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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 세미나 시즌3] 1-2주차 후기, <바울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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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랑 작성일18-08-29 20:03 조회2,20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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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 세미나 시즌3] 1-2주차 후기, <바울 다시 읽기>

 

   결국 바울 다시 읽기는 그의 생을, 내 삶으로 어떻게 가져올 것인가로 돌아와야 한다. 우리가 공부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여긴다.

자신의 몸에만 관심이 있어 공부를 하러 오시는 분들이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대개 자신에 대한 고민으로, 이전과는 다르게 살고 싶어 공부를 시작하게 되잖나. 그렇게 공동체에 접속하고, 도반들의 노동에 빚지고, 공부가 깊어지며 학인답게 자신의 글과 말이 달라지고, 몸과 생활이 바뀌고, 욕망과 희망까지 함께 슬금하게 변화하는 것이 아닐까?

극단적 평등주의와 사회적 약자를 향하는 예수 운동을 해온 사도 바울. 그는 억압적인 사회 안에서 다른 자립 공동체를 꾸리고, 정성 어린 노동과 관심으로 클레시아라는 일종의 장소를 만들고 돌보았다. 주류의 법과 제도를 어긋내며 다르게 어울릴 수 있다는 것, 특히 위계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모두가 더불어 살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실천한 바울은 내게 큰 귀감이 되었다.

 

얼마 전에 사랑은 같이 밥을 먹으며 싹튼다.’는 취지의 글을 읽었는데, 나 또한 모든 연애가 밥을 먹으며 시작되었고, 청년 셰어하우스에서 지낼 때는 한 달에 한 번 다 모여 밥을 먹던 반상회가 가장 큰 행사였던 기억이 있다. 익히 들어 알고 있던 감이당의 밥터도, 와보니 따뜻하고 편안한 곳이었다. 함께 둘러앉아 밥을 나누어 먹는 것은, 사람이 사랑을 전하는 가장 중요한 방식일지 모른다.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달리, 바울은 이교도와 이단들과 한데 어울려 식사를 했다고 한다.

 

십자가에 못 박혀 훼손된 시신을 불경하게 여기던 풍습과 달리 그의 죽음을 자기를 비워냄’(케노시스)으로 재해석한 바울의 행적을 기억한다. 예수의 죽음은 사약을 받아 마신 소크라테스와, 분신해 스러져간 전태일처럼 급진적인 무능이자 인문학적 죽음이었다. 예수처럼 자신의 죽음마저 받아들이는 완벽한 자기 해방이 부활일 수 있고, 부처처럼 몸을 다시 얻지 않아도 그 깨달음과 앎이, 진리가 남아 전해질 수 있다는 것. 인간은 미래를 위해 살 수 없고, 후손이 곧 나라는 고미숙 선생님의 말씀도 남았다.

 

지금 2-30대의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도, 새로운 언어와 담론을 여성 스스로 만들어내고 싶은 열망과, 다른 존재와 내가 이어져 있다는 감각에서 나온다고 느껴진다. 나도 구공(90) 백말띠로 드셀 것이 우려돼 여아낙태가 대대적으로 이뤄지던, 그래서 여/남의 성비가 1:2가 되던 해에 태어났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채용이 더 어려운 성차별을 겪기도 하고, 짧은 직장 생활에서도 느꼈듯 동료보다는 젊은 아가씨로 대상화되어 일상에서 성폭력을 무수히 당하기도 한다. 그래서 분노가 많다. 이 분노를 동력 삼아 새로운 운동을 일으킬 수도 있지만, 이러한 분한으로는 창의성을 만들어내기 어렵다는 점, 그리고 혐오에 대응하는 현명한 태도는 혐오가 아니라 결국 사랑이라는 것을 바울이 가르쳐준 것 같다. 사랑을 통한 연대와 상호호혜!

 

사람은 어떤 사건을 만나 돌이킬 수 없이 변모한다고 한다. 바울도 그런 계기가 있었고, 이른바 탕자의 법칙처럼 예수를 가장 미워하던 자가 예수의 본질을 꿰뚫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의 민족 종교에 불과한 유대교를 세계의 종교로 이끌어냈다.

견줄 수는 없지만, 나 또한 몇 년간의 무수한 염탐과 공부길의 방황을 내려놓고 우선 감이당에 몸을 들이밀게 되었다. 어쨌든 감이당에 접속한 건 나에게 사건이고, 먼저 발을 디뎌본 경험으로 떠밀어준 나의 파트너에게 감사하며, 이왕에 이렇게 시작된 인연을 좇아 성실히 임하며 물들어가길 바라고 있다.

 

후기를 쓰기 위해 속기사가 된 듯 세미나에서 오간 이야기들을 메모해놓았는데, 다 정리하지는 못하고 나에게 남아 화두가 된 문장을 걷어 심게 되었다. 감이당 세미나를 매주 월요일에 다니니 평일에 쉬고 있어도 뇌가 쉬는 게 아니고, 주말이 오면 책을 읽어야하느니라 절절매며 백수임에도 월요병에 시달리게 된다. 깨달음이 찾아오는 과정에 대한 관심이 많은데, 이런 감이당의 틀 속에서 공부하는 몸을 근기 있게 만들며 내게 앎이, 창호에 드린 한 줄기 햇살처럼 문득, 하이얗게 다가오길 소망한다. 이 공부가, 나의 사랑이 이윽고 무르익어 세상과 이웃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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