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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세미나> 은본기, 주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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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경 작성일15-05-29 07:23 조회2,8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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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는 은 본기 뒷부분과 주 본기 앞부분을 보았다. 은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紂)은 하나라 걸왕과 함께 포악하고 잔악함의 대명사로 불린다. 그는 기름을 칠한 기둥 아래 불을 피워놓고, 죄인에게 기둥 위를 걷게 하여 불에 타죽게 하던 형벌(포락)을 시행했는가하면, 자신에게 바친 여인이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죽이고 그녀의 아버지인 구후까지 포를 떠서 소금에 절였다. 이 정도로 가혹행위를 하는 왕의 기록은 우리나라에선 거의 없다. 다만, 아내와 자신의 아이들을 죽인 궁예나 삼천 궁녀를 떨어뜨리게 한 의자왕의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또 박제상이 왜국에 잡혀가서 포락형에 처했다는 애국 계몽기 기록이 있다.


서백은 주나라를 세운 왕이다. 은 말, 서백은 주왕의 잔혹행위에 몰래 탄식했다가 유리에서 감방 생활을 했다. 감옥에서 주역 64괘를 만들었다. 다행히 서백을 따르는 세력이 주왕에게 미녀와 귀한 물건들을 바쳐서 풀려났다. 서백은 선물에 마음이 풀린(?) 주왕에게 궁시부월(활과 화살, 도끼들)을 받았고, 서방 제후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서백은 감옥에서 나오면서 주왕에게 포락형을 없애달라고 했다. 그 대가로 낙수 서쪽 땅을 바쳤다. 포락형이 없어지면서 서백은 민심을 얻게 되었다. 오늘로 따지면 대권주자의 길을 탄탄하게 다진 것이다.


주왕에게 간한 조의란 사람도 나온다. 조의는 서백이 정벌한 기국 출신 사람이다. 서백의 세력이 커지자 위협을 느끼고 주왕에게 달려 왔다. 이 때 달려왔다는 의미로 쓰인 한자가 ‘奔(분)’이다. 원래 고형이 소 세 마리가 뛰는 모양이라고 한다. ‘달아난다’는 뜻. 정신없이 달아나다보니 국경선을 넘거나 불륜의 남녀가 야반도주할 때 쓰는 한자이기도 하다.


조의는 임금에게 간한다. 임금이 음란하고 포악한 행동을 해서 스스로 하늘과의 관계를 끊어버렸다고, 그래서 하늘이 은나라를 버리신 거라고 말이다. 그런데 정말 그 무시무시한 주왕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렇게 말하고 어떻게 조의는 젓갈이 되지 않고 살아 돌아갈 수 있었을까? 그는 주왕의 신하가 아니었던 것이다. 프리랜서같이 독자적인 세력, 이윤 같은 개국 공신의 후손 정도 되었을 것이다. 사기를 그냥 읽었을 때는 이런 인물들의 캐릭터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보니 당시의 상황이 보다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 외에도 지명에 담긴 에피소드도 찾아 볼 수 있다. 세월이 지나 서백이 죽은 후, 동쪽을 정벌한 주나라 무왕이 여러 제후들과 맹진에 모였다고 한다. 盟津(맹진)은 맹약을 한 나루터란 뜻이다. 그 전엔 그곳은 맹진이 아니었고, 아마 그들이 모임을 한 후에 붙여졌을 것이다. 모인 제후들은 8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 사실은 당시 국가가 아주 작게 나누어진 소국, 혹은 부족 단위였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여기서 우 샘이 숙제를 내주셨다. 맹진에서 맹약을 한 후, 왜 바로 진격하지 않고 되돌아왔을까? 소집 후 왜 다시 흩어졌다 모여서 공격을 한 것인지 각자 생각해보라고 하셨다. 그 밖에도, 백이숙제가 언제 무왕을 만났을지, 강태공은 언제 등장하는 것인지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좋다고 하셨다.


갑자일, 주 무왕이 제후들을 이끌고 은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런데 갑자일이라고 하면 몇 년 몇 월의 갑자일일까? 사기에는 아무런 설명도 나와있지 않았다. 어쨌든, 주왕의 최후 또한 인상적이었다. 자신의 궁궐의 연회장으로 쓰였던 높은 녹대에 올라 천자의 옷이 아닌, 보석(주로 옥?)을 칭칭 감고 스스로 불길로 뛰어들었다고 하니 말이다. 무왕은 죽은 주왕의 시체를 높이 걸어 만천하에 보이고, 승리로 이끈 공신들에게 하사품을 내렸다. 또한 주왕의 애인이었던 달기를 처형했다. 왕의 여인을 죽인 것은 다른 곳에는 나와 있지 않다고 한다. 여인은 당시 고가의 재산으로 취급되었기에 대개 공신들에게 하사품으로 내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무왕은 왜 그렇게 무지막지한 처분을 내렸을까? 아마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극약 처방이 아니었을까? 이 밖에도 민심 수습을 위해 희생된 사람들을 기렸다. 비간의 묘를 만들어주고, 상룡의 마을에 표창장을 내렸다. 그렇게 은 왕조는 막을 내리고 주 왕조가 시작되었다.


분위기가 바뀌어 한 아기가 탄생한다. 주 본기는 시조 신화로 시작한다. 주 시조 후직은 원래 이름이 ‘棄(버릴 기)’다. 어머니 강원이 거인의 발자국을 보고 밟은 후 잉태를 하여 낳은 아들이 ‘기’다. 그의 존재가 상서롭지 않다 여겨져 세 번이나 버림을 받았다. 그런데 말이나 소가 아이를 밟지 않고 피했고, 산림에 버렸더니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며, 새들이 날개로 아이를 덮고 아이 밑을 깔아주기까지 했다. 이것은 전형적인 영웅의 초창기 고난의 형태로, 주몽 이야기, 모세 이야기, 타래 이야기 등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는 시조 설화다.


‘기’는 어린 시절부터 삼과 콩을 심었다고 한다. 이는 주나라가 정착을 하면서 농업을 채택했음을 보여준다. ‘기’는 후직이기도 하다. 후직의 稷(직) 자는 기장을 의미한다. 후직은 후에(요순 시절) 농사를 담당하는 신하가 된다. 요새로 따지면 농림부 장관(?). 연구자들은 후직이 활동했던 요순 시절이 신석기 농업 혁명 시기였다고 한다. 마와 콩 같은 종자가 들어왔고, 그것이 화북지역 기후에 맞았다고 한다. 콩과 마는 획기적인 곡물이었다. 그 이전에는 칡넝쿨이나 갈대로 옷을 했었는데, 마가 들어오면서 직물을 짜게 되었고, 장기보관의 장점을 지닌 콩은 사람들의 든든한 식량이 되었다.


그런데 정말 후직은 주나라의 시조가 맞는 걸까? 기와 후직이 같은 사람이 맞나? 두 가지 서로 다른 이야기가 짬뽕이 되었을 수 있다고 한다. ‘기’가 어렸을 적 훤칠했음을 드러내는 한자가 ‘屹(흘)’인데, 그가 골격이 큼지막했음을 보여준다. 그것에서도 볼 수 있듯 원래 주나라는 유목민의 나라였다. 그런데 정착하게 되면서 농사신을 시조로 삼게 된 것. 후직 신화는 농사와 관련된 이야기다. 즉, 주나라가 건국된 지역의 부족설화와 농사신 ‘후직’의 이야기가 섞인 것이다. 이렇듯 한자를 하나하나 뜯어보게 되면 일차적으로만 이해하고 넘어갔던 사실들이 새롭게 보인다. 그것은 지금처럼 하나하나 진득하게 읽어나가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오제본기, 하본기, 은본기에 이어 우리는 지금 주본기를 읽고 있다. 천천히 의미를 짚어가면서 책을 읽다보면 어느 날 역사의 의미가 하나로 연결되어 깨우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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