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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누피들]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철학>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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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씨 작성일15-04-28 17:11 조회3,2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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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스누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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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누피들은 스피노자니체(좀 억지), 푸코(이것도 좀 히히), 그리고 들뢰즈라는 철학자 라인을 일컫는 말이다.

ㅅㄴㅍㄷ.jpg


우리는 스피노자가 쓴 <에티카>를 작년 10월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무려 아직도 읽고 있다.

그렇다. 우린 한 권, 도 채 다 못 읽었다.

10년 후면 들뢰즈를 만날 수 있을까? 갑자기 개콘 <10년 후>가 떠오른다. 머리에 밀가루를 묻히고 들뢰즈를 읽는 모습이ㅋㅋㅋ

그래서 우리는 들뢰즈가 쓴 스피노자의 철학을 읽기로 했다.ㅋㅋ 후훗~~ 곧장 들뢰즈로 갈 수 있는 길도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와 철학.jpg


하여, 들뢰즈의 책 <스피노자와 철학> 1, 2장을 읽었다. 1부는 스피노자의 삶, 2부는 윤리학과 도덕학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우리는 스누피들 시즌1에서 스피노자의 삶을 읽었다. 그런데 <에티카> 4부를 일독하고 나니 스피노자의 삶의 맥락에서 감정에 대한 그의 말들을 다시 이해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면, 스피노자의 삶을 들뢰즈는 들뢰즈식으로 어떻게 이해했을까? 우리는 바로 그걸 보고 싶었다.

 

그럼 들뢰즈의 책은 왜 스피노자의 삶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일까?

들뢰즈는 인트로격으로 말라무드의 <수리공> 일부를 인용해서 붙여두었다. 다른 코멘트는 없다. 그냥 인용문 한 페이지가 전부다. 책을 읽은 어떤 인물을 인터뷰하는 장면인데, 들뢰즈는 단 두 개의 질문과 답을 선별했다. 한 가지는 스피노자를 읽게 된 이유. 다른 한 가지는 스피노자 책으로 얻은 철학의 핵심. 첫 번째 질문에서 인물은 스피노자의 책을 읽고 난 후 나는 더 이상 이전과 동일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라고 고백한다. 두 번째 질문에서 인물은 스피노자가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만드는 철학을 했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저서보다는 인간을 통해 접근하는 방식도 나쁘지 않다고 말하면서 자연스럽게 1장을 보도록 만들어준다. 들뢰즈가 보는 스피노자의 핵심은 철학사적인 의미보다는 자기를 바꾸고 삶을 바꾸는 것으로서 실천적 의미를 갖는다. 정말 <에티카>를 읽으면 이전의 우리와는 다른 우리가 될까? 일단 5부까지 읽어봐야 알겠다.^^

 

두둥. 1! 스피노자와 삶. 어쩌면 이런 평이한 제목이 스피노자의 삶에 가장 적합할 것이다. 들뢰즈는 스피노자가 던져주는 이미지부터 시작한다.겸손, 검소, 순수라는 것. 그는 이것이 스피노자 철학의 결과물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이것은 철학사에 큰 의미를 남기거나 새로운 이론을 주창한 것과 같은 스펙터클 가득한 결과물이 아니라, 스피노자라는 사람의 신체에 달라붙어 있는 어떤 태도다. 들뢰즈가 본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이다.

 

스피노자의 삶에게 들뢰즈가 인상깊게 본 장면은 그가 누군가에게 자기의 철학을 가르치는 것을 그만두었다는 점이다. “사적인 정신적 교육을 위한 소집단적 시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상가는 흔하지 않다.” 이 시점에 스피노자는 <에티카>를 저술하면서 더 이상 <설명>이 될 수 없는 다른 요소로 넘어간다

 

스피노자에게서 삶은 관념이 아니며, 이론이 하는 일도 아니다. 삶은 하나의 존재 방식이고 모든 속성들 속에 동일하게 존재하는 하나의 영원한 양태이다. 오직 이러한 관점에서만 기하학적 방법은 그 모든 의미를 갖게 된다.” 이 방법을 통해 우리는 비틀린 사유, 비틀린 감정의 원인을 스스로 밝혀내고 교정할 수 있다. 들뢰즈는 이것을 생물학적이고 광학적인 교정 방법이라고 평가한다. 이런 점에서 들뢰즈는 스피노자가 렌즈가공업을 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가 세밀하게 다듬어 내보내는 안경렌즈처럼 스피노자는 종교의 생산 법칙을 볼 수 있도록 하는 사변의 안경을 만들어냈다는 점. 그래서 들뢰즈는 기하학적 방법, 안경을 세공하는 일, 스피노자의 삶 이 세가지를 전체로 놓고 스피노자에 접근한다.

 

2장의 제목은 윤리학과 도덕의 차이에 관하여. 두 학문의 가장 큰 차이가 뭘까? 우리는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아마도 도덕은 진리를 외부에서 정해주고 따르는 방식인 반면 윤리학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쯤으로 대답하지 않을까 싶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이렇게 학문적인 방식으로 접근해서는 그와 만날 수 없다고 말한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만나기 위해서는 철학사적인 의미가 아닌, 당대 사람들을 감정적으로 격발시켰던 실천적 논제” 3가지를 만나야 한다고 말한다. 1) 의식에 대한 평가 절하와 사유에 대한 옹호, 2) 선악에 대한 가치절하, 좋음과 나쁨에 대한 옹호, 3) 모든 슬픈 정념들에 대한 가치절하와 기쁨에 대한 옹호이다.


우선 들뢰즈의 이러한 접근 태도에 놀랐다. 우리가 문장의 의미를 잘 파악하려고 읽는 차원이라면 들뢰즈는 텍스트를 자기 식대로 재편성하면서도 텍스트를 벗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발제의 달인이 만든 발제문을 보는듯한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각각의 내용 중 이런 식으로 우리를 자극했던 부분만 남기기로 한다.


1) 스피노자는 우리에게 미지의 영역 신체를 강조한다. 그러나 그가 신체를 비교우위에 두어서 그런 게 아니다. 그의 심신평행론을 떠올린다면, 그가 신체를 강조하는 것만큼 정신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중요한 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정신 영역. 들뢰즈의 표현대로라면 스피노자가 강조한 건 사유의 무의식의 발견이라는 점.


2) 들뢰즈는 아주 재밌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신이 아담에게 <너는 저 열매를 먹지 말라....>라고 한 말. 당신은 이 말을 어떻게 듣는가 생각해보라. 들뢰즈는 상상한다. 신은 아담에게 단지 자연적인 의미로, 즉 저 열매엔 독성이 있어서 먹지 말랬다거나 하는, 전달한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그것을 도덕적인 의미로 받아들인다. ...이누무 불통 상태! 아담이 말귀를 못 알아먹은 이유는 뭘까? 그는 자연의 법칙 그러니까 무엇과 무엇이 만나면 어떻게 된다는 걸 몰랐기 때문 아닐까.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좋은 만남과 나쁜 만남을 이야기한다. 이것이 윤리학의 좋음과 나쁨이라는 것이다. 자연적 법칙 그것은 도덕법칙과 다르다. 비록 법 칙이라는 말이 도덕적 뒷냄새를 가지고 있지만 말이다.^^


3) 스피노자의 모든 저작에는 3가지 유형의 인물이 등장한다. 슬픈 정념에 사로 잡혀 있는 인간들, 이러한 슬픈 정념들을 이용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그러한 정념들을 필요로 하는 인간들, 인간의 조건과 인간의 정념 일반에 대해 슬퍼하는 인간들. 스피노자는 여기서 질문한다. 왜 예속된 인간들은 자유를 두려워할까? 예속이 마치 자신의 안녕이라는 듯이.

한 가지 우리가 세미나에서 해결하지 못한 점! 들뢰즈의 수동적 기쁨에 대한 해석이다. 들뢰즈는 수동적 기쁨이 점진적으로 증가되면 어떤 전화와 변환 지점에 접근하는데,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능동적인 기쁨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에티카>를 읽으면서 능동과 수동의 정서를 구분하는데 초점을 맞춰서인가? 우리는 사실 들뢰즈의 이 주장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에티카>를 너무나 적극적으로 해석한 들뢰즈였다. 이런 마주침이 아주 신선했다. 앞으로 쭈욱~~ 이어지는 스누피들의 여정에서 스누피들식의 주장이 싹트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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