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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기잡스2>9/4 수업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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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콩나물 작성일15-09-15 00:04 조회2,3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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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추수, 지락 & 『세계지리를 보다』라틴아메리카上


장자가 혜자와 함께 호수의 징검돌 근처에서 노닐고 있었다. 장자가 말했다.


피라미가 한가롭게 헤엄치고 있소. 이게 물고기의 즐거움이란 거요.


혜자는 말했다. 당신은 물고기가 아니오.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단 말이오?


장자가 받았다. 당신은 내가 아니오.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는 걸 안단 말이오?


혜자는 말했다. 나는 당신이 아니니까 물론 당신을 알지 못하오. 당신은 물론 물고기가 아니니까 당신이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는 게 확실하단 말이오.


장자가 대답했다. 자 처음으로 돌아가 말해 봅시다. 당신은 “어찌 당신이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단 말이오?”라고 했지만, 이미 그것은 내가 안다는 것을 알고서 내게 물은 거요. 당신은 내가 아니면서도 나에 대해 그렇듯 알고 있지 않소! 나는 호숫가에서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았단 말이오. ('물고기의 즐거움' 장자<추수>)




장자는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다하고 혜자는 물고기도 아닌 네가 어찌 아냐고 물고 늘어지고……. 언뜻 보면 말장난 같은 공방이 오고가는 <추수>속 한 대목이다. 발제를 맡은 태연샘은 이 대목을 학창시절 선생님들의 구타와 연결시켜 ‘재해석’이라는 자기표현을 시도했다.


요컨대, 장자가 물고기가 아니지만 물고기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학창시절 학생들은 선생님이 아니지만 선생님의 상태를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날 구타가 벌어질 것인지 아닌지를 미리 예상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물고기와 장자는 즐거움으로 연결되어 있었지만 태연샘으로 대표되는 학생들과 학교선생님과는 매질과 공포로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 듣는 이의 안타까움을 샀다. 학창시절의 처절한 이 경험은 ‘타인이 아니지만 타인의 상태를 너무도 잘 느낄 수 있다’는 것의 절절한 예시었다.
  


서로의 상태를 알 수 있다는 것은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 연결의 장(관계)에서 외부를 자신의 언어로 해석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가 있지만 관계 속에서는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섞임이 일어나기에 우리가 누군가와 관계하는 것은 ‘재해석’일 수 있다고 발제자는 이야기했다. (일반적으로 그냥 ‘해석’이라고 말해지는 것을 왜 굳이 ‘재해석’이라고 썼는가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전이 오고갔다)




다음으로 이야기된 것은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 도의 경지에 이르는 에피소드들이었다. ‘포정해우’편은 <양생주>에 있는 내용이지만 주로 언급이 되었는데 포정처럼 도의 경지에서 소를 잡는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대해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었다.


그때의 토론을 제대로 소화하지는 못한 것 같은데 나름 이해한 대로 정리하자면, 한 측에서는 포정 같은 도의 상태에 이르려면 긴 시간동안의 반복된 수련이 몸에 쌓여야 가능하다고 이야기를 했고,


다른 한 측 에서는 시간은 쌓이는 것이 아니며,  순간순간만이 존재하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도(道)라는 것은 몸을 어떤 상태로 끌어 올려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운동성과 천지만물의 운동성이 맞물려 돌아가는 순간, 드러나는 것이라 했다. 세미나 시간에는 이 문제를 가지고 장시간 공방전을 벌였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두 의견은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포정해우의 어느 부분에 강조점을 두느냐에 의해 갈라진 것 같다.


도라는 경지에 이르기 위해 무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자면 19년이라는 시간이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반면, 이미 정해진 길의 끝(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몸을 단련하고 시간을 축적한다는 유위적 사고를 조심해야 한다는 데 중점을 두면, 소의 뼈마디의 틈을 통과할 만큼 자기가 지닌 칼의 두께가 혹은 자기 존재가 기의 흐름처럼 가볍고 변화되는 경지를 ‘드러남의 순간’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쉽진 않았지만 즐거운 토론이었다.  마침 그날 저녁 감성1학년 수업시간에 길진숙선생님이 장자의 포정해우 이야기를 하셔서 ‘포정해우‘를 유위, 무위 중 어느 관점으로 봐야하는지 질문을 했다. 길샘은 두 번째 의견에 동의하지만 이미 우리의 세계는 너무 많은 유위로 가득차서 무위에 도달하기 위해 19년의 수련은 필수적이라는 요지의 말씀을 하셨다.




긴 장자 이야기를 마치고 <<세계지리를 보다>>로 넘어갔다. 내가 발제를 맡은 부분으로 라틴아메리카였다.


발제문 제목이 ‘흥미진진 라틴아메리카’였는데, 마야문명, 버뮤다 삼각지등 미스터리 감성을 자극하는 것들이 들어있고, 캐러비안의 해적의 무대도 이곳이다. 또 산 사람을 잡아 바치는 제의식을 지낸 태양숭배의 아즈텍 문명과,  대륙의 잘록한 허리를 가로지르는 파나마 운하 등 많은 이야기꺼리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라틴 아메리카는 황금을 찾아온 스페인, 포르투갈 등의 유럽문명과, 원주민인 인디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노동력을 위해 끌고 온 흑인이 섞여 혼혈문화를 이루고 있다.


유럽인들이 가져온 것은 가톨릭과 플랜테이션 농업이었고, 아프리카인들은 춤과 음악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 외부적 요소들이 인디오들의 잉카, 마야, 아즈텍 문명의 바탕 속에서 섞여 지금의 남아메리카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할 말은 많지만 짧게 두 가지에 대해서만 언급하겠다. 
*마야문명의 20진법.

Etc_Poem_50_13.jpg

마야인들은 ‘0’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발명했다고 한다. 그림속 조개그림이 ‘0’이다. 그리고 긴 막대기와 점으로 숫자를 표현한 것이 주역의 괘와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잠시 우스갯소리로 마야문명 중국인기원설을 얘기했는데…….혹시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파나마 운하

파나마.jpg


지도상으로는 좁아보이지만 실제로는 50Km나 길이의 운하를 만드는 공사는 쉽지 않았다. 강도높은 공사와 풍토병으로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하지만 1만 Km를 돌아가는 것보다는 나았으니 프랑스에 이어 미국인이 이 땅을 영구조차하여 공사를 마쳤다.


책에서는 태평양과 대서양의 높이 차가 커서 갑문형식으로 수로를 건설할 수밖에 없었다고 나와 있다. 이 대목에서 해수면이 어떻게 차이가 날 수 있느냐 의문이 생겼다.  그래서 찾아보니 대서양과 태평양의 높이차는 거의 없고 만약 있다해도 1m 이내라고 한다.


그런데 배를 계단식으로 들어 올리는 갑문형식의 수로를 만든 이유는 내륙에 있는 가툰호, 미라플로레스 호수등과 바다와의 높이차 때문이라고 한다.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남은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충분히 들을 수 있을꺼라 여기며(^^), 수업 후기를 마칠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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