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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세미나]숫타니파타 1주차 발제(나룻배의 경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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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물길 작성일18-02-21 20:53 조회3,2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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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좋은 벗이 되려는 사람들의 세미나~

<초기불교경전 찬찬히 읽기>세미나가  드뎌 시작되었습니닷 ㅎㅎ

민족의 명절 설을 지내고 모여 든 초기불교 세미나 멤버들과 기쁘게 첫인사를 나누었구요,

초기경전 중에서도 최고층에 속하는 <숫타니파타>를 함께 읽었습니다.

 빛나는 게송이 하늘의 별만큼 많았지만, 

'요건 꼭 책상머리에 붙여둬야 해!'싶은 문장이 있었네요.


"가르침을 사랑하는 사람은 번영하고, 가르침을 싫어하는 사람은 파멸합니다."


*발제문도 올립니다.

 

2018.02.19._초기불교세미나_숫타니파타_김주란

       

붓다와 함께 불꽃을 보리

 

올해 나는 쉰 살이 되었다. ‘쉰 밥은 몰라도 쉰 살이라는 말은 영 낯설다. 마흔 아홉 다음이 쉰이지 그게 왜 낯설단 말인가.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어서 얼른 적응하려고 기회 닿는 대로 쉰, 쉰 해본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도 말들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몸은 정직하다. 노안 오고 무릎 쑤신 지도 몇 년 되었다. 그래도 진짜 세월을 실감하는 건 나 자신보다 주변을 볼 때이다. 아이들은 쑥쑥 자라고, 어르신들은 급격히 노쇠해지고 계시다. 올해 여든 되신 아버지는 폐가 안 좋고, 시아버지는 신장이 편찮으시더니 급기야 한 달 전엔 중환자실에 입원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 말까지 들은 것치곤 회복세가 엄청 빨라 지금은 평소처럼 지내시지만, 내 기분은 뭔가 예전 같지가 않다. 멈춘 게 아닌가 싶게 천천히 구르던 생로병사의 바퀴가 빠르게 돌기 시작한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 또한 그럴 리 없다. 바퀴는 제 속도대로 돌고 있었을 것이다. 그걸 이제 실감했을 뿐인데, 아마 나 자신이 오십대에 접어들었다는 자각도 한 몫을 담당했을 것이다. , 인생은 짧고 시간은 빨리 흐른다! 이 한 순간의 실감, 변화하는 세계상에 대한 자각은 단속적으로 일어난다. 대부분의 시간은 마치 나라는 존재가 영원할 것처럼 그렇게 보낸다. 그리고 다음 번 정신이 들었을 때는 죽음을 앞두고 있을 수도 있다. 나뿐 아니라 우리는 대개 수면에 빠지는 버릇이 있고, 교제를 즐기는 버릇이 있고, 정진하지 않고, 나태하게 산다(뱀의 품, 6. 파멸의 경). 실상에 대한 자각 없이 버릇대로 무자각하게 지내는 것이다. 붓다는 이를 파멸에 이르는 문이라고 지목했다 예전의 나 같으면 졸고 수다를 즐기는 정도로 파멸이라니 이건 좀 심한 말이 아닌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이건 알겠다. 이것은 소리 없는 파멸이다. 요란한 파멸만 파멸이 아니다. 작년 불교세미나를 처음 시작할 때 마음은 그저 막연한 동경이었다면, 지금은 이런 인식의 차이가 생겼다. 일 년 불교와 접속한 시간이 준 선물이 아닐까? 새로 또 한 해 불교 공부를 시작하는 오늘이 새삼 감사하다.

 

부처님 말고 붓다

 

그런데 왜 하필 초기불교인가? 기원전 5세기 인도 북동부 지역을 떠돌며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가르친 고타마 싯닷타. 그를 오늘날 우리는 부처님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오늘의 우리는 부처님은 알아도 붓다는 모른다. 연좌에 앉아 광배를 두른 부처님은 신의 형상을 하고 있다. 신은 경배와 신앙의 대상일 뿐이다. 대웅전의 부처님이 아무리 자비로운 미소를 짓고 계신다 해도 그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거리에서 논쟁하고 탁발 다니는 붓다는 그냥 보통 사람이다.

당연한 얘기일지 모르나 붓다가 처음부터 붓다였던 것은 아니다. 고타마는 지금 우리와 똑같은 조건,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생로병사의 굴레를 누구보다 처절하게 자각했고 고민한 보통사람으로서 붓다-깨달은 이-가 된 존재이다. 가피를 빌고 신앙을 바치는 대상이 아니라, 나처럼 너도 깨달을 수 있다고 가르쳐 주는 스승이 된 것이다. 고타마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했다. 29세의 나이였다. 그 후 6년 간 스승을 찾아 배우고 지독한 고행을 거쳐 마침내 홀로 깨달음의 길을 연 그는 80세에 열반에 들 때까지 45년간 쉬지 않고 길 위에서 가르침을 폈다. 당시 인도의 거리에는 수행자들이 넘쳐났다. 철기문명의 영향으로 급성장한 금권과 무력이 지금껏 인도인의 세계관을 형성해온 베다신앙의 토대를 흔들었고, 번화한 새로운 도시들이 생겨났으며, 낡은 교설에서 만족할 수 없었던 구도자들이 거리로 나섰기 때문이다. 고타마는 부처님 같은 신적 존재가 아니라, 경쟁자들에게 도전받고 대중들에게 의심을 받는 설법가 중 한 사람이었다. 탁발을 나갔다가 밭을 가는 부지런한 바라문에게 수행자여, 나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밭을 갈고 씨를 뿌린 뒤에 먹습니다. 그대 수행자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린 뒤에 드십시오.라고 질타를 받기도 하고(뱀의 품, 4. 까씨 바라드와자의 경), 까까중아 거기 섰거라, 가짜 수행자여, 거기 섰거라. 천한 놈아, 거기 섰거라.“라고 땡중 취급을 당하기도 한다(뱀의 품, 7. 천한 사람의 경), 그리고 그들이 던지는 의혹과 적대의 시선을 받으며 붓다는 빛나는 진리의 언어들을 쏟아낸다. 믿음이 씨앗이고 감관의 수호가 비며 지혜가 나의 멍에과 쟁기입니다. 부끄러움이 자루이고 정신이 끈입니다. 그리고 새김이 나의 쟁깃날과 몰이막대입니다.“(stn. 77) ” “날 때부터 천한 사람인 것은 아니고, 태생으로 바라문인 것도 아닙니다. 행위로 말미암아 천한 사람도 되고 행위로 말미암아 바라문도 되는 것이오.” (stn.142)

따라서 부처님이 아닌 인간으로서 깨달은 이, 붓다-고타마 싯닷타를 만나 그의 음성을 직접 듣고 싶다면 초기불교경전을 읽어야 한다. 초기불경 중에서도 숫타니파타는 가장 고층에 속하는 경전이다. 또 주목해야할 점은 태국, 미얀마 등 남방 불교권에서는 주로 숫타니파타의 경들로 예불문을 만들어 주야로 독송해왔고, 재가신자들이 일상에서 외우는 수호경도 주로 여기의 경들이라는 사실이다(자애의경, 보배의 경, 위대한 축복의 경). 이는 숫타니파타가 짧은 운문으로 이루어진 경이라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상대에 따라 천차만별 다른 비유를 들지만, 붓다의 가르침은 초기불교경전 어디에서나 사실 일맥상통이다. 그렇다면 기왕지사 숫타니파타처럼 짧고 아름다운 시로 된 경이 실생활 속에서 암송하기 가장 좋지 않았겠는가.

 

무소의 뿔

 

숫타니파타에는 그 밖에도 유명한 경들이 실려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경은 <무소의 뿔 경>일 것이다. 사실 이 경의 시어들은 너무 아름다워서 단박에 매혹된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문장 자체만도 육중하고 단호하지 않은가. 그런데 되풀이해서 읽다보면 곧 알쏭달쏭해진다. 무소도 아니고 왜 무소 뿔이며 왜 혼자서 가라는 걸까. 간다면 어디로 가는 걸까 등등. 이 경의 빠알리어 명은 칵가비싸나 숫타이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문장은 에코 짜레 칵가비싸나깝뽀’. 주석에 따르면 이 문장을 두고 해석이 분분한 모양이다. 아무튼 분명한 건 인도의 코뿔소는 큰 뿔이 하나 달렸다는 사실과 코끼리, , 코뿔소 등 크고 강하면서 동시에 평화로운 동물은 종종 성자에 대한 비유로 쓰였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무소의 뿔이라는 비유에는 깨달은 자의 번뇌를 끊는 강한 힘과 해탈로 얻은 단순한 삶의 형태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짜레, ‘가라는 수행하는 삶을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덧붙이자면 수행자의 삶은 유행(流行), 길 위의 삶이라는 사실과도 연관된다 하겠다. 그럼 이제 남은 것은 혼자서라는 말이다. 혼자라는 말은 혼밥의 무능력, 혼자 나고 혼자 가는 원천적 고독 등 너무 다양한 뜻으로 읽히는 말이다. 그렇다면 혼란을 줄일 길은 이 경 안에서 혼자인 상황과 혼자가 아닌 상황에 대한 구절들을 찾아 보는 것이겠다.

자식과 아내에 대한 기대는 뻗은 대나무가 엉킨 것과 같으니,

대나무 순이 서로 달라붙지 않듯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stn. 38)

물에 사는 물고기가 그물을 찢는 것처럼, 모든 장애들을 끊어 버리고,

불꽃이 불탄 곳으로 되돌아 가지 않는 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stn. 62)

 

여기에서 자식, 아내, 엉킨 대나무, 그물, 불타는 불꽃은 뭔가 엉키고 얽매여 있는, 혹은 그런 원인을 제공하는 요인들이다. 시구에 명시된 말 그대로 장애이다. 혼자가 아닌 상황이란, 이런 것들에 얽매여 있는, 혹은 이 상태를 만들고 있는 상황이다. 이 경에서 혼자서 가라고 스스로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은 이 얼크러짐을 직시하고 이 연기조건이 빚어내는 괴로움을 떠나라는 명령이다. 대개 우리는 이 조건을 무자각적으로 받아들인다. 대나무의 뿌리는 무섭게 뻗어나가기로 유명하다. 자식과 아내에 대한 집착은 대나무 뿌리처럼 서로를 얽어맨다. 엉킨 뿌리만 보면 사는 건 원래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인가 싶다.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괴로움 속에서 체념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시선을 돌려보면 같은 대나무라도 죽순은 전혀 엉키지 않고 곧고 매끈하게 쑥쑥 자란다. 그물 밖의 물고기처럼 자유로운 생()이다. 대나무 뿌리와 그물을 영원한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한 영원히 알 수 없는 자유의 경계이다. 상상만으로도 속이 시원해진다. 하지만 우리는 바로 다음의 수순을 따르기 쉽다. ‘그러나 내 힘으로 이런 장애 - 대나무 뿌리의 엉킴과 그물의 제약-를 끊을 수 있겠는가?’하는 회의가 드는 것이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건 멋지지만 좀 외롭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본문 아래 달린 깨알 같은 주석을 보면 이 우다나의 주인공 중에도 우리처럼 심약한 이들이 있어 위로가 된다.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데에 진력이 난 이들은 그물을 찢듯 그 생활을 떠났다가도 다시 돌아가기를 세 번 반복한다. 수행에는 불퇴전의 정신이 필요하다는데 이건 어찌 된 일일까? 세 번 돌아갔다가도 끝내 다시 도전하는 것, 어쩌면 불퇴전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물에 때묻지 않는 연꽃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게송의 주인공 역시 출가를 결심하기까지 세 번의 마주침이 있었다. 처음 큰 북 소리에 두려워하지 않는 사자의 새끼를 보았을 때 그는 생각했다. “언젠가 나도 갈애나 견해의 두려움이 생겨나더라도 겁먹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또 길을 가다 나뭇가지에 걸어 말리고 있는 어부의 그물을 보았다. 바람이 그물에 걸리지 않고 부는 것을 보고 그는 또 생각했다. “언젠가 나도 갈애나 견해나 어리석음의 그물에 걸리지 않고 가리라.” 마지막으로 못에 자란 연꽃을 보며 그는 나도 세상에 태어났지만, 세상에 오염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통찰을 닦아 연각불이 되었다. 처음 두 번은 언젠가 언젠가하고 원을 세웠다면 마지막엔 드디어 실행에 옮긴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여기서 서원과 실행의 차이보다 세 번 그가 소리와 사자, 그물과 바람, 물과 연꽃의 존재방식을 알아차렸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다. 어쩌면 불퇴전의 용기란 출가같은 단 한 번의 결행이 아니라 이같이 고요하고 끈질긴 통찰력에 가깝지 않을까?.

불꽃이 탄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돌아가지 않겠다는 각오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더는 태울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세 번을 다시 돌아간 것은 출가의 각오가 앞섰기 때문일 것이다. <무소의 뿔 경>을 읽으며 생각한다. 인생이 짧다고 화들짝 놀라 각오만 앞설 일이 아니다. 대나무와 자식을 보며 내가 무엇에 집착하고 무엇에 불타고 있는지, 나의 불씨에 연료를 공급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요히 관찰해야겠다. ‘초기불경 찬찬히 읽기의 멤버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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