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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세미나]시즌6 마감후기
 글쓴이 : 흰나비 | 작성일 : 17-02-13 17:30
조회 : 1,033  
천사들 세미나 / 2017.02.09 / 김희진
때론 영토화하는 공부가 필요해
 
이번 시즌 천사들 세미나의 주제는 천개의 고원의 리토르넬로, 들뢰즈 철학에서의 예술에 관한 장이다. 감성 일정과 겹쳐 바빠서였을까, 서브교재를 못 읽고 세미나에 참석한 적도 있었고 시즌 마지막회를 남겨두고도 무얼 공부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목요일마다 간식 먹고 뒤풀이하러 필동을 오르락내리락 한 듯하다.
 
그러나 지난 시즌에도 책을 다 못 읽고 간 적이 많았었는데 이렇게 겉돌지는 않았었다. 사실 어느 피곤했던 날 세미나 시간에 밝혔듯이, 나는 예술에 대해 문외한일 뿐 아니라 예술에 대한 편견도 가지고 있다. 등따숩고 배부른 사람이 하는 것이 예술이며, 문화적으로도 프랑스처럼 일상적으로 예술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므로 들뢰즈가 음악과 회화를 가지고 철학을 이야기 하는 것이 뜬구름 잡듯 느껴졌던 것이다. 자고로 철학과 과학이란 세계를 이해하는 도구여야 하기에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한다. 양자역학은 이 세계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들어맞지 않는 현상이 있다는 것을 밝히면서 상대성원리를 뛰어넘지 않았던가. 들뢰즈의 예술에 관한 암호같은 서술들은 적어도 나에 관해, 나의 문제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설명하고 있지 못하는 듯 했다.
 
시즌 중반에 한 세미나원에게서 빌린 <고쿠분 고이치로>의 들뢰즈 철학에 관련된 책을 읽었다. 그 저자가 마음에 들었고, 그의 다른 책도 사서 읽었다. 들뢰즈와는 관련 없는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라는 제목의 책이다. 러셀, 스벤젠, 칸트, 마르크스...지루함에 관해 수십 명의 철학자들의 개념들을 인용하며 흥미진진하게 파고들어간다. 결론은 이것이다. “우리는 빵만이 아니라 장미로도 인생을 꾸미자인간은 필연적으로 지루함과 허무함에 빠지게 되므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기분전환을 하면서 살라는 것이다. 결론만 보면 굉장히 엉뚱하게, 어찌보면 재수 없게도 들리지만 전개 과정은 전혀 그렇지 않으니, 다른 분들에게도 일독을 권하고 싶다. (소음인적 글쓰기 스타일을 좋아하는 분께)
 
나는 일주일동안 리토르넬로 장을 열심히 읽어보았다. 그리고 짧게나마 글을 쓰기로 했다. 내가 마음을 고쳐먹은 첫 번째 이유는, 바로 내가 등따숩고 배부른 사람이라는 자각이다. 나도 장미를 원한다. 나는 등따숩고 배부르면서도 거기에 안주해서 철학의 어려운 개념들을 파고들기 싫었을 뿐이었다. 예술에 대해서도 그릇된 관념을 갖고 있어서 소비적이고 상업적인 예술의 범주를 설정하고 그들의 장미를 질투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지루함의 책 맨 뒤 결론에 갑자기 툭 튀어나온 들뢰즈의 발언 때문이다. 들뢰즈가 주말마다 영화관과 미술관에 가는 이유가 기다리기위해서였다는 것. 자신이 압도당하기를, 그리하여 동물-되기가 가능케 되기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예술은 내게 가장 낯선 세계 중의 하나다. 미술관과 오페라극장에 안가는 것 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디테일의 세밀함에 몰입하는 일은 드물다. 그 세계에 접속하는 것이야말로 나로서는 원을 반쯤 열고 일단 달려들어 한번 시도해보는 모험을 감행하는(천개의 고원, p.591)일이 될 터이다.
 
이행으로서의 리토르넬로
리토르넬로장의 첫 문장은 어둠 속에 한 아이가 있다.’이다. 들뢰즈는 음악에서의 반복적 후렴구인 리토르넬로의 개념을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의 이행을 설명하는데 쓰고 있다. 리토르넬로는 슈만의 음악 뿐 아니라 세계의 발생과 전개, 탈영토화와 재영토화까지, 모든 것을 관통한다.
 
“<리토르넬로>의 이행. 리토르넬로는 영토적 배치물을 향해 나가며 그곳에 설치되거나 그것으로부터 밖으로 나온다. 일반적으로 표현의 질료가 모여 영토를 성립시키고 영토적 모티프나 영토적 풍경으로 발전해 갈 때 이것을 리토르넬로라고 일컫는다. 이보다 좁은 의미에서는 배치물이 소리를 내거나 소리에 의해 지배받는 경우에 리토르넬로가 있다고 할 수 있다.”(『천개의 고원』, p.613)
 
인용문을 보면, 소리(ex음악)에 한정된 후렴구는 좁은 의미의 리토르넬로이다. 들뢰즈는 리토르넬로를 <이행>하는 모든 것에 적용시킨다. 영토를 만들고, 배치물들을 조직하고, 배치물들간의 관계가 전개되어가고, 여백에서의 엇갈림이 생성되고, 탈코드화가 진행되고, 다시 재영토화를 이루는 <이행>하는 모든 흐름이 리토르넬로이다. ‘카오스의 힘들, 대지의 힘들, 그리고 코스모스적인 힘들. 이것들은 모두 리토르넬로 속에서 서로 부딪히고 다툰다.’(p.593)
 
카오스에서의 한 점은 발생의 최초 시점이다. 어둠 속 한 아이의 노래의 시작이다. 그것은 도약이다. 카오스의 힘들이 점에 응집된 것이지만 이것은 오히려 카오스에 대항하는 공간의 중심이 되고 안정과 고요함을 발생시킨다. 시간과 공간의 블럭, 환경이 성립된다. ‘카오스는 이 공간의 힘을 소진시키려 하고, 침입하려고 하는데 거기에 대항하는 환경의 반격이 리듬이다.’(p.594)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거칠게 몸에 대입해보았다. 생명의 발생은 도약이다. 그리고 탄소와 질소화합물 같은 표현의 질료들은 외부환경의 것들이었으나, 그것들이 유기적으로 구성된 실체는 몸이라는 영토, 내부환경을 만든다. 이 구성된 실체는 안정된 공간이지만 끊임없이 카오스의 위협에 처한다. 이 몸은 카오스 속에서 안정을 확보해 가는데 이것이 몸 또는 삶의 리듬이다. 카오스는 우리가 맞딱드리고 인식할 수 있는 타자가 아닐 것이다. 인식된 타자는 다른 환경이다. 카오스는 그 두 개의 환경 사이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카오스는 내가 알 수 없는, 가늠할 수도 없는 무의식적인 것. 외부 또는 내 안의 힘이다.
 
들뢰즈는 '리듬''리듬화 된 것'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것은 확실히 다른 판 위에서 실현되기 때문이다.(p.595) 이것은 생성의 흐름과 영토적인 것을 구분하는 들뢰즈 철학의 무한 반복의 리토르넬로 버전이다. 리듬은 계속적 이행이다. 한 마리 닭이 매일 매일 차이나는 알을 낳는다 해도, 그 닭도 알도 리듬이 아니라 리듬화 된 것이다. 그리고 낳는 행위도 리듬화 된 것이다. 리듬은 actif이고 리듬화 된 것은 action이다.(p.595) 카오스의 힘들 사이를 흐르며 그것들을 받아들여 어떤 실체를 만들어내는 무형의 흐름, 그것이 리듬(이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인 것은 아닐까? 닭이 알을 낳는 행위는 action이며 영토화이다. 아무리 무게와 때깔이 달라도 action은 영토화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리토르넬로의 이행은 코스모스적인 힘을 향해간다고 한다. 그것은 우주적 질서! 역시 생생불식하고 바뀐다는 진리만이 바뀌지 않는()의 질서가 떠오른다. 카오스속의 코스모스. 그것은 계속적 생성과 변환이다.
 
동시적인 탈영토화와 재영토화
그럼 내가 얻으려고 하는 장미의 얘기로 돌아가볼까 한다. 예술이라는 낯선 영역은 타자이다. 다른 환경이다. 그 환경을 나의 영토로 만드는 것은 두 환경 사이를 가로지르는 선, 이행을 수반한다. 내가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이환경의 카오스로부터 불법침입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그것을 방황의 선이라고도 한다. 그런 사이환경이 리듬이 비롯되는 곳이며, 거기서 새로운 영토가 만들어질 것이다.
영토화는 언제나 탈영토화의 잠재성을 가지고 생성된다. 탈영토화도 마찬가지로 영토성을 함께 가지고 이행한다.(p.612) 이것은 너무나 동시적인 것임에도, 이분법적 공부에 익숙한 우리는 탈코드화에만 촛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차이를 생성하지 못하는 박자처럼 경직된 환경이 우리의 의식마저도 언제나 똑같은 고민, 똑같은 생각만을 반복하게 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겠지만... 나는 지금 예술에 대한 개념을 재정립하고, 리토르넬로장을 읽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카오스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방황이 계속되지 않기를 바라며 정리의 글을 쓰기로 한다. 글쓰기는 표현의 질이며, 소유이며, 행위이다. 한마디로 영토를 만드는 것이다.
 
영토란 우선 같은 종류에 속하는 두 개체간의 임계적 거리를 말하며, 이 거리를 표시하는 것이다. 내 것이란 우선 내가 가진 거리를 말한다. 나에게는 거리밖에 없는 것이다. (...) 이처럼 임계적 거리는 표현의 질료에서 유래하는 하나의 관계이다. 따라서 가까이 다가오는 카오스의 힘을 멀리 피하기 위해 거리를 두어야 한다.(p.607)
 
카오스로부터 거리두기는 들뢰즈를 내가 이해한 방식으로 어떻게든 써나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아마도 들뢰즈와의 거리가 아주 아주 멀어진다해도... 나의 임계적 거리는 더 넓어진다. 글쓰기라는 영토화는 공부한 것을 실체화하는 것이다. 암호들 속에서 내 것을 만들고 내 거리를 넓혀가는 것. 어둠속으로의 모험을 감행했다면, 그것은 반드시 영토화해야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탈영토화의 가능성인 엇갈림의 여백은 생기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아마도 우리들이 글쓰기로 공부를 마무리하는 것의 의미일수도 있겠다.
 
예술이 언제나 멀게만 느껴졌던 건 아니었다. 게다가 예술이 멀게 느껴졌던 때에도 나는 리토르넬로의 이행을 하며 리듬을 만들어가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의 사유가 내 하루집안일 사이클보다도 더 짧은, 마치 틱-현상과도 같이 얕고 짧은 반복을 하고 있는 것을 눈치 챘을 때,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결단을 하고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고쿠분 고이치로는 지루함의 3번 유형에서 사람들이 보통 그런 결단으로 빠지면서 다시 시간을 소비하는 무한반복을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다시 박자로 회귀하는 결단은 필요 없다. 내 삶은 이미 이행중이다. 그 이행은 코스모스로 열려 있다는 대목에서 나는 죽음을 떠올린다. 생성된 것이 소멸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변치않는 우주적 대 원칙이니까. 그래서? 이제는 좀 예술을 맛보면서 내 인생도 장미로 꾸며봐야겠다. 카르페 디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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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만수   2017-02-14 11:12:50
 
희진샘, 자발적 후기 감사합니다. ^^
제가 쓰려고 했는데, 제 맘을 어찌 아셨는지! 후훗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일이 있어서 지난 시즌은 책을 읽는 게 싫었는데, 이번 시즌은 책을 읽을 수 있어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함께 읽는 샘들이 계셔서 더 힘이 나고 재미있었어요.
특히 이번 시즌 전방위(!)로 애쓰신 정수샘 덕분에 음악 감상도 지대로 했네요. 쿄쿄쿄~
다음 시즌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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