의 신법은 그가 죽고 난 후에도 오랫동안 쓰였다. 진나라가 제국을 통일하는데도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후에도 ‘제국의 시스템’으로 길이길이 사용됐단다.

우샘께서는 몇 주 전부터 이 상앙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셨다. 그러다가 이번 주는 본격적으로 상군열전을 읽기로 했다. 여기서 잠깐! ‘상앙 열전’이 아니고 왜 ‘상군열전’일까? 이름은 앙(鞅)이다. 성은 공손(公孫)으로 풀 네임은 공손 앙이다. 그는 본래 위(衛)나라 왕의 서자다. 위나라에 사는 앙이라서 위앙(衛鞅)이라고도 불린다. 나중에 진나라로 건너가 공을 세우고 상(常) 땅을 받고 상군(商君)이라고 불렸다. 그러니까 상앙, 상군, 공손앙, 위앙은 모두 같은 사람이다.(^^)

불리는 이름이 여러 개인 만큼 그의 삶도 아주 다채로웠다. 위(衛)나라에서 태어났지만 한때 위(魏)나라의 재상 공숙좌를 모셨다. 하지만 공숙좌는 병으로 죽고, 위(魏)혜왕의 부름도 받지 못했다. 마침 진(秦)나라에서 인재를 구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오르막을 향해 돌진한다. 신법(新法)은 그의 전략상 무기였던 셈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상땅 뿐만 아니라 오를 비롯해 15개의 읍을 봉해 받고 상군이 되었다. 하지만 높이 올라갔다는 것은 그만큼 가파르게 내려와야 한다는 의미기도 하다. 진나라의 왕이 되지 못할 바에는 누구나 그렇다. 잘 내려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역시 제명에 죽지 못했다. 그래도 원하던 바(법이 널리 퍼지는 것)를 이루었으니 잘 됐다고 해야 하나?

우샘께서는 상군열전의 스토리를 풀어주시는 것과 더불어 이야기의 포인트로서 주의 깊게 봐야 하는 부분을 콕콕 찝어서 알려주셨다. 알고 보니 더 재미있었다. 그렇게 알게 된 몇 가지를 정리해보겠다.


위앙은 원래 법을 좋아해요

공숙좌는 죽기 직전 위 혜왕에게 위앙을 쓰든지, 죽여야 한다고 당부한다. 위앙에게도 자신이 왕에게 한 말을 알려주며 당장 도망갈 것을 권했다. 하지만 혜왕도 위앙도 공숙좌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 결과 위앙은 위나라를 빼앗아 상군이 됐고, 혜왕은 위앙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아래쪽 작은 양땅으로 내려가 양혜왕이 되는 굴욕을 겪었다.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없었던 혜왕과 위앙의 대결구도는 위앙의 현명함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 주었다.

위앙은 진나라의 효공(孝公)을 세 번의 독대 끝에 왕의 입에 딱 맞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것은 먼 옛날 요순이 했다는 ‘오제의 도리’도, 덕으로 정치를 한다는 ‘왕도정치’도 아니었다. 왕의 마음에 닿은 정치는 바로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군대를 강하게 하는 부국강병 혹은 강국지술 책인 ‘오패의 도리’였다. 드디어 입맛에 딱 맞는 이야기를 듣는 효공은 너무 열중하다보니 무릎이 자꾸 앞으로 나오는 줄도 몰랐단다. 효공왈 “현명한 군주는 자기가 재위하고 있을 때, 천하에 이름을 나타내려고 하는 법”이라나. 위앙은 드디어 자신을 알아봐 줄 군주를 만난 셈이다.

이야기를 듣다보면 위앙이 오제의 도리도 삼왕의 도리도, 오패의 도리도 모두 펼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왕이 원해서 패도정치를 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반전이다. 위앙은 원래 ‘형명지학(形名之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힌트다. 이 혁명지학이란 법가를 의미한다. 따라서 위앙은 원래 법가를 지향한 인물이다. 고로 효공과 위앙은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었다.

위앙이 만든 새로운 법은 사람들의 생활 습속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그 첫 번째는 다섯 집을 기본으로 그룹핑 관리를 하는 오가작통법이다. 형벌을 엄격하게 해서 서로를 감시하고 고발하도록 만들었다. 두 번째는 부부와 자식을 기본단위로 세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분가를 권장했다. 만약 지키지 않으면 부세를 두 배로 내도록 했다. 세 번째는 초과 성과를 내면 상을 주고 게으름을 피우면 벌을 줬다. 네 번째는 전쟁에 나가서 싸우는 것은 적극 권장했지만 사적인 보복은 못하도록 막았다. 라이프스타일의 단위를 정해주고, 공적인 시스템으로 바꾼다는 의미는 바로 왕조의 신민으로 훈련시킨다는 것과 뜻이 같다.

사람들은 이런 법을 처음부터 잘 따랐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위앙의 말처럼 백성은 성과를 즐길 수는 있지만 시작할 때는 함께 의논할 수 없는 법. 그런 백성들을 어떻게 하면 설득할 수 있을까? 여기 위앙의 돋보이는 아이디어가 있다.


三丈之木으로 법령을 선포한다

백성들의 불신을 염려한 상앙은 저잣거리 남문에 3장짜리, 즉 9cm정도 되는 나뭇가지를 세워놓고는 북문으로 옮기면 10금(金)을 주겠다고 했다. 10금(金)이면 얼마나 될까? 1금이 황금 1근(斤)이라는데 한 근이면 혹시 600그램인가? 그럼 금 한 돈에 3.75그램이니까 얼마인지 정확히는 몰라도 어마어마한 돈일 것. 하지만 사람들은 그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아무도 나무를 옮길 생각을 하지 않자 이번엔 상금을 50금으로 화끈하게 올렸다. 드디어 혹시나 하고 나무를 옮긴 자가 있어 상금을 받았다. 이 사람은 땡잡았다. 이 에피소드에서 유래된 사자성어가 ‘三丈之木’이다. 위앙이 나무를 옮기는 것으로 백성들을 믿게 만들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제부터 선포되는 법령은 엄하게 지켜질 것이다. 법이 얼마나 엄했던지 부당함을 호소하는 자가 천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이때 태자가 법을 위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자 위앙은 태자 대신 태자의 스승에게 벌을 내렸다. 신법의 권위는 다음 대권주자보다 힘이 셌다.

법령이 시행된지 10년이 되자 백성들도 만족했다고 한다.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았고, 산에 도적이 없었으며, 집집마다 풍족하고, 사람들마다 넉넉하였다. 백성들은 국가를 위한 전쟁에는 용감하였고, 개인적인 싸움에는 겁을 먹었다. 그래서 도시나 시골이나 잘 다스려졌다. (사기열전 上 까치본 94쪽)


사람들 사이에서는 법령이 너무 좋다며 장점을 말하는 자들도 생겨났다. 하지만 위앙은 이런 칭찬을 반기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말이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힌다며 멀리 내쫓았다. 법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나오는 것 자체를 차단해 버린 것이다. 백성은 법을 평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냥 지킬 의무만 있다는 것을 주지시키려는 행위가 아니었을까.

신법이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자 상앙은 진나라의 15번째 등급으로 승진을 했다. 국가의 부도 그만큼 축적되어 위나라를 공격하고 옹에서 함양으로 천도를 했다. 진효공과 상앙이 원한 부국강병을 이룩한 것이다.


자기가 만든 법에 걸려 죽

위나라의 장군 공자앙을 유인해서 사로잡은 상앙은 드디어 위나라를 박살냈다. 이 사건으로 위혜왕은 동쪽으로 찌그러지면서 양땅으로 건너가 양혜왕으로 불리게 됐다. 그 옛날 공숙좌의 말을 듣고 위앙을 처리하지 못한 자신을 한탄했지만 과거를 돌이킬 수는 없는 법이었다. 덕분에 위앙은 재물과 명예를 거머쥐며 권력의 정점을 맛보았다.

하지만 자리가 높아질수록 상군은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상군을 밀어주던 진효공이 죽고 말았다. 다음 왕은 바로 상군이 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처벌했던 태자였다. 끈 떨어진 상군은 모함을 당하자 도망을 쳤다. 함곡관에 이르러 객사에 묵으려 하자 주인은 법이 엄해서 여권이 없으면 받아줄 수가 없다고 거절을 한다. 그만큼 법은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만들어 놓은 법이 자신을 위험에 빠뜨린 지경이니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상황이 아닌가. 결국 상앙은 사지를 다섯 수레에 묶어 찢어 죽이는 거열형(車裂形)에 처해져 죽고 말았다. 죄명은 모반죄였다. 법을 만들고, 이 법에 걸려 죽음을 맞이한 상군에 대한 태사공의 평을 마지막으로 후기를 마치겠다.

“상군은 천성이 각박한 사람이다. 그가 당초 제왕의 도로써 효공에게 유세한 것을 살펴보면, 허위의 설을 늘어놓은 것이지 그의 진심이 아니었다. 군주의 총애를 받은 태감에게 주선을 부탁하고 등용된 후에는 공자 건을 처형하고 위나라의 장군 앙을 속이고 조량의 충고를 따르지 않은 것은 역시 상군이 은정이 적음을 충분히 증명해준다. 나는 일찍이 상군이 저술한 「개세(開塞)」 「경전(耕戰)」 등을 읽었는데 그 내용이 본인의 행적과 비슷하였다. 상군이 결국 진나라에서 악명을 얻게 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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