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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세미나 6주차 후기
 글쓴이 : 정철현 | 작성일 : 18-03-27 18:27
조회 : 203  
이번 법구경에서는 어리석은 자의 품, 현명한 님의 품, 거룩한 님의 품, 천의 품, 악의 품을 읽었습니다. 

특히 어리석은 자의 품에 대해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한 얘기들이 많이 오갔던 것 같습니다. 
어리석은 자와 친구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어리석은 자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 얘기들이 분분했던 것 같습니다. 

"더 낫거나 자신과 같은 자를
걷다가 만나지 못하면, 
단호히 홀로 가야하리라
어리석은 자와의 우정은 없으니."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천의 품>에서 
선한일을 사소하게 여기지 말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제 발제문을 첨부합니다.


불교세미나 2018.3.26.법구경-담마파다 정철현

 

선한 일을 사소하게 여기지 말라

 

의심하는 빅쿠들

<천의 품> 초반부에는 불법에 귀의한 지 얼마되지 않아 깨달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들 대부분은 평소 악한 일을 했던 사람들인데, 붓다의 가르침을 통해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된다. 이 중 흥미로웠던 부분은 이들을 보는 다른 빅쿠들의 시선이다.

 

수행승들이 많은 악행을 범한 자가 어떻게 그러한 몇 마디 법문으로 특별한 곳에 태어날 수 있는가?’라고 의아해하자, 부처님께서는 수행들들에게 쓸데없는 천 마디 말을 하는 것보다 들어서 안온해지는 한 마디의 말이 낫다.’라고 가르쳤다. <천의 품, 408>

 

다른 빅쿠들은 어떻게 그들(망나니었던 땀바다티까, 자기 남편을 죽인 빅쿠니 꾼달라, 수행승을 사칭한 다루찌리야 등등)이 적은 법문만 듣고도 아라한이 될 수 있었는지 의문스러워 한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법문도 적게 듣고, 수행한 지도 얼마 안되었는데 어떻게 이토록 빨리 깨달을 수 있는지 질투한다. 게다가 깨달은 자들의 과거 이력은 천박하기까지 하다. 땀바다티까는 망나니일이나 하던 자이며, 빅쿠니 꾼달라는 다른 수행단체에 속했던 자이며, 사람을 죽인 여인이다. 바히야 다루찌리야는 아라한인척 연기했던 사람이다. 난파당해 옷이 없었던 그를 수행승으로 착각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먹을 것을 주자, 그는 자신을 아라한이라고 착각하기까지 한다.

다른 빅쿠들이 보기에 이들의 깨달음은 매우 불공평한 일처럼 보인다. 나도 저 비쿠들 사이에 있었다면 빠르게 깨달은 자들에 대해 의구심을 품지 않을 자신이 없기에, 그들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든다. 그들의 이러한 마음가짐 자체가 그들의 수준 자체를 반증하며 그들의 수행 자체를 방해하는 것 같다. 물론 부처님의 게송으로 그러한 수준에서 벗어 났지만 말이다. 이들의 마음가짐을 부처님이 짚어주자 그들은 변한다. 그들은 그전에 어떤 마음을 지녔던 것인가?

선한 일을 사소하게 여기지 말라

그들은 깨달음의 과정을 작은 노력들이 모여서 레벌-업되는 과정으로 이해했던 것이 아닐까? 그러니 매우 작은 노력으로 최상의 결과를 냈다고 깨달은 자를 부러워했던 것은 아닐까? 또한 그들은 깨달은 자의 노력을 매우 작고, 미미하다고 오해했다. 이러한 노력들은 자기들도 역시 하고 있으므로^^ 그래서 자신이나 그들이나 비슷할 터인데, 왜 난 안되고 그들은 되었냐고 의심했던 것이다.

또한 조금씩 수행이 축적된다는 생각을 지니면, 자기자신을 이기는 일에 얼마간의 여지를 남겨두기 쉽다. 그들은 분명 하루하루 조금씩 도망갈 여지를 남겨두는 마음을 가지고 수행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조금씩 쌓이고 쌓이면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을 것이다. 이는 공덕을 행하는 사리뿟따 테라의 친구의 태도와도 비슷하다. 그는 공덕을 지으려고 천가지 갖가지로 백 년이나 다달이 제사를 지낸’(415). 이곳저곳 문어발식으로 제사를 지내는 마음은 그 중 하나만 걸려라 식의 마음이다. 하지만 붓다는 그보다는 한분의 수행자에게 공양하면, 그 공양이 백년 제사보다 낫다고 말한다. 붓다는 집중된 마음을 요구한다.

얼마나 많은 법문을 들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니라. 법문이나 게송을 단 한마디라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이익을 낳는 법이니라.”

 

법문을 듣는 횟수는 깨달음에 관계 없다. 단 한차례라도 여지를 남겨두는 그 마음을 단호히 없애고 법문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양보다는 질이다. 자신의 온갖 탐욕, 나쁜 생각과 싸워서 이기려는 마음, 선한 행위를 지속해서 하려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 보다 큰 선행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얼마나 집중해서 전심전력하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여러 마음이나 방일하고 나태한 마음을 품어서는 안된다. 산만하고, 게으른 마음 상태로는 아무리 수행해도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선한 일이 아무리 작더라도 사소하게 여기지 말라고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부호에게 그 진실을 확인하고 그들에게 선한 일은 아무리 작더라도 사소하게 여기지 말라. 부처님을 비롯한 수행승의 무리에게 공양을 하는 것을 사소한 것이라고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내게 닥치지 않는다.’라고 선을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야 하리. 물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지면, 물단지가 가득 차듯, 슬기로운 자는 조금씩 조금씩 모은 선으로 가득 찬다.‘라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이 끝나자 그 부호는 흐름에 든 경지를 성취했다. <악의 품, 435>

 

부처님의 말씀은 작고 사소한 선행이 마치 적립금 쌓이듯 쌓인다는 말이 아니다. 또 깨달음이 이렇게 이루어진다는 말도 아닌 것 같다. 아무리 작더라도 선한 일을 계속하는 것은 끊임없이 마음을 다잡는 행위이다. 자신에게서 어떤 여지나 나태함, 방일함을 남겨두지 않으려는 태도이다. 그것은 선한 일에 서두르고 악으로부터 마음을 지키는 일이다. 선한 일을 하는데 있어 수행자에게 사소함과 그렇지 않음이 어디 있겠는가. 위의 인연담에서 나오는 자는 선한 일에 서두르고자, 자신이 배운 바를 실천하고자, 마을사람들에게 보시를 권한 것이다.

또 보시를 하느라 가난해진 아나타삔디까가 다른 인연담에 등장한다. 그는 종교에 빠져 가산을 탕진한 것이 아니다. 그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진리에 대한 신심이 매우 큰 사람이다. 그는 집 문을 지키는 신이 이제 고만 고따마 수행자에게 보시하고, 다시 부자가 되라는 말에 화를 내고, 그를 내쫒는다. 어찌보면 일리 있는 말처럼 들린다. 재산이 있어야 보시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조금이라도 확신을 버리지 않고, 선한 일을 게을리하지 않으려 한다.

그의 가산탕진은 무모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선업을 지으려는 태도이며, 더 이상은 탐욕과 악업의 장, 부자가 되는 길로 들어서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가난해진 그가 보시하는 양은 이제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것 자체로도 공덕을 짓는 일이지만, 그의 계속된 보시는 그 자신 스스로에 대해서도 선업을 행하는 일 같다. 보시를 위한 노력을 통해 계속 수행에 정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자신이 보시하는 양이 하찮다고 해서, 이 사소한 선행을 무시하면, 그 자리에 금방 악이 쌓일 것이다. 공덕있는 일에 게으르면 마음은 어느 새 악한 것을 즐기게 되는 법이다. 그래서 아무리 작더라도 선한 일을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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